[더 나눔센터] 방문기
올해는 3.1 만세운동 100주년이 되는 해다. 전국에서 관련 행사, 전시, 영화 등이 한창이다. 킹덤 패스파인더 HTM도 가만히 있을 수 없다. 영적 해방을 위해 부산에서 3박 4일간 킹덤빌더스쿨을 진행하기로 했다. 그런데 아우내 장터 근처가 아니라 왜 부산인가? 부산 킹덤빌더께서 장소를 제공해 주셨기 때문이다. 부산 간 김에 부산 관련 글 소재도 찾아볼까? 평안북도 출신이지만 부산의 위대한 인물로 꼽히는 장기려 박사를 다뤄볼까? 부산 초량 이바구길에 기념관이 있다는 정보도 찾았다. 스쿨이 한창인 3일째 아침. 거사를 위해 길을 떠난 제이. 지하철을 한 번 갈아타고 부산역에 내려 지도 어플을 켜고 본격적인 길 찾기 시작.
어수선한 상가들을 지나 한적한 주택가로 들어서니 오른편에 십자가가 보인다. 이바구길 초입에 있는 초량교회는 1892년 세워진 한강 이남 최초의 교회다. 3.1 독립운동의 영남지역 거점교회이자 주기철 목사님이 3대 담임목사로 시무하셨던 역사적인 교회다. 처음 방문한 교회 역사를 어쩜 그리 잘 아느냐고? 교회 담벼락에 상세히 적혀있다. 참고로 장기려 박사는 주기철 목사의 아내인 오정모 사모의 유방암 수술을 집도한 주치의였다.
교회 담벼락을 좌우로 살피며 여유롭게 걷던 제이. 문득 눈을 들어 앞을 바라보니 이게 웬 계단들이지? 천국과 이 땅을 연결하는 계단인 듯 하늘로 뻗은 아득한 168개의 계단. 핸드폰 시계를 보니 때마침 10:04. 1004들이 오르내린 야곱의 사다리로 생각하고 오르라는 계시일까? 다른 길은 안 보인다. 이 길이 천사 아니 장기려 박사님을 만나러 가는 길이 맞겠지? 올라가면 심장이 터져 죽을지도 모른다며 되돌아가라는 신호를 다급하게 보내는 뇌를 나와 분리하고 계단 위에 오른 다리를 올려본다. 감사하게도 심장이 터지기 직전 168개의 계단을 정복한 제이. 아래를 내려다보니 솟았던 땀이 쏙 들어갈 만큼 까마득한 높이. 기념관에 도착해서야 안 사실인데 계단이 아닌 쉬운 길이 있었다. 머리가 나쁘면 손발이 고생한다는 어르신들 말씀을 (손)발로 체험한 날이다.
어려운 길을 택해 방문한 기념관의 정확한 이름은 [더 나눔센터]. 센터의 주된 장소를 장기려 박사 기념관으로 세우고 부차적인 시설로 북 카페, 일자리 나눔방 등 지역주민을 위한 시설들을 만들어서일까? 홍보 전단이나 인터넷 검색 명칭이 다양하게 적혀있어서 방문객 입장에서 정보를 찾기에 다소 혼란스럽게 느껴진다. 2013년 개관한 6년차 센터인 만큼 이제는 명칭 통일이 필요해 보인다.
제이를 반기는 흑백 사진 속 박사님께 마음으로 인사를 건네며 기념관으로 입장. 장기려 박사 기념관은 입구에 들어서면 전체가 한눈에 담기는 아담한 크기다. 평생 소박하게 사셨던 박사님의 생애만큼이나 작은 규모. 입구에는 박사님의 연대표와 방명록이 놓여있다. 입구를 지나면 둥근 벽을 따라 사진과 글이 걸려있다. 유품으로는 장기려 박사가 수술할 때 사용했던 수술대, 의사 가운과 청진기, 나고야 제국대학 학위증, 친필 서예 액자 한 점, 막사이사이상 메달이 전시돼 있다. (막사이사이상: Ramon Magsaysay Award 필리핀의 전 대통령 라몬 막사이사이를 기리기 위해 1957년 4월 제정된 국제적 상으로 ‘아시아의 노벨상’으로도 불린다.) 제이는 평균 관람 시간 30분을 넘겨 33분 만에 관람을 마쳤다. 기념관만으로는 박사님을 알기엔 아쉬움이 남는다. 부산 출발 전에 [장기려, 그 사람] 평전을 읽고 가지 않았다면 허탈했을 법한 규모다.
한국의 다니엘 장기려 박사
장기려 박사의 생애를 살펴보자. 1911년 평안북도 용천군 출생. 개성 송도고등보통학교를 거쳐 지금의 서울대 의대 전신인 경성의학전문학교 졸업. 일본 나고야 제국대학 의학박사 학위 취득. 평양의과대학 외과교수를 거쳐 월남 후에는 부산에서 복음병원 천막진료소 개설. 의료보험의 효시인 부산 청십자 의료보험조합 설립. 그 공적을 인정받아 아시아의 노벨상이라 불리는 라몬 막사이사이상 수상. 1995년 성탄절 새벽 85세의 나이로 별세.
박사님의 생애를 살펴보면 대한민국 근현대사를 관통하신 분답게 역사적 아픔과 위험한 순간들에 대한 기록이 많다. 월남 당시 가족과 헤어져 둘째 아들을 제외한 아내와 부모님, 나머지 자녀들은 모두 북한에 살고 있다. 3번의 이산가족 상봉 기회가 있었지만 다른 이들에게 기회를 양보하느라, 이산가족상봉 협상 결렬 등의 이유로 끝내 가족들을 만나지 못하고 돌아가셨다. 그는 우리나라 최초 간암 절제 수술에 성공했고 전시 상황에 소실된 의료교과서를 전부 암기하여 수업을 진행하기도 했다. 그렇게 외과 의사로 유능했던 그를 김일성이 납북대상 1호로 지목하기도 했다. 복음병원이 발전하는 과정 중에는 내부 알력 다툼으로 제자에게 쫓겨나는 수모를 당하기도 했고 빨갱이라는 모함을 받아 일주일간 조사를 받고 풀려나기도 했다.
이념에 얽매이지도 권력에 타협하지도 않았던 박사님의 생애는 다니엘의 생애와 닮았다. 노예 출신으로 타국에서 왕 다음의 자리까지 올라간 다니엘. 하나님께 기도했다는 이유로 사자굴에 던져지기도 했지만 그를 모함한 자들은 죽고 왕이 바뀌는 역사 속에서도 건재했던 다니엘. 그는 해몽을 통해 백성에게 7년의 기근에서 살 수 있는 양식을 보급해 준 사람이다.
모두가 가난했던 한국의 60년대. 장기려 박사는 의료보험의 전신인 청십자 의료보험조합을 설립하여 돈 때문에 치료받지 못하는 환자가 없는 시스템을 만들었다. 그는 의사 진료 한 번 받아보지 못하고 죽어가는 가난한 사람들을 위해 뒷산 바윗돌처럼 항상 서 있는 의사가 되기로 작정한다. 그는 돈이 없는 환자에게 몰래 병원 뒷문을 열어주고 고아원에 자신의 월급 전부를 보내기도 했다. 김일성대학 교수 시절에 주일에는 예배를 드리기 위해 강의를 거부하기도 했지만, 그의 청빈한 삶과 실력 덕분에 무사할 수 있었다. 일제 치하와 공산정권, 혼란스러운 한국 정권 모두에게 인정받았던 장기려 박사. 시스템(체제)의 변화에 요동하지 않는 하나님나라 자녀의 삶의 모범이다. 기념관에서는 그를 한국의 슈바이처라고 소개했지만 제이는 한국의 다니엘이라 부르고 싶다.
글 쓰는 장기려 박사
장기려 박사는 근대 인물이기에 자료가 많이 남아 있기도 하지만 유독 그에 대한 정보가 많다. 이유가 뭘까? 그의 글쓰기 습관 때문이다. 고된 업무로 지치고 당뇨, 불면증, 신부전증, 부정맥 등의 질병을 앓으면서도 그는 일과성뇌혈관순환부전으로 쓰러지기 전까지 약 10년간 꼬박꼬박 일기를 썼다. 그는 일기장에 날짜와 날씨, 오늘 만났던 사람, 대화, 자신의 건강 상태, 그날의 성경을 묵상하며 느낀 점을 매일 기록했다. 일기뿐 아니라 글쓰기는 그의 중요한 습관이었다. 32년간 이끌었던 [부산모임] 소식지에 214편, [청십자] 소식지에 173편을 기고했고, 신앙적으로 많은 영향을 받은 일본인 후지이 다케시, 야나이하라 다다오의 성서 강해 90여 편을 번역하기도 했다. 일상적인 기록과 기독교 기록물 외에도 간(肝)연구와 관련된 전문 기록물까지 합친다면 엄청난 양의 기록을 남긴 셈이다.
기념관에는 그가 친필로 기록한 환자 기록지와 외과학회 연구자료 초록집이 유리 진열장에 전시돼 있다. 한글, 한문, 영어가 섞인 전문적인 기록이라 해독은 거의 불가능하지만 필체를 통해 그의 성실함과 꼼꼼함을 엿볼 수 있다.
매일의 삶을 로그북에 기록하고 그것을 토대로 PDER하는 삶을 사는 킹덤빌더의 삶과 닮았다. 평전에 담긴 일기를 보면 매일 묵상한 성경을 의사란 직업과 환경에 적용하려 노력한 흔적이 보인다. 진짜 능력은 지식을 아는 것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의식의 변화를 통해서 나오는 것임을 그는 이미 알고 있었다.
아쉬운 점 두 가지
아쉬운 점 하나는 한국 사회가 이런 위인을 너무 빨리 잊어버린다는 것이다. 3.1운동 100주년 기념사업이 2019년에만 끝나는 이벤트가 되지 않도록 노력하듯이 후대가 근현대사를 기억할 때 장기려 박사를 자연스럽게 떠올릴 수 있도록 미디어에서 좀 더 자주 그의 업적이나 삶을 노출해 주었으면 하는 마음이 든다. 2013년에 개관한 [더 나눔센터] 역시 장기려 박사에 대한 자료나 기록물들을 정기적으로 업데이트 했으면 하는 소망도 품어본다.
둘째는 장기려 박사가 말년에 내린 특이한 결단에 대한 아쉬움이다. 그는 부산 산정현교회 장로였지만 정작 그의 신앙에 영향을 미친 사람들은 함석헌, 야나이하라 다다오, 후지이 다케시였다. 이들은 모두 무교회를 주장하는 기독교 지성인으로 분류되는 인물들이다.
한국전쟁 이후 혼란스러운 교회를 떠난 성도들. 요즘의 가나안 성도라 불리는 이들과 같은 이유일까? 평전에는 그가 ‘종들의 모임’이라는 무교회주의자들의 모임에 참여하여 4년 반 동안 이들을 살펴본 뒤에 78세의 나이에 두 번째 세례를 받은 것으로 기록하고 있다.
이제는 교회가 이런 이야기를 객관적인 입장에서 판단할 토대가 생겼다고 생각한 것일까? 평전에서는 이 부분에 대해 비중 있게 다루고 있다. 평전의 저자는 주변인들을 인터뷰하고 관련된 일기를 수집하면서 교회 제도권을 떠난 그의 결정으로 인해 한국교회에 어떤 분란도 없었음을 조심스럽게 밝힌다.
지난 2월에 열린 HTM 심포지엄에서는 교회가 가나안 성도들을 어떻게 품을지 고민하는 시간을 가졌다. 만약 장기려 박사님이 살아계셨다면 심포지엄의 강사 중 한 분으로 초대해서 직접 소견을 듣고 싶은 마음이다. 무교회주의자이지만 한 공동체 모임의 일원으로 활동했고 공동체의 규칙과는 다르게 의사로서의 사명을 끝까지 지켜낸 사람. 삶과 신앙이 일치되기 위해 끊임없이 고민하면서 70대에 내린 그의 결정이 만약 살아있다면 100세가 넘은 지금은 어떻게 바뀌었을지 직접 듣지 못해 아쉽다.
짧은 일탈을 마치고 스쿨 장소로 복귀하니, 점심 먹을 시간이다. 허기짐에 우걱우걱 도시락을 먹으며 제이는 생각했다. ‘그래도, 돌아올 곳이 있어서 행복하네.’
2019년 4월호 차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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