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나라와 한국교회 : 영성을 추구하며

287
0

배덕만 교수

1. 들어가는 말

하나님나라는 하나님이 왕으로서 통치하시는 세상이다. 즉, 하나님이 우주를 창조하셨고, 이 땅의 모든 생명도 그분의 피조물이기에, 우주와 모든 생명이 하나님의 통치하에 존재한다. 따라서 하나님나라는 특정한 이념, 종교, 인종, 국가로 환원될 수 없다. 동시에, 하나님은 이 세상에서 이스라엘과 예수, 그리고 교회를 통해 그 나라의 본질을 계시하고 실험하셨기에, 성경과 교회사는 하나님나라의 실체가 계시되고 실현되는 중요한 도구다.
또한 하나님나라는 개인, 교회, 사회, 그리고 생태를 포함한다. 성령의 임재를 통해 실현되는 하나님나라에선 개인이 온갖 억압에서 해방되고 예수의 증인으로 산다(마12:28, 행1:8). 하나님의 통치하에서 교회는 하나님과 이웃에 대한 사랑으로 충만하고(행2:42-47), 사회는 자유와 해방, 정의와 평화의 세상이 된다(사61:1-3). 그리고 이런 변화의 도미노는 생태의 보존과 회복으로 이어진다(사11:1-9). 이처럼, 하나님나라는 통전적이며 총체적이다.

그렇다면 한국교회는 하나님나라의 관점에서 어떻게 이해할 수 있을까? 물론, 한국교회는 하나님나라와 동일시될 수 없다. 이 땅의 어떤 교회도 그럴 수 없으며, 지금까지 그런 교회는 없었다. 그럼에도 한국교회는 하나님나라와 무관하지 않으며, 비록 제한적이지만 그 나라의 일부가 되는 꿈도 포기할 수 없다. 이런 논리에서, 한국교회는 지난 130여 년 간 이 땅에서 하나님나라의 중요한 현장이자 도구였으며, 동시에 배반과 반역의 공간이었다. 명암이 공존한 것이다.

이 글은 한국교회의 역사를 하나님나라의 관점에서 검토함으로써, 한국교회의 빛과 그림자를 파악하는데 일차적 목적을 둔다. 동시에, 한국교회의 현재 모습을 형성하는데 결정적인 영향을 끼친 역사적 사건들과 그것들에 대한 교회의 반응에 주목하면서, 시대와 환경의 변화 속에서 보존해야 할 고귀한 유산과 극복해야 할 과제에 대해 고민해 보고자 한다. 부디, 이 작은 작업이 한국교회가 하나님나라의 소중한 도구로 성장하는데, 소박하지만 의미 있는 도움이 되길 기대한다.

2.무속과 한국교회

종교사적 측면에서, 개신교는 한국에서 가장 어린 종교다. 반만년의 역사에서 불교와 도교는 1500년 이상 이 땅에 존재했고, 유교도 1000년 이상의 역사를 지니며, 무속의 경우, 정확한 연대측정이 불가능할 정도로 역사가 유구하다. 반면, 기독교의 역사는 천주교가 230년, 개신교가 130년에 불과하다. 이런 전통종교들 틈에서 기독교가 힘겹게 자신의 자리를 확보해 온 역사가 한국교회사다. 지금은 전통종교를 능가하는 교세와 영향력을 지니고 있지만, 그것은 단지 외적 측면일 뿐, 한국인들의 문화, 심지어 기독교인들 의식의 심층에는 여전히 전통종교의 자취가 여전하다. 특히, 한반도에서 가장 오랜 역사를 지니며, 21세기에도 여전히 민간신앙으로 살아 있는 ‘무속’의 영향력은 강력하다. 지난 130여 년간, 기독교, 특히 개신교가 한국인의 삶과 의식에서 무속의 잔재를 제거하려 몸부림 쳤지만, 노력에 비해 결과는 그리 신통치 못하다. 근대과학의 경이적 발전과 계몽주의적 세계관의 압도적 영향에도, 무속은 한국인의 집단적 무의식 속에 생생히 살아 있다. 따라서 한국 개신교도 무속의 영향에서 자유로울 수 없었고, 이런 상황은 지금도 진행형이다.

개신교적 관점에서, 무속의 영향은 긍정적 측면, 가치중립적 측면, 그리고 부정적 측면 모두를 지닌다. 먼저, 영적 세계에 대한 무속의 확고하고 생생한 믿음은 긍정적으로 평가할 수 있다. 무속은 사후에 혼령의 존재를 인정하고, 영적 존재와 현세 간의 긴밀한 관계도 중시한다. 물론, 세부적인 믿음체계와 종교적 관행 면에서, 기독교와 무속 간에는 넘어설 수 없는 간격이 존재한다. 그래서 양자의 관계가 개선될 여지는 거의 없다. 하지만 개신교가 외국종교임에도 한국에서 빠르게 대중화·토착화할 수 있었던 것은 한국인들 안에 깊숙이 내재된 영적 존재와 내세에 관한 무속적 세계관의 강력한 영향과 무관하지 않다. 이성과 합리성에 대한 맹신 때문에 영적 세계와 내세를 부정하는 서구에서 기독교가 냉대 받는 현실과 비교할 때, 한국교회의 경이적 성공과 무속적 우주론의 상관관계에 더욱 주목하게 된다. 물론, 무속으로 모든 것을 설명할 수 없다. 하지만 개신교가 한국인들에게 열정적으로 수용될 수 있었던 문화적 배경으로서 무속의 영향을 무시할 수 없다는 말이다.

‘ 재앙초복’이라는 무속의 기복적 성향은 모든 종교, 특히 민간신앙에서 발견되는 보편적 종교현상이다. 즉, 이런 성향은 무속만의 고유현상이 아니라, 모든 종교에서 발견되는 보편적 특징이며, 긍정적 요소와 부정적 요소를 동시에 지닌다. 따라서 이것을 무속의 가치중립적 측면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어떤 이들은 기복신앙을 무속의 전유물로 간주하지만, 이것은 세계의 모든 종교에서 공통적으로 나타나는 보편적 현상이며, 어쩌면 인간을 종교적 존재로 만드는 가장 근원적인 욕구인지 모른다. 제정신이 아니고서야, 복을 혐오하고 재앙을 사랑하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불가항력적인 상황 앞에서, 무능한 인간이 초자연적 존재에게 복을 구하고 악을 제거해 달라고 요청하는 과정에서 종교가 발생했고, 지금도 이것이 종교가 존재하는 가장 현실적인 이유이기 때문이다. 구원과 천국이 종교의 궁극적 목적이라고 할 때, 재앙초복은 그런 목적의 원초적 표현에 불과하다. 동시에, 종교가 기복에 과도히 집착하거나, 그 이상의 고유한 것을 추구하지 못할 때, 미신이나 사교로 전락할 위험은 늘 존재한다. 한국에서 은사주의, 교회성장학, 번영신학이 크게 유행하는 것의 배경에는 이런 무속적 요소가 다양한 차원에서 영향을 끼쳤음에 틀림없다.

무속은 도덕적·사회적 측면에서 치명적 약점이 있다. 물론, 무속에 도덕이 완전히 부재하다는 말이 아니며, 모든 무당이 사악하다는 뜻도 아니다. 대동제·대동굿처럼 공동체를 위한 공익적 측면도 무속 안에 발견되고, 개인적 아픔을 위로하고 문제를 해결해 주는 민중종교로서의 강점도 지닌다. 하지만 무속은 ‘단골’의 사적 문제를 해결하는데 사역의 방향이 집중되어 있다. 개인의 무병장수와 만사형통을 위해, 점, 부적, 굿을 행하는 것이다. 지극히 이기적인 욕구 앞에서, 타자에 대한 배려, 사회적 가치, 공공선이라는 보편적 대의가 설 자리는 거의 없다. 특히, 이런 무속의 개인주의적·물질주의적 특성이 자본주의의 이기적 욕망과 합성될 때, 그것이 가져오는 부정적 영향은 거의 재앙적 수준이다. 한국 개신교가 “모이자, 돈내자, 집짓자”란 구호에 열광했던 것은 무속의 부정적 영향과 관계가 있음에 틀림없다.

결국, 영적 세계에 대한 강한 신앙, 그리고 타자와 공공성을 배제한 개인적 복에 대한 집착이 한국개신교에 끼친 무속의 이중적 영향이라고 볼 수 있다. 그 영향의 가치와 효과에 대해서는 찬반양론이 공존하지만, 그 영향의 존재 자체는 결코 부정할 수 없을 것이다. 대다수의 개신교인들은 자신의 신앙과 무속의 관련성을 강하게 부정하고 심지어 혐오하지만, 그런 부정과 혐오에도 불구하고 이것은 엄연한 사실이다. 한국개신교의 급성장과 더 빠른 추락 모두에 무속의 영향이 지대했다는 것이 내 판단이다.

3. 복음주의와 한국교회

현재, 한국교회의 절대다수를 장로교회가 차지하고 있기 때문에, 많은 이들은 한국교회 신학과 신앙에 개혁주의가 절대적인 영향을 끼쳤다고 생각한다. 이것은 어느 정도 사실이지만, 역사적 현실과는 어느 정도 차이가 있다. 물론, 한국에 처음 복음을 전한 개신교 선교사들 중에 장로교인들이 압도적으로 많았고, 그들의 선교활동이 가장 큰 성공을 거두었다. 하지만, 초기에 한국에서 활동했던 선교사 중 상당수가 교파를 초월해서, 당시 미국에서 유행하던 성결운동(개혁주의적 케직운동과 웨슬리안 성결운동)의 영향을 깊이 받았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한다.

19세기 말, 미국에서는 일종의 세기말적 현상의 하나로서 선교운동이 크게 일어났다. 주님의 재림이 임박했다는 강력한 종말론을 배경으로, 이 세대 내에 세계를 복음화하겠다는 당찬 비전이 많은 젊은이들의 가슴을 뒤흔들었다. 이런 열광적 분위기를 주도했던 대표적 인물이 D. L. 무디였고, 그의 배후에는 성결운동이 있었다. 성결운동은 신학적 배경에 따라, 개혁주의 진영에서 발생한 케직사경회와 감리교적 배경을 지닌 웨슬리안 성결운동으로 양분할 수 있다. 하지만 그런 교파적 배경의 차이에도 불구하고, 양 진영 모두 중생 이후의 성령세례, 도덕적 변화와 성결한 삶을 강조했고, 성서무오설과 세대주의적 전천년설을 신봉했으며 전도와 선교활동에 헌신했다. 당시에 영국과 미국에서 선교운동에 헌신했던 수많은 젊은이들이 이런 성결운동의 세례를 깊이 받았다.

우리나라에 최초로 개신교적 복음을 전해주었던 언더우드와 아펜젤러 모두 성결운동의 영향을 깊이 받았던 인물들이며, 이들의 영향 하에 한국교회가 성령체험, 성경, 복음전도, 묵시적 종말론 등을 중시하는 복음주의적 전통을 발전시킬 수 있었다. 1907년 평양대부흥운동은 평양도사경회 기간 중 발생했고, 이 운동을 주도했던 길선주 목사는 묵시적 종말론의 대가였다. 또한 이 운동을 통해 성령체험과 개인적 회개가 수없이 일어났고, 많은 성도들이 전도에 헌신했다. 이런 역사적 사실을 통해, 우리는 한국교회의 초기부흥운동과 성결운동 간의 긴밀한 관계를 확인할 수 있다.

이 부분을 좀 더 상세히 살펴보자. 먼저, 한국교회는 성경을 하나님 말씀으로 존중하게 되었다. 자유주의의 도래에 위기의식을 느꼈던 선교사들은 성경에 대한 소박한 믿음을 강조했고, 한국인들에게 성경을 전해주기 위해 최선을 다했다. 선교사들이 입국하기 전, 만주와 일본에서 한글성경이 먼저 번역·출판되었고, 이 성경은 한국인 매서인들에 의해 전국 방방곡곡으로 빠르게 보급되었다. 또한 합법적 입국 이후, 선교사들이 성경번역에 힘을 기울였던 것에서 초기한국교회와 성경 간의 긴밀한 관계를 확인할 수 있다. 뿐만 아니라, 선교사들은 각종 예배와 사경회를 통해 성경을 가르쳤고, 신학교육도 담당한 기관들 명칭이 성경반 혹은 성서학원이었던 것에서 확인할 수 있듯이 성경중심으로 구성되었고, 성경에 대한 비판적 분석보다 문자적 해석과 실용적 적용에 강조점을 두고 진행되었다. 이런 교육과 강조 덕택에, 한국교회는 성경읽기와 성경암송을 중시하게 되었고, 성경에 대한 절대적 존중과 신앙을 내재화할 수 있었다.

둘째, 한국교회는 성령에 대해 열린 마음을 갖게 되었다. 1930년대 이후, 근본주의신학의 본격적 유입으로 신학자와 목회자들이 성령에 대해 보다 소극적인 태도를 갖게 되었지만, 이런 현상과 별도로, 평양대부흥 이후 한국교회의 영적 특징은 부흥사와 부흥회를 중심으로 형성되었다. 교리적 측면에서 은사중지론이 유포되었지만, 성도들은 그런 교리와 상관없이 부흥사들의 영향을 깊이 받으며, 다양한 영적 은사를 갈망하고 체험했다. 그래서 한국교회가 “간판은 장로교, 내용은 오순절”이라는 흥미로운 현상이 나타난 것이다. 초창기 한국교회의 부흥운동을 장로교, 감리교, 성결교 목사들이 함께 이끌었다는 사실, 교파를 초월해 새벽예배, 부흥회, 수련회 등을 중시했다는 사실 등이 이런 현상의 단적 증거다.

셋째, 한국교회는 성결한 삶을 추구하게 되었다. 물론, 각 교파의 고유한 신학적 강조점 때문에 성화 혹은 성결에 대한 해석의 차이가 존재하고, 믿음과 행위의 관계에 대한 오해가 신자의 윤리적 책임에 부정적 영향을 끼치기도 했다. 그럼에도, 개혁주의와 웨슬리안의 구별 없이, 한국교회는 신자들이 중생 이후 성결한 삶을 추구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부흥사들은 중생의 체험과 회개를 동반한 삶의 변화를 강조했고, 목회자들은 성도들이 주님과의 인격적 관계를 유지하며 성결한 삶을 살아야 한다고 끊임없이 설교했다. 성결에 대한 강조가 사회개혁과 타자에 대한 보편적 사랑으로 확장되지 못한 한계를 보였지만, 최소한 비신자와 구별되는 삶을 살아야 한다는 인식만은 한국교회 내에 보편적으로 뿌리를 내렸다.

끝으로, 한국교회는 종말에 대한 깊은 관심을 갖게 되었다. 일차적으로, 이 땅에 복음이 전래되던 때에 민족의 운명이 풍전등화 같았고 이후 혼돈과 파국의 나락으로 추락했기 때문에, 묵시적 종말론이 쉽게 대중화될 수 있는 시대적 정황이 형성되었다. 한편, 케직사경회 영향을 깊이 받은 선교사들에 의해 세대주의적 전천년설로 대표되는 묵시적 종말론이 한국교회에 소개되고 길선주의 부흥회를 통해 전국적으로 빠르게 확산되었다. 이런 종말론은 당시의 시대적 정황에 힘입어 폭발적인 반응을 일으켰으며, 이후 한국교회의 지배적 종말론으로 뿌리내렸다. 1994년에 다미선교회가 교회뿐만 아니라 한국사회 전체를 뒤흔들 수 있었던 것, 지금도 여전히 종말론 관련 신흥종교들이 번성하는 이유도 여기에서 찾을 수 있을 것이다.

4.자본주의와 한국교회

해방과 함께 한국교회 안에 새로운 영적 흐름이 유입되기 시작했다. 이것은 한국사회가 분단과 전쟁, 그리고 군부독재의 과정을 거치며 냉전체제에 편입된 결과로 형성된 소위 ‘자본주의적 영성’이다. 적어도 이 시기에 한반도가 냉전체제에 편입되면서, 한국사회 내에 반공과 친미라는 새로운 이념이 봉건과 친일의 과거를 대체하기 시작했다. 이 험한 시절을 통과하면서, 한국교회뿐만 아니라 한국사회 전체가 미국에 절대적으로 의존할 수밖에 없었고, 미국의 군사적·경제적 원조 덕택에 한국사회는 분단과 전쟁의 위기에서 생존할 수 있었다. 이 과정에서, 북에서 내려온 개신교인들을 중심으로 남한교회가 재편되었다. 이들은 공산당 때문에 교회와 고향, 신앙과 재산을 상실했던 뼈아픈 경험을 기억하고 있었다. 신학적 차원에서도 합의점을 찾기 어려웠던 공산주의는, ‘이런 역사적 상처를 통해,’ 그들에게 같은 하늘 아래 공존할 수 없는 악의 실체로 정죄되었다. 동시에, 분단시대에 북한출신이라는 주홍글씨는 이들을 더욱 철저한 반공친미의 기수로 만들었다. 이런 이유로, 이들은 사회주의·공산주의를 악마적 이념으로 부정했고, 미국을 통해 전수되는 자유민주주의와 자본주의를 열정적으로 지지·수용했다.

이런 현상은 박정희 정권을 통과하면서 더욱 견고해졌다. 박정희는 정권을 장악한 이후, 적극적으로 근대화정책을 추진했다. “잘 살아보세”는 국가적 구호가 되었고, “근면, 자조, 협동”은 시대정신이 되었다. 국가적 차원에서 진행된 산업화로 농촌사회는 급속도로 붕괴되고, 도시화 현상이 빠르게 진행되었다. 할리우드를 중심으로 한 미국문화가 한국의 대중문화를 장악했고, 영어열풍과 미국유학이 붐을 이루었다. 그렇게 한국사회는 미국화 되어갔다. 한국인들에게 미국은 우방이요 구원자로 인식되었고, 따르고 배워야 할 표준과 목표가 되었다. 이런 상황에서 한국교회도 철저하게 미국교회에 종속되었다. 미국교회의 선교적·경제적 지원이 지속되었을 뿐만 아니라, 빌리 그레이엄(Billy Graham)으로 대표되는 미국부흥사들이 한국에서 대규모 전도집회를 연속적으로 개최했다. 우수한 학생들은 앞 다투어 미국유학을 떠났고, 미국신학과 교회를 한국에 빠르게 소개했다. 그런 과정에서 미국교회와 신학은 ‘신식’과 ‘첨단’으로 인식되면서, 거의 무비판적으로 흠모·수용되었다. 동시에, 미국교회와 미국문화가 동일시되면서, 미국식 기독교는 물질적 번영의 가장 확실한 보증수표로 선전되었다. 미국이 경제적 대국이 된 근본적 이유가 기독교를 신앙했기 때문이며, 우리도 미국처럼 잘 살고 싶으면 미국식 기독교를 수용해야 한다는 논리가 설득력 있게 선포되었다. 이것은 신학교와 교회에서 한국인과 미국인에 의해 의심 없이 선포된 “복음”이었다.
한국 사회에 경제성장의 가시적 결과들이 나타나면서, 한국교회에 소위 ‘자본주의적 영성’이 급속히 확장되기 시작했다. 이 영성을 주도한 신학적 흐름은 ‘교회성장학’ ‘적극적 사고방식’ 그리고 ‘번영신학’ 등이다. 물론, 이런 신학들에 기초한 자본주의적 영성이 한국교회에 끼친 긍정적 영향도 있다. 무엇보다 가난을 극복하는 것이 시대의 과제가 되던 때에, 이런 영성은 교회 안팎에서 신자들에게 희망과 용기를 불어넣어 주었다. 가난, 질병, 전쟁에 시달리며 운명론과 패배의식이 만연했던 이 나라에서, 그래서 묵시적 종말론에 철저히 경도되었던 이 땅의 교회에, 처음으로 이 땅의 삶에 희망과 의미를 부여했는지 모른다. 특히, 국가 주도하에 추진된 경제개발정책이 가시적 성과를 거둘 때, 이런 영성은 그런 성장의 내적 동력으로서 탁월한 능력을 발휘했다. 그 결과, 개인적 삶의 질이 향상되고 사회적 신분이 향상되었으며, 현실과 대면할 수 있는 자신감도 부여했다. 이것은 바로 교회성장에 결정적·직접적 영향을 끼쳤다. 신자들이 삶의 열정을 회복하고 미래에 대한 낙관적 전망을 소유하며 경제적 능력을 획득했을 때, 그런 발전의 일차적 수혜자가 교회였기 때문이다. 바로 이 시기에, 한국교회의 양적 성장이 절정에 달했고, 강남을 중심으로 대형교회들이 출현하기 시작했다. 정말, 한국교회가 경이적인 성장을 이룬 것이다.

하지만 이런 성장과 번영은 부정적 유산을 한국교회에 안겨주고 말았다. 이런 과정에서, 적극적 사고방식과 교회성장학이 “성장의 첨단적 비법”으로 한국교회 내에 유포되기 시작했다. 교회강단들을 통해 “교회성장학”이 목회의 교본으로 채택되고, “번영신학”이 시대적 메시지로 강력히 설파되었다. 그 결과, 한국교회 내에 물질적 번영이 축복으로 정당화되고 열정적으로 추구된 반면, “하나님과 물질을 겸하여 섬길 수 없다”는 성경의 진리는 외면당했다. 동시에, 교회가 성장과 전도에 몰두하면서 교회건축과 교세확장을 위해 전력을 다했으나, 시대의 아픔에는 충분한 관심을 기울이지 못했다. 발전하던 자본주의체제와 정부정책이 많은 모순과 오류를 야기했음에도, 현 체제에 대해 맹목적 지지를 보내면서 체제의 희생자들의 불행과 고통에는 눈을 감았다. 그 결과, 교회는 경이적인 속도로 양적·외적 성장을 이루었지만, 민족의 시대적 고통에 동참하지 못함으로써, 사회적 영향력과 명성은 실추·축소될 수밖에 없었다.

5. 산업화의 그늘과 한국교회

1970년에 들어서, 한국교회는 보수진영과 진보진영으로 양분되기 시작했다. 이전에도 신학적 입장의 차이 때문에 보수와 진보 간에 갈등이 존재했고, 이것이 교단분열의 직접적 원인이 되기도 했지만, 민족과 정치 문제에 있어서 진보와 보수 간에는 근본적 차이가 없었다. 그러나 박정희 정권이 집권연장을 목표로 삼선개헌(1969)을 시도하면서 진보와 보수 간에 입장이 확연히 갈라지기 시작했고, 이후 전혀 다른 길을 걷게 되었다. 진보진영은 독재정권에 저항하면서 탄압과 박해의 수난시대를 맞이한 반면, 보수진영은 국가정책에 적극 호응·협조함으로써 국가의 적극적 후원과 혜택 하에 최대의 번영기를 맞이했기 때문이다.

이 시기에 진보진영은 민중신학을 중심으로 자신의 신학적 정체성을 재구성했다. 이것은 당시 라틴아메리카에서 출현한 해방신학의 한국적 버전이었다. 1960년대에 세계는 그야말로 해방과 혁명의 시대를 맞이하고 있었다. 과거 제국주의의 희생양이었던 수많은 약소민족들이 정치적 독립을 쟁취했고, 전통사회에서 억눌렸던 다양한 영역의 사회적 약자들(특히, 소수인종과 여성)이 자신들의 정치적 권리를 주장하기 시작했던 것이다. 이 시절에 한국사회는 철권통치를 자행하던 군사정권 밑에서, 특히 이 정권이 ‘군대식으로’ 밀어붙이던 산업화의 병폐 속에서, 인권이 유린되고 민주주의가 후퇴하며 독재와 분단이 정당화되는 정치적 암흑기를 통과하고 있었다. 이런 상황에서, 소수의 진보적 기독교인들이 시대적 아픔과 구조적 문제 앞에서 무책임했던 자신들의 무지, 무관심, 무책임, 그리고 비겁함을 통렬히 자각하고, 예수의 정신에 입각하여 군사정권에 도전하기 시작했다. 이들의 현장체험과 신학적 반성의 결과물로 출현한 것이 ‘민중신학’과 ‘민중교회’였다.

이런 반성과 실천을 통해, 한국교회는 ‘민중’이라는 사회적 약자에 주목하기 시작했다. 물론, 한국교회에서 민중에 대한 관심과 이해가 완전히 부재했던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한국사회가 근대화를 통과하는 과정에서, 교회가 가장 주목해야 할 “우리의 이웃”이 누구인지 제대로 인식하지 못했다. 산업화를 통해 “보릿고개에서 벗어나야 한다”는 시대적 구호 앞에서, 한국교회는 소외되고 착취당하는 약자들의 눈물과 한숨에 적절히 반응하지 못했던 것이다. 하지만 전태일의 분신(1970년 11월 13일)을 계기로, 상아탑에 갇혀 있던 일부 신학자들이 현실을 직시하기 시작했고, 그들의 존재와 가치를 신학적으로 재해석하기 시작했다. 이렇게 가려진 현실, 버림받은 이웃을 새롭게 발견한 열혈청년들이 보장된 자리와 안락한 삶을 포기하고 이웃들의 곁으로 달려갔다. 그렇게 민중은 신학의 주제로, 목회의 주체와 대상으로 부상하기 시작했다. 이런 현상에 대한 기득권세력의 비판과 억압은 무자비할 정도로 잔혹했지만, 무시하고 외면했던 가엾은 이웃을 발견한 한국교회는 더 이상 무심한 제사장과 레위인의 자리에 머물 수 없었다. 그렇게 한국교회가 어색하지만 선한 사마리아인의 자리로 이동하기 시작했다.

둘째, 한국교회가 사회문제를 신학의 주제로 수용하기 시작했다. 사실, 한국교회는 민족이 외세의 침탈에 힘없이 무너지던 시절, 가장 강력한 저항세력으로 기능했던 역사를 갖고 있다. 독립협회, YMCA, 신민회, 3.1운동 등을 통해, 한국교회는 국권회복을 위해 투쟁했다. 골리앗 같은 일제의 거대한 폭력 앞에 다윗 같은 믿음과 용기로 한국교회가 분연히 저항했던 것이다. 하지만 해방과 건국과정에서, 한국교회는 친기독교적인 군정과 제1공화국의 특혜 속에서 사회적 비판기능을 상실하고 정교유착이란 오욕의 길을 걷기 시작했다. 시대적 한계를 충분히 인정함에도 불구하고, 그 유착의 농도와 행태가 지나쳤다. 교회의 예언자적 기능은 상실되고 체제옹호세력으로 보수화되었다. 교회는 기만적 형태의 ‘종교분리’를 내세우며 극우세력의 대변자가 되었고, 신학은 역사변혁의 기운을 상실한 채 영지주의적 관념론으로 퇴행했다. 하지만 이때 등장한 민중신학은 정교함과 완성도 면에서 많은 과제를 안고 있었지만, 적어도 내부의 비판과 외부의 탄압 속에서 정치사회문제를 신학 안으로 수용했다. 이로써, 보수신학의 관념론적 한계를 일정부분 극복하고, 신학의 시대적 책임과 실천적 가능성을 웅변적으로 제시할 수 있었다. 규모와 세력은 미약했지만, 그것이 역사에 남긴 흔적은 감동적이다.

6. 성령운동과 한국교회

한국교회에 오순절운동이 시작된 것은 1920년대 후반이다. 감리교의 이용도 목사가 인도했던 집회에서 성령의 다양한 은사들이 강렬하게 나타났다. 거의 같은 시기에 미국 아주사부흥운동의 영향을 받은 평신도 여선교사 메리 럼지(Mary Rumsey)가 한국에 들어와서 한국최초의 오순절교회를 서울에 세웠다. 비록 이용도 목사가 젊은 나이에 세상을 떠났고 럼지의 사역이 큰 반향을 불러오진 않았지만, 이 시기를 통해 한국교회에 전통적인 부흥운동과 구별되는 은사중심의 성령운동이 출현했음은 사실이다.
한국교회에 오순절운동이 활성화된 계기는 6.25전쟁이었다. 전쟁으로 육체와 정신이 피폐해진 이 땅에 신유와 방언 같은 은사들을 강조하는 집회들이 사람들에게 큰 호소력을 지니기 시작한 것이다. 용문산기도원의 나운몽 장로, 장로교의 박태선 장로, 성결교의 양도천 목사 등이 이 시기의 성령운동을 주도했으며, 1960년대부터 순복음교회 조용기 목사가 혜성처럼 등장하여 오순절적 부흥운동의 중심인물로 활약했다. 이때부터 부흥회, 금요철야기도회, 기도원 등을 중심으로, 소위 은사집회가 성황을 이루게 되었고, 한국교회 내에, (교단의 구분 없이) 방언과 신유 같은 신비현상들이 유행하기 시작했다. 최근에는 신사도운동을 통해 새로운 형태의 성령운동이 한국교회에 큰 영향을 끼치고 있다.

오순절운동은 개혁주의가 지배적인 한국교회 내에서 오랫동안 뜨거운 감자였다. 은사중지론을 신봉하는 장로교의 관점에서, 순복음교회를 중심으로 진행된 오순절운동은 신학적으로 동의할 수 없는 무속적 신비주의에 불과했고, 목회적으로도 권면할 수 없는 극단적 열광주의로 보였을 뿐이다, 장로교 통합측에 의해 여의도순복음교회가 10년 이상 이단논쟁에 시달린 것이 단적인 증거다. 물론, 그런 비판과 우려는 상당부분 설득력과 타당성이 있다. 순복음교회 신자들 스스로 “우리들은 말씀에 약하다”라고 고백하는 모습에서 문제의 핵심을 포착할 수 있다. 본래, 오순절신학은 복음증거를 위한 권능으로서 성령세례를 추구하고 그 체험의 물리적 증거로서 방언을 이해하지만, 그동안 한국의 오순절운동은 방언 자체에 과도한 의미를 부여하고 집착했던 것이 사실이다. 말씀보다 체험, 성결보다 능력, 고난보다 영광에 몰두했던 것은 항상 왜곡과 일탈의 위험을 안고 있다.

하지만 오순절운동이 한국교회에 남긴 긍정적 공헌도 결코 무시할 수 없다. 무엇보다. 오순절운동은 하나님의 초자연적 역사가 초대교회에 한정되었던 예외적 현상이 아니라, 현재에도 진행 중임을 가장 극적인 방식으로 성도들에게 입증해 주었다. 기사와 이적은 초대교회에 한정된 것이라는 주장과 오순절운동이 말씀보다 체험에 치중한다는 비판이 계속 이어졌지만, 오순절운동에 참여했던 사람들은 성령에 기록된 은사들을 직접 체험함으로써, 전혀 다른 차원의 신앙생활에 입문하게 되었다. 그들에게 하나님은 성경 속에 기록된 문자적 신이나 초대교회에 한정된 과거의 신이 아니었다. 하나님은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토록 동일하시며, 지금도 기사와 이적을 행하시는 권능의 주님이신 것이다. 그들은 이런 사실을 설명을 통해 이해한 것이 아니라, 체험을 통해 확신하게 되었다.

또한 오순절운동은 한국교회에 영적 동력을 회복함으로써, 부흥과 성장을 가져왔다. 개혁주의 전통이 건전한 교리, 인격적 성숙, 그리고 균형 잡힌 목회라는 귀중한 선물을 한국교회에 전해주었지만, 체험적 신앙과 신앙적 열정 면에서는 분명히 약점이 있었다. 반면, 순복음교회로 대표되는 오순절 그룹에는 성령체험을 통해 극적으로 변화된 사람들의 감동적 간증들이 가득하다. 방언, 신유, 축귀, 예언 등은 일반적인 현상이자 일상적 경험이 되었고, 그렇게 성령을 체험한 신자들은 열정적인 전도자들로 변모하여 교회성장을 견인했다. 한국교회의 양적·질적 성장이 정체된 현재, 신사도운동이 비판과 논쟁 속에도 확산되는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다. 이성과 합리성에 의해 종교적 열정이 폄하되는 현실에서, “예수천당 불신지옥”의 구호를 당당히 선포하는 일은 술에 취하거나 성령에 취하지 않고는 불가능할 것이다. 그렇다고 술에 취할 수는 없지 않은가!

7. 영적 위기와 한국교회

1990년대부터 한국교회 내에 중요한 변화가 포착되기 시작했다. 그동안 보수적 개신교인들에 의해 정통 기독교로 인정받지 못했던 천주교의 영성신학 저서들, 특히 토마스 머튼(Thomas Merton)과 헨리 나우웬(Henri Nouwen)의 저서들이 개신교인들 사이에서 널리 읽히면서, “영성(Spirituality)”이란 말이 유행하기 시작한 것이다. 그들의 책을 복음주의 출판사들이 앞 다투어 번역·출판하기 시작했고, 리처드 포스터(Richard Foster)와 유진 피터슨(Eugene Peterson) 같은 개신교 영성작가들도 한국에서 많은 독자들을 확보하기 시작했으며, 이동원, 방성규, 김영봉, 최일도 같은 개신교 목사들도 교파를 넘어 영성신학에 지대한 관심을 보이게 되었다. 순식간에 영성은 개신교의 화두로 부상했고, 수많은 영성프로그램 및 단체들이 우후죽순 생겨났다. 하지만 이렇게 급부상한 영성운동들은 대체로 중세수도원운동의 복고적 성격이 강하다. 아직까지도 개신교 자신만의 고유한 영성신학·운동을 형성하지 못한 채, 천주교의 것을 소개·모방하는 단계에 머물고 있는 것 같다.

영성운동이 처음 출현했을 때, 개신교의 일차적 반응은 대단히 부정적이었고, 최근에도 보수교단의 입장은 크게 바뀌지 않았다. 하지만 부정적 인식과 비판 속에도, 영성신학 혹은 영성훈련은 개신교 내에 빠르게 확산되고 있다. 이제는 영성이 대세다. 그렇다면 왜 이 시기에 일군의 개신교인들이 천주교적 영성에 관심을 기울이게 되었을까? 그것은 복음주의적 영성, 보다 구체적으로 자본주의적·오순절적 영성에 대한 심각한 자기반성의 결과로 보인다. 지난 100년간 한국교회의 영성은 부흥운동의 지배적 영향 하에 있었다. 하지만 이 영성이 산업화 과정에서 자본주의적 영성과 오순절적 영성으로 분화·진화되기 시작했다. 육체적 체험과 물질적 번영이 개신교 신앙의 궁극적 목적으로 부상하면서, 양적 성장에는 긍정적 영향을 끼쳤지만, 영적 깊이는 간과되고 말았다. 종교학자 오강남의 표현을 빌리면, 한국교회는 “심층적 종교”에 이르지 못한 채, “표층적 종교”에 머무는 결과를 초래한 것이다.

주여 삼창, 통성기도, 방언기도로 상징되는 기도생활은 신자들에게 영적 카타르시스를 제공했지만,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하나님의 뜻을 분별하는 경지에는 이르지 못했다. 성경을 다독하고 암송하고 공부하는데 힘을 기울였지만, 정작 성경의 깊은 뜻을 터득하고 삶 속에 구체적으로 실천하는 단계에는 충분히 도달하지 못했다. 성도들에게 믿음의 중요성을 각인하는데 성공했지만, 믿음과 선행의 필연적 관계를 온전히 이해하고 실천하는데 실패했다. 예배와 전도의 중요성을 강조했지만, 예배 속에서 하나님의 임재를 깊이 체험하고 복음의 능력으로 개인과 사회의 구원을 함께 추구하는 경지까지 이르지 못했다. 양적 성장과 경제적 풍요 속에 교회의 외양은 세련되고 거대해 졌지만, 성도들의 영혼과 내적 차원은 공허하고 건조해졌다. 결국, 한국교회의 영성이 크기와 속도에서 장점을 갖고 있었지만, 깊이와 방향 면에서는 한계를 드러낸 것이다. 이 부분을 심각하게 고민했던 사람들이 천주교의 수도원적 영성에서 대안을 기대하며 주목하기 시작한 것으로 보인다.

이런 종류의 영성이 한국개신교에 끼친 영향을 세 가지로 정리할 수 있다. 첫째, 탄원이 지배하던 기도 문화에 침묵 속에 경청하는 기도방식이 소개되었다. 그동안 한국교회는 신자가 자신의 뜻을 성취하는 영적 통로로 기도를 가르쳐왔다. “열릴 때까지 두드리라”는 구호가 이런 문화를 대변했던 것이다. 기도에 사귐과 대화의 차원이 있다는 것을 모르지 않았지만, 탄식과 탄원이 한국형 기도의 지배적 패턴이었다. 하지만 김영봉의 『사귐의 기도』, 배덕만의 『FM기도』, 리차드 포스터의 『묵상기도』 등은 기도의 근본이 하나님과 신자 간의 인격적 사귐이고, 기도의 핵심은 하나님의 뜻에 대한 복종이며, 기도의 형식은 하나님 앞에서 통곡하며 요구사항을 열거하는 대신 침묵하며 경청하는 것임을 일깨워주었다. 이처럼, 수도원적 영성은 개신교의 기도 문화에 혁명적 변화를 일으키고 있다.

둘째, 개신교인들과 성경의 관계가 “읽는 것”에서 “묵상하는 것”으로 발전하기 시작했다. 물론, 개신교에도 1980년대 이후 QT문화가 유행하면서, 단순히 성경을 읽는 단계에서 묵상하는 단계로 발전해왔다. 하지만 리처드 포스터의 영향 하에 ‘lectio divina’가 소개되면서 묵상의 수준이 현저하게 상승한 것이다. 그동안 한국교회는 성경을 중시했다. 그래서 통독과 다독이 은총의 수단과 신자의 책임으로 강조된 것이다. 물론, 다독과 통독이 성경에 대한 단순지식을 향상시키는데 일정부분 기여했지만, 신자의 영성과 삶에 변화를 유도하는 데는 한계가 자명했다. 또한 한국교회는 성경공부에 힘쓰고 설교중심의 예배를 강조했다. 이를 통해 한국교회가 말씀을 사랑하고 존중하는 전통을 형성할 수 있었다. 하지만 그렇게 듣고 학습한 성경이 신자들을 깊은 은혜와 신비의 단계로 인도하지는 못했다. 이런 상황에서, 성경이 단지 암송, 독서, 학습의 대상이 아니라, 묵상과 사귐의 대상임을 일깨우고 인도하는 방법이 소개되면서, 성도들의 영성생활에 엄청난 영향을 끼치게 되었다. 양과 길이의 관점에서 성경을 접근하던 태도에서, 질과 깊이를 추구하는 관점으로 변화가 시작된 것이다.

셋째, 개신교인들이 간과했던 성찬식의 가치를 회복시켜 주었다. 종교개혁의 중요한 결과 중 하나는 설교가 성찬식을 밀어내고 예배의 중심을 장악한 것이다. 말씀에 대한 배타적 강조가 예배에서 설교의 중요성을 과도하게 강조하는 방향으로 이어졌다. 그 결과, 성찬식이 중요성을 상실하고 말았다. 물론, 성찬식의 신학적 가치를 완전히 부정하거나 예배에서 제거한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천주교에 비해, 개신교 내에서 성찬식의 위치가 대단히 초라했던 것은 사실이다. 이런 상황에서 가톨릭 영성신학의 영향으로 개신교회가 성찬식의 가치를 새롭게 인식하기 시작했고, 예배 안에 잃었던 자리를 서서히 회복하기 시작했다. 점점 더 많은 교회가 성찬식을 더 자주 시행하고 있으며, 성찬식의 신학적 의미를 더욱 진지하게 탐구하고 있다. 소극적으로 성찬식에 접근했던 개신교가 은총의 수단으로서 성찬식의 의미를 새롭게 인식하면서 영성생활의 중요한 통로로 수용·실천되고 있는 것이다. 덕택에, 개신교 영성생활이 더욱 풍요로워지고 있다.

8. 한국교회의 변화된 위상과 책임

2000년대에 들어와, 개신교 내에서 중요한 변화가 감지되기 시작했다. 소위 ‘총체적 복음’을 추구하는 다양한 저서들이 한국에 소개되기 시작한 것이다. ‘복음주의 좌파’ 혹은 ‘급진적 복음주의’로 명명되는 일군의 목회자·신학자들의 저서들이 국내에서 연속적으로 번역·출판된 것이다. 이들은 복음주의 전통에서 성장하고 사역하지만 개인전도와 함께 사회참여를 강조한다. 교회의 사회적 책임과 정치활동을 강조하지만 기존의 복음주의자들과 달리 진보적 성향을 지니고 있다. 낙태와 동성애 등을 반대하지만, 빈곤, 환경, 전쟁, 인종, 성 등에 대해서도 진보적 입장을 견지한다. 성경과 오순절영성을 중시하면서, 동시에 고대의 영성도 함께 추구한다. 복음주의 전통을 존중하지만, 동시에 진보진영 및 타종교와도 우호적 관계를 도모한다. 론 사이더(Ron Sider), 짐 월리스(Jim Wallis), 토니 캄폴로(Tony Campolo), 쉐인 클레어본(Shane Claiborne), 그리고 존 하워드 요더(John Howard Yoder) 등이 핵심인물로 부상했고, 이들은 재세례파운동, 이머징교회(Emerging Church), 레드레터 크리스천(Red Letter Christians) 운동과 긴밀한 관계를 맺고 있다.

이들이 2000년대에 한국교회의 특별한 관심을 갖게 된 이유는 무엇일까? 최소한 두 가지 이유를 거론할 수 있을 것이다. 하나는 정치적 민주화가 일정수준 이루어지면서, 이들의 목소리가 수용될 수 있는 정치적·신학적 공간이 형성된 것이다. 즉, 박정희 정권으로 대표되는 군부독재시절에는 이런 진보적 목소리가 한국교회, 특히 복음주의 진영에서 수용될 수 있는 여유가 없었다. 민중신학을 주창했던 개신교 진보진영의 수난을 통해, 그런 현실을 더듬어 볼 수 있다. 물론, 지금도 이념적 갈등이 뿌리 깊게 존재하고 ‘종북좌파’ 논리가 여론형성에 지대한 영향을 끼치고 있지만, 이전에 비해, 이런 진보적 담론이 형성·논의될 수 있을 정도로 한국사회와 교회가 성장했다고 볼 수 있다.

또 하나는 한국교회가 한국사회의 정치적 경제적 문화적 주류에 진입한 것이다. 지난 120년간 한국교회는 생존과 성장에 온 힘을 쏟아왔다. 전통종교의 영향력이 지배적인 상황에서 개신교에게 생존 자체가 힘겨웠다. 따라서 타자를 여유롭게 바라보고 돌볼 수 있는 여유가 없었던 것이다. 하지만 1990년대에 성장이 정점에 달하면서 마침내 주류종교로 등극한 상황에서, 한국교회가 담당해야 할 책임이 크게 확장되었다. 즉, 교회가 생존과 성장을 위해 분투하던 단계에서, 사회적 책임을 감당해야 하는 단계로 상승한 것이다. 하지만 이런 상황에서 한국교회에는 참고할만한 전거가 없었다. 자연스럽게 미국의 선례들을 참고할 수밖에 없었고, 그것들이 소개될 때마다 열정적으로 반응하며 수용했던 것이다.

그렇다면 이들이 한국교회에 끼친 영향은 무엇일까? 먼저, 복음주의 교회가 진보적 관점에서 사회적 책임을 깊이 인식하도록 자극을 주었다. 찰스 피니(Charles G. Finney)와 윌리엄 윌버포스(William Wilberforce) 같은 인물들이 역사적 모범으로 조명되기 시작했고, 론 사이더와 짐 월리스의 영향 하에 빈곤문제, 존 하워드 요더 덕택에 평화문제에 깊은 관심을 갖기 시작했다. 그 결과, 현재에는 복음과 상황, 뉴스앤조이, 성서한국, 교회개혁실천연대, 청어람, 기독연구원 느헤미야 같은 진보적 복음주의 진영에서 교회와 사회를 향해 예언자적 목소리를 발언하며 적극적 참여를 추구하고 있다. 이 대목에서, 총체적 복음의 결정적 영향을 감지할 수 있다.

뿐만 아니라, 그들의 영향 하에 복음주의 교회가 보다 통전적인 복음을 추구하기 시작했다. 그동안 복음주의는 종교개혁에 대한 제한적 이해, 특히 근본주의의 깊은 영향 하에, 대단히 편향적인 모습을 고수해왔다. 즉, 자유주의, 가톨릭, 타종교와는 양립할 수 없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특히, 신학적 보수주의와 정치적 보수주의가 과도하게 밀착되어, 개인윤리에 비해 사회윤리에는 지나칠 정도로 무관심했다. 반공친미에 대한 맹목적 옹호는 다른 이념과 정체에 대한 사고자체를 가로막았다. 하지만 총체적 복음의 영향 하에, 복음주의 내에도 이런 이원론적 한계를 극복하려는 노력들이 시작되었다. 포스트모던시대에 다양한 형태의 다원주의에 직면하여 복음과 상황의 상관관계에 주목하고, 고전적 영성과 현대적 영성의 창조적 조화를 추구하며, 개인윤리와 사회윤리, 복음전도(영혼구원)와 정치참여(사회구원)의 적절한 균형을 모색하고 있다. 즉, 복음의 총체성을 추구하는 것이다. 아직은 도입과 검토의 단계에 머물고 있지만, 향후 한국적 상황과의 적절한 접점을 찾고 실천 가능한 방법들을 개발한다면, 한국교회와 사회에 더욱 큰 영향을 끼칠 수 있을 것이다.

9.나가는 말

이처럼 한국교회는 다양한 역사적 경험과 독특한 신앙적 대응을 통해서 다양한 영성을 형성·발전시켜왔다. 이런 영성은 각 시대의 절박한 요청에 따라 고유한 특징을 발전시키면서, 이 땅에 하나님나라를 증거하고 실현하는 도구로 기능했다. 그렇다면 한국교회 위기론이 팽배한 오늘, 이 땅에서 한국교회가 하나님나라의 도구요 현장으로서 온전히 기능하기 위해선 어떻게 해야 할까? 이제 글을 마무리하면서 몇 가지 과제를 제시하고자 한다.

무엇보다 기존에 존재했던 다양한 영성전통에 대해 비판적 분석과 진지한 반성을 시도해야 한다. 모든 영성전통은 각자의 고유한 가치와 장점을 지닌다. 동시에 각 전통의 역사적·시대적 한계도 자명하다. 어떤 전통도 영원히 완벽할 수 없으며, 동시에 어떤 전통도 완전히 시효가 만료되지 않았다. 그렇다면 이런 상황에서 우리가 할 수 있는 최선은 각 전통의 장점과 단점을 객관적으로 분석하고, 과감하게 포기할 부분과 적극적으로 수용·발전시킬 항목을 분류하는 것이다. 특히, 어떤 특정 전통에 모든 실패의 책임을 전가하거나, 혹은 특정 전통에 모든 희망을 거는 것은 부당하다. 현재 한국교회가 직면하고 있는 신학적 목회적 영성적 위기상황을 극복하기 위한 영적 지혜와 수단을 발견하기 위해, 우리는 보다 정직하고 용감하게 과거의 유산들에 접근하여, 보다 지혜롭고 민감하게 대안창출을 위해 연구와 실험을 시도해야 한다. 이런 면에서, 한국교회의 영적 전통에 대한 철저한 연구가 절실히 요청된다.

동시에, 이런 다양한 영성의 흐름과 변화된 낯선 환경, 그리고 그 사이에서 분투하는 공동체로서의 교회를 포괄적으로 고려하면서, 개별 공동체를 위한 새로운 영성의 처방전을 작성하고 실험해야 한다. 최소한 지난 영성의 흐름 속에서, 공공성과 보편성을 결핍한 무속적 영성, 물질적·세속적 번영에 집착하는 자본주의영성은 제일 먼저 경계의 목록에 올려야 한다. 돈에 대한 집착과 이기주의가 결합된 결과, 한국교회가 천민자본주의의 종교적 하수인으로 추락했기 때문이다. 동시에, 성령의 직접적 체험, 성결의 추구, 그리고 민중에 대한 관심은 이 시대에도 강력하게 붙잡아야 할 소중한 영적 유산들이다. 최근에 유행하는 총체적 영성은 그것들의 창조적 종합을 실험하는 소중한 예다. 이를 위해, 보다 용감하고 창조적인 목회적 실험이 필요하다. 목회자나 공동체의 전문성, 지역사회의 필요, 혹은 시대적·문화적 이슈 등에 따라, 다양한 영성적·공동체적 도전을 시도해야 한다. 실패를 두려워하지 말고, 동시에 만병통치약 개발에 집착하지 말고, 쉽고 가능한 것부터 과감하고 지혜롭게 시도해야 한다. 부디, 이 땅에 이 교회를 통해 하나님나라의 강력한 임재와 현현을 기대한다.

2019년 4월호 차례

HTM 대표인사

HTM 대표인사

SPECIAL

배덕만 교수 | 하나님나라와 한국교회:영성을 추구하며

MESSAGE

HTM메시지 | 인식의 변화에서 의식의 변화로
다니엘과 함께 | 가까이 있는 사람과 잘 지내자

COLUMN

부활절 특집 칼럼 | 부활절과 예수 그리스도
윤현숙 목사 칼럼 | 구약에 나타난 하나님이 말씀하시는 방법
하나님나라의 관점에서 본 기독교 핵심진리2

SCHOOL&SEMINAR

제22기 부산 KBS 스케치 | 킹덤빌더스쿨 in Busan제22기 부산 KBS 간증

KINGDOM PEOPLE

HTM과 함께하는 교회 | 수원 하늘샘교회

KINGDOM LIFE

문화 | 한국의 다니엘을 찾아서, 장기려 박사 기념관

DEVOTION

그림과 묵상 | 장광의
HTM 치유간증

태그:

댓글을 남겨주세요

이메일은 공개되지 않습니다. 필수 입력창은 * 로 표시되어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