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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안 Anxiety, 두려움 Fear

불안 Anxiety, 두려움 Fea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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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강
불안 Anxiety, 두려움 Fear

 

한양의대 교수 김석현

위키백과에서는 불안(anxiety)을 부정적인 결과가 나타날 수도 있는 위협적이고 위험한 상황에서 우리가 경험하게 되는, 불쾌하고 고통스러운 정서적 반응으로 정의한다. 불안을 느끼면 우리는 부정적 결과가 일어나지 않도록 긴장을 하고 경계를 하며 조심스러운 행동을 하게 된다. 그래서 위협적인 상황을 벗어나게 되면 안도감을 느끼고 긴장을 풀며 편안한 기분으로 되돌아가게 된다. 이처럼 위험한 상황에서 적절한 불안을 느끼는 것은 매우 자연스럽고 정상적인 것이라고 설명한다.

또한 병적인 불안(pathological anxiety)을 정상적인 불안(normal anxiety)과 구별하여 설명하는데, 현실적인 위험이 없는 상황이나 대상에 대해서 불안을 느끼는 경우, 현실적인 위험의 정도에 비해 과도하게 심한 불안을 느끼는 경우, 불안을 느끼게 한 위험 요인이 사라졌음에도 불구하고 불안이 과도하게 지속되는 경우, 이러한 불안을 병적인 불안이라고 부른다.

불안에 대해서 정신의학은 앞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정상적인 불안과 병적인 불안으로 구분하고, 병적인 불안이 과도하게 지속되어 사회적 기능 또는 직업적 기능에 장애가 생길 경우 이를 불안장애라고 진단한다. 불안장애란 용어는 흔히 하나의 병명처럼 사용되지만, 불안이 주된 증상으로 나타나는 질병군을 일컫는 말이며, 구체적인 질병명인 범불안장애, 사회공포증, 공황장애, 강박장애, 특수공포증 등이 포함된다.

성경에서는 불안과 비슷한 뜻으로 두려움(fear)이라는 단어가 주로 사용된다. 국어사전에서는 두려움을 무엇을 무서워함, 또는 무엇을 하기를 꺼림이라고 풀이한다. 하나님께서 성경을 통해 우리에게 가장 많이 말씀하신 명령이 바로 “두려워하지말라”이다. 성경 전체를 통틀어 365번 이 명령을 주셨다고 해서, 우리가 1년 365일 매일 두려워하지 말아야 한다는 뜻이라고 해석하시는 분도 계신다. 적절한 설명이라고 고개가 끄덕여지는 것은 두려움이야말로 우리가 매일의 영적 전쟁에서 가장 흔히 부딪히는 적이라는 것을 경험으로 알고 있기 때문이다.

또한 불안이나 두려움이 감정적인 문제임에도불구하고 실제로 육신의 건강에도 심대한 영향을미친다는 사실은 정신신경내분비면역학(psychoneuroendoimmunology) 영역의 연구를 통해 속속 드러나고 있다. 그렇다면 우리는 불안이나 두려움으로부터 우리 자신을 어떻게 지켜나가야 하는가? 불안 또는 두려움에 대해서 어떤 태도를 취하는 것이 옳은 것인가?

두려움과 관련하여 가장 유명하다고 할 수 있는 구절이 요한1서 4장 18절 말씀일 것이다.

 

사랑 안에 두려움이 없고 온전한 사랑이 두려움을 내쫓나니 두려움에는 형벌이 있음이라 두려워하는 자는 사랑 안에서 온전히 이루지못하였느니라 요일4:18
 

 

 

하나님은 사랑이시기 때문에 하나님의 온전한사랑을 아는 자에게는 두려움이 없다고 말씀하신다. 그리고 두려움은 그 자체가 형벌이라고 할 수있을 만큼 고통스러운 것이라고 말씀하신다. 그러므로 우리가 하나님을 더 많이 알아 갈 수록 우리 안에는 두려움이 설 자리가 점점 더 적어진다.

 

몸은 죽여도 영혼은 능히 죽이지 못하는 자들을 두려워하지 말고 오직 몸과 영혼을 능히 지옥에 멸하 실 수 있는 이를 두려워하라 마10:28

 

 

그런데 이 말씀에서 예수님은 분명히 하나님을 두려워하라고 말씀하신다. 그렇다면 우리가 두려움을 느끼는 것이 옳은가, 두려움을 느끼지 않는것이 옳은가?

이 질문에 대한 답은 정신의학에서 이야기하는 불안의 정의로서는 풀 수 없다. 왜냐하면 정신의학에서 말하는 불안은 그 불안이 적절한지 적절하지 않은지를 기준으로 정상과 비정상을 나누기 때문이다. 즉 상황이 그 불안을 일으키기에 적절한지, 그 불안이 지속되는 시간이 적절한지가 기준이 된다. 이러한 기준이 불안과 관련해서 정상과 비정상을 잘 구분해 줄 수 있을까? 우리의 삶을 한번 돌아보자. 하루에도 얼마나 많은 사건사고가 일어나는가? TV 뉴스를 보면 온통 불안하게 만드는 내용 일색이다. 그렇다면 이런 세상을 살아가면서 어느 정도의 불안을 느끼는 것이 적절한 것일까?

다른 나라 이야기는 차치하고 2011년 우리나라 사망통계를 들여다보자. 2011년 한해 총 25만7천396명이 이 세상을 떠났다. 다시 말해 하루에약 705명이 사망했고, 약 3분에 한 명이 사망한 것이다. 다른 나라도 아니고 우리나라에서 3분마다 한 명이 사망하는 이 세상에서 어느 정도 불안해야 정상일까?

 

또 죽기를 무서워하므로 한평생 매여 종 노릇 하는 모든 자들을 놓아주려 하심이니  히2:15

 

또 일생 동안 죽음의 공포 때문에 종노릇하는 사람들을 해방시키시기 위함이었습니다.  히2:15(새번역)

 

 

인간에게 가장 두려운 일은 무엇일까? 여러 가지 이야기가 가능하겠지만 그래도 자신의 죽음보다 더 두려운 일이 있을까? 그래서 우리는 한평생 죽기를 무서워하고 그 공포 때문에 종노릇을한다. 죽음의 공포로부터 자신을 보호하기 위해우리가 가장 흔히 사용하는 방법이“나의 죽음” 을“부정(denial)”하는 것이다. 그러다 그 부정을지속할 수 없는 상황, 즉 자신에게 또는 주변의누군가에게 죽음을 직면할 수밖에 없는 일이 일어나면 죽음의 공포를 느끼게 된다. 그러나 그 일이 해결되거나 시간이 흐르면 또 어느새“나는 내가 나의 죽음을 수긍하고 받아들일 수 있는 먼훗날까지 죽지 않을 거야!”라며 자신의 죽음을 부정하는 상태로 돌아간다. 물론 적지 않은 사람들이 그런 사건을 계기로 그 부정이 완전히 깨져서 죽음의 공포를 고스란히 매순간 느끼며 살아가는 고통스러운 상황에 처하게 되기도 한다.

그래서 두려움에 대한 인간의 태도는 두려움에 사로잡히거나 아니면 두려움 자체를 잊어버리거나 피하는 것 둘 중의 하나일 수밖에 없다. 다시말해 불안이라는 관점에서 보면 우리의 삶은 불안해하는 시간과 불안을 망각한 시간 이 둘로 구성되어 있다고도 할 수 있다. 왜냐하면 모든 불안이나 두려움의 근원이라고 할 수 있는 사망이야말로 타락한 인간이 피할 수 없는 죄의 결과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두려움을 어떤 기준으로 바라보아야 하는가? 두려움을‘정도와 기간’의 문제로 바라보는 것이 아니라 그‘대상과 유무’를 기준으로 바라볼 때 우리는 두려움에 대해 올바른 태도를 가질 수 있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우리에게는 하나님이 대상인 두려움만이 올바른 것이며, 그 외에 어떤 대상에 대해서도 두려움을 느낀다면 그것은 옳지 않은 것이다.

우리는 사단이 흔히 사용하는 전략 중의 하나가 우리에게 두려움을 주는 것이라는 말을 자주 듣는다. 사단은 틀림없이 두려움을 이용하여 우리를 삼키려고 한다. 그래서 우리는 우리 마음에 두려움이 일어날 때 그것이 사단의 계략임을 빨리 알아차리고 그에 대처하여야 한다.

그러나 우리가 두려움을 이용하는 사단의 전략을 그렇게만 이해해서는 안 된다. 두려움과 관련해서 반드시 기억해야 할 사단의 전략이 하나가더 있다. 그것은 두려움을 주느냐 주지 않느냐보다 더 교묘한 전략이다. 그것은 바로 두려워하지 않아야 할 것을 두려워하도록 하고, 두려워해야할 것을 두려워하지 않도록 만드는 것이다. 즉우리가 두려움이 내게 있느냐 없느냐로 열심히싸우고 있을 때, 사단은 우리로 하여금 두려움의 대상에 대해 혼돈케 하므로 우리를 속인다.

앞서 말한 바와 같이 우리가 두려워해야 할 대상은 하나님 단 한분이다. 그런데 회심하기 전의우리 자신의 삶이나, 아직도 세상 영의 지배를 받고 있는 사람들의 삶을 보라. 하나님을 전혀두려워하지 않는다. 하나님이 계셔서 우리를 보고 계시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처럼 행동한다. 그것은 바로 사단이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도록 속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인면수심의 범죄자들에게 하는 말 중에 가장 흔한 것이 “하늘이 두렵지도 않느냐?”는 말일 것이다. 그들은 두려워하지 않는다. 그러다 하나님의 실존 앞에 서게되면 말할 수 없는 두려움에 사로잡힌다.

사단의 속임수에 속아 살던 사람이 하나님이 계시다는 것을 알게 되어 두려워하게 되면, 다음단계의 작전을 개시한다. 그것은 바로 하나님은 사랑이시기 때문에 절대로 두려워할 필요가 없다고 속이는 것이다. 우리가 이미 예수님의 보혈로 죄사함을 받았기 때문에 어떻게 살든 하나님은 우리를 끝까지 사랑하시기만 한다는 것이다.이 방법을 사용해서라도 사단은 기를 쓰고 우리가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못하도록 만든다.

그러다 하나님이 사랑이시지만 동시에 공의의 하나님이시라는 것을 깨달으면, 그리고 하나님의 은혜에 대해서 알기 시작하면 그 다음 단계의 전술을 사용한다. 이때부터는 오히려 하나님을 두려워하도록 몰아간다. 하나님이 너의 죄를 아직 다 사하시지 않았다거나, 당신의 죄가 너무나커서 하나님이라도 용서하실 수 없다거나, 또는 하나님은 당신을 사랑하시기는 해도 그렇게 많이 사랑하시는 것은 아니라는 것으로 우리를 속인다. 하나님은 당신이 잘 할 때는 기뻐하시고 사랑하시지만 잘못 하면 금세 얼굴을 돌리신다고 속인다. 그래서 죽도록 충성하라고 부추긴다.(개정개역판 요한계시록 2장 10절에서 예수님께서는“죽도록 충성하라”고 말씀하신다. 우리말로 번역된 대부분의 성경에서도 “죽도록”이라는, 정도를 나타내는 부사로 번역을 하고 있어 그야말로“죽을 정도로”충성하라는 말씀으로 이해하기쉽다. 하지만 헬라어 원문은 (시간의) ~까지라는 전치사로 되어 있어서 영어성경에서도 보통unto로 번역한다. 다시 말해“죽도록”을 죽음의 시점까지의 “시간개념”으로 이해하는 것이 옳다.즉 살아있는 내내 변치 말고 충성하라는 뜻이지, “죽을 힘을 다해”충성하라는 뜻이 아니다. 따라서 내가“죽도록”충성하고 있지는 못하다고 두려워하지 않아도 된다.)

동시에 사단은 하나님 이외의 모든 것으로 부터 두려움을 느끼도록 만든다. 건강, 재물, 명예가 조금이라도 줄어들지는 않을까, 내 가족이 잘못되지는 않을까 늘 두려워하며 살게 만든다. 내가건강을 잃는 것, 재물을 잃는 것, 명예를 잃는 것이나 자녀가 세상 사람들이 부러워할 만큼 잘 되지 못하는 것 등을 전부 나의 죽음으로 여기게 만든다. 그래서 그런 일들이 내 삶에서 일어날까봐 두려워하며 그런 일들이 일어나지 않도록 하기위해 일생에 매여 종노릇하게 만든다.

 

징계는 다 받는 것이거늘 너희에게 없으면 사생자요 친아들이 아니니라 히12:8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어떤 모습으로 하나님께 돌아오든지 그 모습 그대로 사랑하시고 받아주시지만, 동시에 그 모습에 머물러 있도록 절대로 내버려 두지 않으실 만큼 우리를 사랑하신다. 그래서 하나님은 우리를 징계하기도 하시고, 고난을 허락하기도 하신다. 이런 일들은 하나님의 사랑에 기초하여 우리의 인생에서 일어나는 사건인데, 사단은 우리가 이런 일을 겪을 때 정작 문제를 일으킨 장본인인 자신은 쏙 빼고, 그것이 하나님과 나 사이의 문제인걸로만 이해하도록 하여 하나님을 의심하고 오해하게 만든다. 마치 하나님께서 나를 사랑하지 않으시기 때문에 일어나는 일로 생각하게 만들어 두려움에 빠지게 만든다.

 

그러므로 이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 롬8:1

 

진짜 복음은 나의 정체성을 정확하고 분명하게 알려주어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의 의가 되었으며,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다는 것을깨닫게 해줌으로서 우리에게 단 하나의 두려움만을 남기고 모두 제거해 준다. 그 두려움은 바로하나님에 대한 두려움이다. 그러나 그 두려움은 심판과 정죄함에 대한 두려움이 아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것은 두려워하는 마음이 아니요 오직 능력과 사랑과 절제하는 마음이니  딤후1:7

 

그리고 뭔가를 잃어버릴까에 대한 두려움도 아니다. 그 두려움은 바로 내가 하나님을 더욱 사랑하지 못할 것에 대한 두려움이다. 이상하게 들리지만 사실 그것은 두려움이 아니다. 모든 것을 압도하는 사랑으로 나를 사랑하시는 아버지의 자녀가, 아버지를 더욱 사랑하지 못할까봐 걱정하는것은 사실 걱정이 아니다. 우리에게 사랑하는 사람이 생겼을 때, 그리고 그 사람도 나를 정말 사랑한다는 것을 알 때, 내가 그 사람을 더 사랑하지 못하면 어떡하나 하는 걱정은 두려움인가 기쁨인가? 우리에게 남아있어야 하는 두려움은 바로 그 묘한 두려움 밖에는 없다.

 

평안을 너희에게 끼치노니 곧 나의 평안을 너희에게 주노라 내가 너희에게 주는 것은 세상이 주는 것과 같지 아니하니라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도 말고 두려워하지도 말라  요14:27

 

 

하나님께서 우리를 자녀삼아 주셨다는 것이 얼마나 큰 은혜인지는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완벽한평안(perfect peace)을 누려보면 알게 된다. 우리의 마음이 세상 어떤 것으로부터도 두려움을 느낄 필요가 없어지는 단계, 즉 죽음조차도 우리에게 아무런 두려움을 주지 못하는 상태, 그리고 더 나아가 하나님 앞에서도 하나님의 자녀가 가지는 경외함은 있으나 그 외에는 감사와 찬양과 기쁨으로 서 있을 수 있는 것을 경험하는 단계. 그 단계를 경험해 보면 알게 된다. 그것은 세상이 결코 줄 수 없는 것이다. 나의 성공이, 나의 재물이, 나의 직장이, 나의 건강이, 연금이 결코 줄수 없는 것이다.

예수님의 평안 안에서 지내는 시간이 늘어나면늘어날수록 우리는 육신적으로도 건강해질 수밖에 없다. 모든 신체기능이 하나님께서 처음 창조하셨던 그 상태로 작동하게 되는 것이다. 우리는 흔히 우리의 믿음을 점검할 때‘구원의 확신이있느냐’는 질문을 한다. 그 질문은 조금 더 정확히 수정되어야 한다. 만약 오늘 밤 나에게 예수님께서 하늘나라로 가자고 하실 때 나는 어떻게 반응할 것인가? 지금 내가 가지고 있는 것 중에서그것이 없어진다면 두려워질 것이 있는가? 이 질문에 대해 답해 보자. 그리하여 내 안에 두려움을쫓아내는 온전한 사랑이 있는지 확인해 보자. 만약 예수님께서 하늘나라로 가자고 하시거나 어떤것을 내려놓으라고 하셨을 때 토를 달고 싶은 어떤 것이 있다면 그 부분까지도 하나님께서 통치하시도록 맡겨드리자.

 

육체의 연습은 약간의 유익이 있으나 경건은 범사에 유익하니 금생과 내생에 약속이 있느니라 딤전4:8

 

 

육신이 육신을 지킨다고 건강해지지 않는다. 그보다 우리의 마음을 지켜야 한다. 그러나 우리의마음은 전적으로 타락하였기 때문에 우리 힘으로는 결코 지킬 수 없다. 죄의식으로부터 올라오는 두려움은 우리의 영으로부터 임하시는 성령님의 능력으로만 없앨 수 있다. 늘 깨어 있어 내게 두려움이 있는지 없는지, 있다면 내가 무엇을 두려워하는지 정확히 분별하자. 두려움을 없애기 위해 날마다 성령님께 혼과 육을 맡겨드리자. 건강하려면 두려움을 없애라. 예수님께서 주시는 완벽한 평강 안에 거하라. 그리하면 너희가 살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