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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토벤 – 환희의 송가

베토벤 – 환희의 송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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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INGDOM LIFE &
음악
베토벤 – 환희의 송가

예원학교, 서울예술고등학교 강사 김애엽


 

베토벤, 아! 베토벤. 그의 삶을 알고 그의 음악을 들으면 온 마음이 깊고 강렬한 감동으로 물결치게 된다.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인간이 참으로 존귀하고 아름다우며, 상한 갈대를 꺾지 않으시고 꺼져가는 심지를 끄지 않으시고
구원하시는 하나님 아버지의 사랑이 너무도 지극하심을 알게 되기 때문이다. 베토벤의 삶은 치열하고 애절하며 위대하다.
고통과 역경을 통해 창조주 하나님을 만나게 되고 그 모든 절망과 번뇌가 이루 형언할 수 없는 환희로 바뀌는 삶, 그것이 베토벤의 삶이었다.
그 삶을 지금도 생생하게 들려주는 것이 그의 음악이다.

라인 강이 흐르는 오스트리아의 본이라는 도시에서 태어난 루트비히 판 베토벤(Ludwig van Beethoven, 1770-1827)은 어려서부터
힘겨운 삶을 살았다. 궁정악단의 테너가수였던 그의 아버지는 뛰어난 음악적 재능을 보이는 큰 아들 베토벤을 당시 유명했던 천재 모차르트처럼
키우기 위해 네 살 때부터 혹독한 훈련과 연습을 시켰다. 알코올 중독자로 성격이 난폭하였던 아버지는 피아노와 바이올린을 직접 가르치며
어린 아들을 가혹하게 몇 시간씩 가두어 놓고 체벌하며 연습을 시켰다고 한다.
아들의 재능을 그의 돈벌이 수단으로 이용하기 위해 시작한 조기교육으로 인해, 베토벤은 일곱 살 때부터 대중들 앞에서 연주를 했고
열 살 때는 작곡을 했다.

아버지의 실력으로는 더 이상 가르칠 수 없게 되자, 네페(C. G. Neefe)라는 선생에게 보내어 정식으로 작곡과 이론을 배우게 하였다.
다행히 네페 선생은 고귀한 정신과 풍부한 예술적 조예를 지닌 좋은 스승이자 친구 같은 분으로, 베토벤에게 많은 영향을 주었다고 한다.
대주교 앞에서 신동으로 연주도 하였고, 열한 살 때는 극장의 관현악단의 피아노 연주자가 되었다.
열세 살부터는 오르가니스트로 일하면서 돈을 벌었다. 그러나 열일곱 살에 가장 친한 친구이기도 했던 사랑하는 어머니가 폐렴으로 돌아가시고,
열아홉 살에는 아버지가 실직을 하게 된다. 베토벤은 어린 동생들을 부양해야 하는 책임을 지고 궁정 악단의 비올라 연주자로 돈을 벌어
가족을 돌보는 가장이 된다.

그러던 중 발트슈타인 백작이라는 좋은 후원자와 선제후의 도움으로, 스물두 살에 음악의 도시 빈으로 유학을 간다.
그 곳에서 베토벤은 모차르트도 만나서 연주를 선보이고, 하이든과 살리에리 같은 대 작곡가들을 만나서 작곡을 사사받기도 한다.
그 당시 천재 연주자로 활발한 활동을 했던 모차르트가 죽자, 그 자리를 이어받아 연주자로서 크게 인정을 받으며 많은 사람들 앞에서
연주도 많이 하게 된다. 그리고 스물여섯 살 때부터는 작곡가로서도 이름을 알리며 풍성한 삶을 살게 된다.*1
스승인 하이든과 공동 음악회를 개최했는데, 감격한 청중들은 눈물을 흘리며 열광적인 호응을 보였다고 한다.*2

[*1 하이든, 모차르트, 베토벤은 ‘빈 고전주의 악파’의 중심인물들로 서양음악사에서 고전주의 양식을 확립하였다.]

[*2 베토벤은 대가 하이든의 가르침을 기대했으나, 그의 가르침에 실망해서 곧 다른 선생님으로 옮겼다. 서로 썩 좋은 사제 간은 아니었다.]

 

그러다 스물일곱이 되던 1797년부터 청각에 문제가 생기면서 청력이 떨어지게 된다.*3
승승장구하던 베토벤은 그 사실에 너무나 절망하고 괴로워하며 신을 원망하는 삶을 살게 된다.
1801년 어린 시절부터 친구였던 카를 아만다(Karl Amanda)에게 보낸 편지에서 그는 이렇게 쓰고 있다.
“자네의 베토벤은 자연과 창조주 모두와 불화하며 아주 불행하게 살고 있다네. 나는 자기 피조물을 하찮은 불운에 노출시키는 바람에,
가장 아름다운 꽃도 시들게 하거나 짓밟아버리는 창조주를 여러 번 저주했다네.” 또 다른 편지에는 이런 글을 남긴다.
“이제 내가 겨우 서른한 살인데 참다운 나의 인생은 지금부터야. 해야 할 일이 태산같이 많지 않은가?
그런데 귀가 들리지 않으니 살아서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그러면서도 베토벤의 창작에 대한 열정은 끓어 넘쳐 친구 베겔러에게 이런 글을 보낸다.
“내 젊음은 이제 막 시작되었다는 느낌이 들어…. 얼마 전부터 내 체력과 재능은 그 어느 때보다 치솟아 있다네.
운명의 멱살을 쥐고야 말거야. 비록 아주 굴복시킬 수는 없겠지만 말이야. 아 나의 인생을 천 번 살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3 1797년 티푸스라는 질병에 걸린 후부터 청력에 문제가 생기기 시작했다고 한다. 이후 일생동안 장, 눈, 폐, 간 등의 갖가지 질병으로 시달리게 된다. 베토벤을 문상 온 어린 음악가가 머리카락을 잘라서 대를 물리며 보관해 오던 것이 1994년 소더비 경매소에서 공개되었는데, 국립 아르곤 연구소에서 베토벤의 머리카락을 분석한 결과, 보통 사람들의 100배가 넘는 납 성분이 발견되어 그의 육체적 고통과 청력상실의 원인이 납중독으로 밝혀졌다.]

 

그러나 그런 운명을 거슬러 저항하던 베토벤의 힘은 곧 스러져 그는 유서를 쓰게 된다.
의사의 권유로 하일리겐슈타트(Heiligenstadt)라는 곳으로 휴양을 간 베토벤은 1802년 10월 6일과 10일 이틀에 걸쳐 동생들에게 유서를 쓴다.
이 유서의 구절들을 통해 후세 사람들은 베토벤의 고통, 자신의 성격을 나무라는 사람들에 대한 설득, 끝까지 동생들을 책임지려는 따뜻한 마음과 의지, 음악에 대한 열정, 그의 선량하고 연약하고 순수한 인격을 볼 수 있다. 긴 유서를 대폭 줄여서 옮겨본다.

나의 동생 카를 베토벤에게.

… 어릴 때부터 내 마음과 정신은 사실 친절하고 다정한 감정으로 넘쳐나고 있었고 훌륭한 행동을 하고자 하는 소원으로 가득했다…
그러나 나는 내가 귀가 안 들리니 좀 더 큰 소리로 말해달라거나 외쳐달라는 말을 차마 할 수가 없었다… 아, 나의 경우 남보다
더 완전해야 할 감각이 병들어 있다는 사실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한단 말인가? … 사람들이 모인 곳에 나갈 때에는 나의 장애가 발각될까봐
두려움 때문에 이상한 공포에 사로잡히곤 하였다. 나는 거의 절망상태에 빠진 채 자살을 기도하기도 했었다.
나는 이제 나에게 부과된 모든 창작을 완성하기 전까지는 이 세상을 떠날 수 없을 것 같다. 이것 때문에 나는 이 비참한 생존을
견뎌 낼 수 있는 것 같다… 하나님은 내 마음 깊은 곳까지 통찰하시고 알고 계시니 내가 얼마나 인간애와 선행을 간절히 구하고 있는지를 알고 계신다…
아아! 사람들은 언젠가 여기에 기록된 말을 읽고 얼마나 나를 냉대했던가를 깨닫게 될 것이다.
또 모든 장애를 갖고도 거룩한 예술가와 인간의 행렬에 들기 위하여 최선을 다한 자가 있었다는 것을 알고,
또 불행한 자들은 스스로 위로하면서 자기와 똑같은 종류의 사람이 존재하고 있었다는 것을 깨닫게 될 것이다…
자살로 내 생애를 끝내지 않았던 것은 나의 예술과 사람들이 나에게 베풀어 준 아름다운 행동들 때문이다… 잘 있거라.
부디 서로를 사랑하며 살아가다오. 무덤 밑에 있다 하더라도 너희들에게 도움이 될 수 있다면 이 이상 기쁜 일이 없다.
이어진 10월 10일의 유서에는 다시 절망이 가득하다.

이것으로 너희들에게 작별을 고한다. 참으로 슬프다. 그러나 저 잊지 못할 희망, 적어도 어느 정도는 쾌유하리라 생각하고
이곳으로 왔을 때 가졌던 희망. 그것을 지금은 모조리 포기하지 않으면 안 된다. 가을 나뭇잎이 떨어져 시들고 마르듯이 그 희망도 꺾이고 말았다.
여기에 왔을 때와 거의 같은 모습으로 나는 떠나간다. 오오 신이여, 마지막으로 단 하루라도 좋으니,
순수한 환희의 날을 나에게 내려주시옵소서. 참된 환희가 나의 가슴에 일지 않게 된 지가 오래되었습니다.
오오, 어느 날에 하나님, 또 다시 자연과 인간의 성전 속에서 내가 그 환희를 맛볼 수 있을 것인지, 절대로 얻어질 수 없는 환희일 것인지.
아아, 그렇다면 너무나도 냉혹합니다.

 

유서를 쓰면서도 베토벤은 절망과 희망 사이를 오락가락 한다.
그의 음악 창작에 대한 열정이 너무 커서 그 일을 완수하기 전에는 도저히 죽을 수 없다는 생각을 하고 있음을 보게 된다.
베토벤이 유서를 쓰기까지는 엄청난 고뇌의 시간을 보냈다. 생활은 곤란해졌고, 사랑에는 실패했다.
그는 사랑하는 여인과 따뜻한 가정을 꾸리고 살고 싶은 열망이 누구보다 강했지만, 자신의 장애 때문에 포기한다.
음악가로서는 치명적인 청각장애를 앓으며 그의 성격은 폐쇄적으로 되었고, 사람을 만나는 것을 피하고 은둔하며 열심히
창작에만 몰두하는 삶을 살아왔던 것이다. 유서를 쓰고 난 후 삶을 포기하기에는 너무 이르다고 생각하여 집밖으로 나가 숲을 거닐었다고 한다.
그런데 놀랍게도 지저귀는 새소리와 졸졸 흐르는 물소리가 들려왔다. 베토벤은 이렇게 외쳤다.
“들린다. 들려! 그렇다. 내게는 마음이 있다. 마음으로 듣고 마음으로 음악을 만드는 거다!” 그는 곧장 집으로 돌아와 작곡을 시작했다.

유서를 쓴 이후부터 그는 서서히 변한다. 자신을 신이 창조한 인간 중에 가장 비참한 인간이라고 여기며 은둔하여 살다가,
그 사실을 부끄러운 것으로 여기지 않게 되었다. 그는 눈부시게 아름다운 인간 내면의 깊은 감정들을 표출한 음악을 만들어낸다.
그의 작품의 대부분은 청력을 잃어가면서 작곡한 것들이다. “나는 지금부터 내 귀가 들리지 않는다는것을 비밀로 하지 않겠다.
귀가 멀었다는 것이 세상에 알려진다 해도 거리낄 것이 없다. 계속해서 작곡을 할 수 있으며,
귀가 들리지 않아도 나의 예술이 손상당하는 일은 절대로 없을 것이다!” 유서에서 저주받은 천재의 고뇌를 보여주던 베토벤은,
결국 운명을 받아들임으로 그의 투쟁에 종지부를 찍었다. “이것이 나의 운명이라면, 나는 이 아름다운 음악을
이 세상에 내보낸다는 일생의 사명을 이룩하기 위하여 기꺼이 그러한 운명을 받아들여야 한다!” 1811년부터는 공책에 이런 글을 쓴다.
“네 자신의 운명을 받아들여라! 이것만이 너로 하여금 ‘봉사’가 요구하는 희생을 받아들이도록 만들 수 있을 것이다!”
“주님께 의지하오니, 주님의 자비로움 안에서 침착함과 순종으로 운명의 모든 굴곡을 받아들이고자 하옵니다.”
“아무리 어렵고 모순되는 상황 속에서도 인내하는 것이야말로 인간의 이름에 합당한 중요한 특성이다.”
“우리 앞에 놓인 삶의 어려움이 좀 더 나은 삶으로 향하는 표지판이라고 생각하자!”

결국 베토벤은 창조주를 자신이 완전히 헌신하고 받아들여야 하는 존재로 인식하게 되었다.
예전에는 창조주를 저주했는데, 이제 일기장에 이렇게 썼다. “체념, 받아들임. 받아들임! 이제 우리는 가장 심원한 고통으로부터
도덕적 우위를 이끌어내서 주님의 용서에 합당한 사람이 될 수 있도록 하자!” 그는 우주에 깃들어 있는 창조주 하나님의 살아계신 증거들을
놀랍도록 정확하게 파악하게 된다. “우주는 원자들의 우연한 재결합으로 만들어진 것이 아니다.
가장 이성적인 지성에 기반을 둔 확고한 힘과 법칙이야말로 이 불변의 질서의 근원이며,
이것이야말로 우연이 아닌 필연에 의해 원자들로부터 흘러 나왔다. 우주의 구성에 담긴 질서와 아름다움은 우리에게 신의 존재를 보여준다.”*4

[*4 이렇듯 분명하게 베토벤이 신의 존재를 의식하고 의지하고 순종하고 있는 글들을 많이 남기고 있는데도, 어처구니없이 많은 사람들은 그를 무신론자라고 이야기하곤 한다.]

 

얼마나 기적 같은 변화인가! 얼마나 힘든 여정을 살아왔던가! 이제 비참했던 천재의 운명은 숭고하고 거룩한 것이 되었다.
1815년의 글들에는 이러한 신앙적 고백들이 가득하다.*5 “전원에 있으면 내 불행한 청각도 나를 괴롭히지 않는다.
거기서는 한 그루 한그루의 나무가 나를 향해서 거룩, 거룩이라고 말을 걸고 있는 것 같다. 숲 속의 환희와 황홀! 누가 감히
이런 것을 표현할 수 있는가?” “신은 물질이 아니다. 그러므로 신은 일체의 개념을 초월한다.신은 영원하며 전능하며 전지하다.
공간의 어디에든 현존해 있다. 오! 신이여 당신은 모든 시간과 장소의 진실된 그리고 영원히 복되고 불변하는 빛입니다.
당신의 예지는 무수한 법칙을 인정하면서, 더욱이 당신의 행위는 항상 자유이며 당신의 행위의 결과는 항상 당신 자신의 영광이 됩니다…
당신에게 일체의 찬송과 공경이 바쳐지이다! 당신만이 참된 정복자입니다. 모든 법칙의 실체,
모든 예지의 모습인 당신은 전 우주에 현존하여 모든 사물을 유지하고 있습니다.”

[*5 베토벤은 엄청난 양의 글들을 자신의 수첩에 남겼다.]
베토벤은 하나님을 만났다. 하나님께서는 애통하고 심령이 가난한 그를 만나주셨다.
그는 하나님을 느끼고 그분과 호흡했다. 만물에 충만한 신성을 그는 깨달았고 진리이신 하나님을 알았기에 비록 육신의 고통이 있다하더라도
그토록 갈망하던 참 자유를 누리게 되었다. “괴로움을 넘어 기쁨으로!(Durch Leiden Freude!)”

 

누가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으리오 환난이나 곤고나 핍박이나 기근이나 적신이나 위험이나 칼이랴 롬8:35

 

베토벤은 유서를 쓴 이후 죽지 않고 25년을 더 살면서 역사에 길이 남을 명작들을 열정적으로 작곡한다.
그것은 스스로의 운명에 자신의 힘으로 맞서서 싸운 결과가 아니다. 자신이 그토록 갈망했던 위대한 영웅의 탄생도 아니었다.
인간의 힘도 능도 아닌 창조주 하나님을 만나고 그 분께 굴복함으로써 생긴 기적인 것이다.

그가 불멸의 여인에게 쓴 편지에 보면 “장애를 행복한 마음으로 극복했을 때는 언제나 어떤 기쁨을 맛보게 된다오.”
에르되디(Erdoedy) 백작 부인에게는 그는 이렇게 썼다. “우리는 오직 고통과 즐거움을 위해서 태어났으며,
우리 중에서 가장 뛰어난 사람들은 고통으로부터 기쁨을 이끌어 낸다고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베토벤은 고통을 통해 성장했으며, 그의 고통은 오히려 그에게 창조적인 원천이 되었다.
귀가 들리지 않아도 그는 머리로 듣고 마음으로 들으며 작곡을 계속할 수 있었다. 교향곡 1,2번은 청각에 문제가 생긴 후인 1800년에 발표하였고,
3번부터 9번까지는 모두 유서를 작성한 후에 작곡한 곡들이다. 수많은 곡들의 악상이 동시에 머리에 떠올라 여러 곡을 동시에 작곡해 나갔다.
학생들 레슨도 하고 곡을 의뢰하는 사람들을 위해 작곡도 하였다.*6

[*6 베토벤은 아홉 개의 교향곡, 음악의 신약 성서라고 불리는 32곡의 피아노 소나타, 10곡의 바이올린 소나타, 주옥과 같이 아름다운 5곡의 피아노 협주곡, 9곡의 피아노 트리오, 죽기 직전까지 작곡했던 16곡의 현악 사중주곡, 오페라 1곡, 오라토리오 1곡, 미사곡 2곡, 11곡의 피아노 3중주곡, 수 백곡의 성악곡 등을 작곡했는데, 대부분이 청력이 상실된 상태에서 작곡되었다.]

 

초등학교 정도의 학교 교육만을 받았지만 베토벤은 직관이 뛰어나고 영감이 충만한 창조력을 갖추었을 뿐만 아니라,
동시에 사상가이자 철학자였으며 뛰어난 지식인이기도 했다. 그가 작품 하나하나에 붙인 헌사는 내면적인 심리상태나 역사적인 사건과
관련이 있으며 우정, 감사, 상징적 요소 등을 기록해 두었다. 현악 사중주곡 작품 132번 3악장(Molto adagio)에는
“병환에서 치유되어가는 이가 신에게 드리는 거룩한 감사의 노래
(Heiliger Dankgesang eines Genesenden an die Gottheit[A convalescent’s hymn of thanksgiving to the divinity])”라고 적고 있다.
그의 귀는 점점 나빠져 갔어도 그의 마음은 치유되어가고 있었다.
그리고 마침내 그는 말년에 그의 작품의 최고의 절정이며 동서고금의 교향곡 중에서 가장 뛰어난 작품 중의 하나인
교향곡 9번 <합창>을 작곡하게 된다.*7

[*7 1826년에 출간된 초판 스코어의 제명에 [실러작 송가 ‘환희에 붙임’을 마지막의 합창으로 한 대관현악, 4성의 독창, 4성의 합창을 위해 작곡되었으며, 프로이센 왕 프리드리히 빌헬름 3세 폐하에게 심심한 경의를 표하기 위해 루트비히 판 베토벤에 의해서 봉정된 교향곡 작품125]라고 기재되어 있다. 이것이 9번 교향곡의 원제목이다.]

 

원래 9번 교향곡은 성악이 없는 4악장의 기악곡으로 만든 후에 10번 교향곡 전체에 성악을 넣은 독일교향곡을 구상하였으나,
갈등하다가 9번 4악장에 합창과 성악을 넣기로 결정한다. 그리고 그는 10번 교향곡을 미완성으로 남긴 채 하나님께로 가게 된다.
이 곡을 작곡할 당시 완전히 청력을 상실하였으나, 불멸의 명곡을 너무나도 온전하게 작곡한다. 이 곡은 2003년 유네스코에서
세계음악유산으로 공식 지정되어, 전 세계적으로 인정을 받은 최대의 역사적 걸작이다.

으로 검색하면 정명훈 지휘의 <합창> 교향곡 4악장을 감상할 수 있다.
전체 교향곡의 길이가 길어서 4악장만 먼저 감상하고 다시 전체를 감상하는 것이 도움이 될 것 같다.
그 외에 카라얀 등이 지휘한 많은 연주가 있다.

 

교향곡 제9번 <합창> : Symphony No.9 D장조 op.125

제1악장 Allegro ma non troppo, un poco maestoso d단조 2/2박자 소나타 형식 제2악장 Molto vivace d단조 3/4박자
스케르초제3악장 Adagio molto e cantabile B-flat장조 4/4박자 제4악장 / 제5악장 Presto – Allegro assai / Presto D장조 4/4, 3/2박자*8

[*8 교향곡 전체를 설명하려면 글이 너무 길어져서 제1-3악장은 생략하고, 쉴러의 시에 곡을 붙인 성악이 나오는 제4악장과 제5악장만 자세히설명하고자 한다.]

 

마치 환희의 송가를 시작하기 전에 사람들이 많은 고통과 투쟁을 체험해야 하며 그것을 극복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사실을 말하는 듯이,
이 악장은 매우 빠른 관현악에 의한 약간 기괴한 소음으로 시작된다. 모든 고난을 극복하고자 하는 사람의 정신을 나타내는 것 같은
저음 현악기의 레치타티보가 여러 번 중단되며 연주되다가 제1악장의 첫머리가 나타난다. 다시 레치타티보가 있고
제2악장의 부분이 또 레치타티보를 연주한 다음, 제3악장의 선율이 회상되고는 “합창”의 모티브가 목관에서 나타나고 나서 비로소
저음 현악기에서 환희의 선율이 고조되어 간다. 단순하고 소박하기 그지없는 24마디의 선율, 즉 [환희]의 선율이 저음 현악기들로
여리게 노래되고 이것이 비올라와 첼로, 바이올린으로 옮겨가며 확대하여 가다가, 네 번째는 포르테 시모(ff)의 전 합주로 고조되며
환희를 노래한다.*9 다시 한 번 폭풍이 몰아치듯 저음의 억센 소음이 나오다가 중단되고 드디어 바리톤의 레치타티보가 힘차게 외친다.

[*9 이 단순하면서도 아름다운 주제선율은 찬송가 287장으로 익히 알려져 있다. “오늘 모여 찬송함은 형제 자매 즐거움 거룩하신 주 뜻대로 혼인예식 행하세”의 가사로 결혼 예배에서 많이 부르는 곡이다.]
베토벤의 교향곡 9번 <합창> 마지막 악장의 <환희의 송가> 가사를 번역하여 싣는다.*10

[*10 시인 쉴러(Johann Christoph Friedrich von Schiller, 1759-1805)의 환희의 송가(An Die Freude; Ode to Joy)에 베토벤이 곡을 붙인 것이다.]

 

(바리톤 레치타티보)
“오, 친구여! 이런 곡조가 아니네! 더욱 기쁨에 찬 노래를 부르세!*11

[*11 이 짧은 가사는 베토벤 자신이 쉴러의 시 앞에 첨가한 것이다.]

 

(바리톤과 합창)
환희여, 아름다운 신의 광채여! 천국의 딸들이여!
우리 모두 황홀함에 취해 빛이 가득한 곳으로 들어가자. 성스러운 성전으로.
가혹한 현실이 갈라놓았던 자들을 신비로운 그대의 힘으로 다시 결합시키는 도다.
모든 인간은 형제가 된다. 당신의 부드러운 날개가 머무르는 곳에.

(사중창과 합창)
위대한 하늘의 선물을 받은 자여, 진실된 우정을 얻은 자여, 따뜻한 사랑을 얻은 자여.
다함께 모여 환희의 노래를 부르자.
한 영혼이라도 자기의 것이라 할 수 있는 사람은 환호하라.
그러나 그것을 이루지 못한 자는 슬피 울며 이 결합으로부터 조용히 떠나가라.

(행진곡 풍의 오케스트라 음악이 연주된 후 테너 솔로가 노래한다)
기뻐하라. 태양들이 천국의 영광스런 계획을 따라 빛나는 창공을 가로지르며 날 듯,
형제여 그대들의 길을 달려라. 영웅이 환희에 차서 승리의 길을 달리듯.

(우주 천체의 별들의 화려한 움직임을 묘사하는 듯한 오케스트라 연주 후에 조용한 전주가 나온 후 합창으로 처음 가사를 반복한다)
이 세상의 모든 존재는 자연의 품속에서 기쁨을 마셔라.선인이나 악인이나 환희의 장미 핀 오솔길을 걷는다.
자연은 우리에게 입맞춤과 포도주 그리고 죽음조차도빼앗아 갈 수 없는 친구를 주고
땅을 기는 벌레들조차도 삶에 대한 갈망을 주나니 천사케루빔은 하나님 앞에 서 있구나.
기뻐하라. 태양들이 천국의 영광스런 계획을 따라 빛나는 창공을 가로지르며 날 듯,
형제여 그대들의 길을 달려라. 영웅이 환희에 차서 승리의 길을 달리듯.

(웅장한 합창으로 거룩하고 장엄하게 진리를 선포한다)
만민들이여 서로 포옹하라! 입맞춤을 전 세계에 퍼뜨려라.
형제여 별의 저 편에는 사랑하는 아버지 주님께서 계시니.
억만의 사람들이여 엎드려 무릎을 꿇지 않겠는가?
온 세계 만민이여, 창조주가 계심을 믿지 않겠는가?별들이 지는 곳에 주님은 계신다.

(힘차게 환희의 선율을 변형하여 앞의 가사들을 반복하며 합창한 후 다시 독창자들이 노래하고
다시 합창이 온 세상이 하나가 되는 메시지를 선포하며 모두가 하나님을 열정적으로 찬양한다)
모든 사람들아, 서로 포옹하라. 온 세상을 위한 입맞춤.형제여, 별들이 수놓아져 있는 하늘 저편에는 사랑의 아버지가 반드시 계신다.
이 포옹을 받으라. 온 세상을 향한 입맞춤을.
환희여, 아름다운 신의 광채여,
천국의 딸들이여.
환희여, 신의 찬란한 아름다움이여!

 

이보다 더 강렬한 감사와 환희의 찬양이 있겠는가? “오오 신이여, 마지막으로 단 하루라도 좋으니, 순수한 환희의 날을 나에게 내려주시옵소서.”
라고 유서를 쓰며 부르짖었던 베토벤에게 하나님께서는 넘치는 환희의 날들을 주셨으며, 이처럼 환희로 충만한 곡을 작곡하게 하신 것이다.
교향곡 9번 <합창>은 1824년 5월 7일 빈의 케른트네르 극장에서 베토벤의 총 감독 하에 그의 다른 작품 [장엄 미사곡]과 함께 초연되었다.
이 곡은 베토벤 스스로의 지휘로 초연되었지만, 실제로는 움파루프란 지휘자가 관객이 안 보이는 곳에서 따로 지휘했다고 한다.
연주가끝나고 등을 지고 서 있던 베토벤이 청중들의 열광적인 박수소리를 듣지 못하자, 알토 독창자인 웅가르가 팔을 잡아 알려 주었다고 한다.
그가 돌아다보고 답례했을 때, 청중들은 감격하여 눈물을 흘리며 더욱 열렬한 갈채를 보냈다.
사람들은 그들의 감동과 열광을 알리기 위해 일제히 일어나서 손을 흔들고 박수를 치면서 모자를 날리고 손수건을 흔들었으며,
5회 이상 계속된 답례에도 환호는 그치지 않았다. 빈의 관습으로는 3회의 박수가 왕족에 대한 예의였으므로,
지나친 열광에 대해 동석했던 경관들이 중단시켜야 할 정도였다고 한다.

그 후 베토벤은 죽기 직전까지 현악 사중주곡을 더 작곡했으며, 제10교향곡과 <바흐의 이름에 의한 서곡>,
구약의 <사울과 다윗 이야기> 등의 종교음악을 구상하고 있었다. 마지막까지 그를 돌본 의사는 그가 즐겁고 쾌활해 보였다고 한다.
청각장애 뿐 아니라 평생 눈도 안 좋고 장도 안 좋아서 엄청난 고통을 당하며 세 번의 수술을 거듭하고 각혈을 하여 기력이 쇠하였어도,
오히려 그를 방문한 시인, 음악가들 에게 원기를 불어넣어 주었다고 한다. 1827년 3월 26일 그는 자신의 소명을 완수하고 하나님께로 갔다.
베토벤의 장례식은 추모인파로 인산인해를 이루었고, 모든 학교가 애도의 뜻으로 휴교를 했으며, 군중들을 정리하기 위해 군대가 출동했다.
귀족, 관리, 친구, 학생 모든 계층의 사람들이 모여 그의 음악과 삶을 기리며 애도했다. 일생의 절반을 청각장애자로 살다 간 음악가.
베토벤은 가난이나, 상처나, 학대나, 질병이나, 외로움이나 그 어떤 괴로움에도 굴하지 않고 아름다운 음악과 하나님 아버지의
사랑의 메시지를 세상 사람들에게 나누어 주고 간 사람이었다.
 

신성으로 가까이 나아가 그 광채를 인류 위에 뿌려 주는 것 보다 아름다운 일은 없다 – 베토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