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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희는 이렇게 기도하라 VIII

너희는 이렇게 기도하라 VII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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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기도문 새로보기

3장. 하나님나라의 관점에서 본 주기도문

 

6. 우리가 우리에게 죄지은 자를 사하여 준 것 같이 우리 죄를 사하여 주시옵고

 

1) “죄 지은”의 의미는?

 

우리가 우리에게 죄 지은 자를 사하여 준 것 같이 우리 죄를 사하여 주시옵고 마6:12

 

우리가 우리에게 죄 지은 모든 사람을 용서하오니 우리 죄도 사하여 주시옵고 우리를 시험에 들게 하지 마시옵소서 하라 눅11:4

 

주기도문의 이 구절이 마태복음과 누가복음에서 서로 다르게 표현된 것처럼 보이지만, 두 본문의 의미는 동일하다.
그리고 개역개정판 한글성경에서는 두 복음서 모두에서 죄라고 표현하였지만, 실제로 많은 번역본은 죄 대신에 빚(debt)으로 표현하고 있다.
빚의 개념은 잘못과 죄를 가리키는 비유적 표현일 것이다.

또 우리가 우리의 빚진 자들을 사하여 준 것 같이 당신이 우리에게 우리의 빚들을 사하여 주옵시고
(KJV, NKJV, NIV, ESV, NASB, RSV, ASV, YNG, DBY, WEB, HNV)

 

2) 우리에게 죄지은 자를 사함과 우리 죄를 사함과의 관계는?

주기도문의 이 구절을 해석하는데 있어서 가장 큰 난점은, 하나님께서 우리의 죄를 사해 주시는 것과 우리가 다른 사람의 죄를 용서해 주는 것
사이에 어떤 관계가 있느냐에 대한 이해라고 할 수 있다. 우리가 하나님나라의 비밀을 제대로 깨닫지 못하고 이 구절을 읽으면
두 가지 잘못을 범하게 된다. 첫 번째는 우리 죄가 아직 사함을 받지 못했기 때문에 우리 죄를 사하여 달라는 것으로 이해하게 된다.
두 번째는 “우리가 우리에게 죄지은 자들을 사하여 준 것 같이”를 조건절로 생각해서 먼저 우리가 다른 사람의 죄를 용서해 주면,
그 결과로 하나님께서도 우리의 죄를 사해 주실 수 있다고 생각하게 된다. 그렇게 해석할 때 혼란이 온다.
왜냐하면 반대로 생각하면 우리가 다른 사람의 죄를 용서해 주지 않으면 하나님께서도 우리의 죄를 용서해 주시지 않는 것으로 되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렇게 오해할 수 있도록 예수님께서는 주기도문 말미에 다시 그렇게 강조하셨다(마6:14-15).

만약 이 말씀을 그대로 받아들인다면 이 내용은 “우리가 하나님의 법을 지키지 않으면 저주와 죽음 가운데 놓이게 된다.”는 과거의 율법적인 기도와
다르지 않게 된다. 과연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가르쳐 주신 기도가 그런 뜻을 지니고 있는 것일까?
내가 다른 사람의 죄를 용서하지 않으면 하나님께서 나를 용서하실 수 없다는 것인데 과연 그런가?
하나님께서 우리의 죄를 용서해 주시는 것이 우리의 태도와 행동에 달려 있다는 것인가?
만약 우리가 다른 사람을 우리의 의지로 용서할 수 있다면 하나님께 드리는 기도가 필요한 것인가?
이런 생각을 바탕으로 해석하면 우리 자신이 하나님의 뜻을 이루기 위한 기준이 되게 된다.
주기도문의 앞 구절들을 생각할 때 예수님께서는 결코 그런 의미로 이 기도를 가르쳐 주신 것은 아닐 것이다.
당시의 율법적이고 행위보상적인 유대인의 기도와는 다른 기도를 가르쳐 주시기 위해
“너희는 이렇게 기도하라”라고 하셨던 예수님의 말씀을 기억해 보라.

이 구절을 해석하기 위해서 분명히 알아야 할 사실은 주기도문은 이미 하나님나라에 거하는 하나님의 자녀된 자에게 주시는 가르침이라는 것이다.
다른 말로 죄 용서함을 받기 위한 기도가 아니라, 이미 죄사함을 받은 자가 이 땅에 주의 뜻을 이루며 살아가는 동안에
죄사함을 받는 것에 대해서 말씀하고있는 것이다.

 

3) 올바른 해석을 위한 기초들

우선 한글 주기도문에서 조건절처럼 보이는 마태복음의 “사하여 준 것 같이”를 생각해 보자.
“… 사하여 준 것 같이”에 사용된 헬라어 완료형은 영어와는달리 시제를 나타내는 것이 아니라 동시성의 완료를 나타낸다.
따라서 앞 구절이 조건절이 되는 것이 아니다. 다른 말로 우리에게 죄 지은 다른 사람의 죄를 사할 때 비로소 그 결과로
우리의 죄가 사함을 받는다는 뜻이 아니라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예수님을 통하여 우리의 죄를 이미 사하여 주셨기 때문에
우리도 다른 사람(우리에게 죄 지은 자)을 용서할 수 있게 된 것이다.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 말미암아 죄사함을 받았기 때문에 비로소 죄의 저주로부터 자유함을 얻었고,
내 안에 계신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에게 죄 지은 자를 사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이 기도가 정말 중요하기 때문에, 그리고 정말 그렇게 살아야 한다는 것을 강조하시기 위해서 예수님께서는 주기도문이 끝난 뒤에
다시 한 번 다른 사람을 용서하는 것에 대해서 말씀하셨고, 주기도문에서 언급한 바와 같이 살지 않는다면
우리는 하나님나라의 법 밖에 있게 된다는 것을 알려 주셨다.

 

너희가 사람의 잘못을 용서하면 너희 하늘 아버지께서도 너희 잘못을 용서하시려니와

너희가 사람의 잘못을 용서하지 아니하면 너희 아버지께서도 너희 잘못을 용서하지 아니하시리라 마6:14-15

 

그리고 베드로가 죄의 용서에 대해서 물었을 때, 하나님나라의 비유를 들어서 그 부분을 보다 명확하게 설명해 주셨다.

 

그 때에 베드로가 나아와 이르되 주여 형제가 내게 죄를 범하면 몇 번이나 용서하여 주리이까 일곱 번까지 하오리이까
예수께서 이르시되 네게 이르노니 일곱 번뿐 아니라 일곱 번을 일흔 번까지라도 할지니라 그러므로 천국은 그 종들과 결산하려 하던 어떤 임금과 같으니 결산할 때에 만 달란트 빚진 자 하나를 데려오매 갚을 것이 없는지라
주인이 명하여 그 몸과 아내와 자식들과 모든 소유를 다 팔아 갚게 하라 하니 그 종이 엎드려 절하며 이르되 내게 참으소서 다 갚으리이다 하거늘 그 종의 주인이 불쌍히 여겨 놓아 보내며 그 빚을 탕감하여 주었더니
그 종이 나가서 자기에게 백 데나리온 빚진 동료 한 사람을 만나 붙들어 목을 잡고 이르되 빚을 갚으라 하매그 동료가 엎드려 간구하여 이르되 나에게 참아 주소서 갚으리이다 하되 허락하지 아니하고
이에 가서 그가 빚을 갚도록 옥에 가두거늘 그 동료들이 그것을 보고 몹시 딱하게 여겨 주인에게 가서 그 일을 다 알리니 이에 주인이 그를 불러다가 말하되
악한 종아 네가 빌기에 내가 네 빚을 전부 탕감하여 주었거늘 내가 너를 불쌍히 여김과 같이너도 네 동료를 불쌍히 여김이 마땅하지 아니하냐 하고 주인이 노하여
그 빚을 다 갚도록 그를 옥졸들에게 넘기니라 너희가 각각 마음으로부터 형제를 용서하지 아니하면 나의 하늘 아버지께서도 너희에게 이와 같이 하시리라 마18:21-35

 

위의 말씀은 마태복음 6장 14-15절의 말씀을 보다 구체적으로 설명하신 내용이다. 한마디로 일만 달란트를 탕감받은 자가 자신에게
백 데나리온 빚진 자를 탕감해 주지 않는다면, 그 자신의 빚에 대한 탕감은 무효라는 것이다.
우리가 이 땅의 사고방식으로 이것을 생각해 보면 도무지 이해가 되지 않는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우리를 용서하시기로 결정하신 일을 우리의 태도에 따라 되돌이키시겠다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이 세상에서도 일사부재리의 원칙이 적용되는데, 전지전능하신 하나님께서 한번 용서해 주신 것을 번복하신다면 이것은 우리가 그동안 믿었던
무조건적인 용서가 아니라 조건적인 용서가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그것이 아니라면
우리에 대한 하나님의 용서가 우리의 태도에 달려있다는 예수님의 말씀을 우리는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가?

그것은 바로 하나님께서 이미 용서하셨기 때문에 정말로 용서받았다면 새로운 피조물로서 하나님의 형상(본성)을 나타내어야 한다는 것이다.
용서의 기준은 다른 사람이 나에게 죄지은(빚을 진) 정도가 아니라 하나님께서 나의 죄를 탕감해 준 정도이며,
또한 용서는 우리가 흔히 겪고 있는 감정의 문제가 아니라 하나님나라의 법의 문제라고 명확히 선포하신 것이다.
또한 이것은 하나님나라의 법을 알려 주는 새언약이 우리 스스로 지키고 행해야 하는 것이 아니라,
내 안에 계신 예수님께서 이루시는 약속이라는것을 다시 한 번 보여 준다.

이미 하나님께서 우리의 엄청난(일만 달란트) 죄를 용서하시고 탕감해 주셨음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주의 뜻을 이루지 않는다면(백 데나리온의 빚을 진 다른 사람을 용서하지 않는다면) 우리는 아직도 하나님의 용서를
진정으로 받아들이지 못하는 자임을 자인하는 것이며, 동시에 우리의 죄가 하나님으로부터 용서받을 수 없다는 것이다.
생각해 보라. 하나님의 본성은 사랑이시다. 사랑은 바로 용서와 은혜이다. 하나님의 용서를 받았다고 하면서
그 하나님의 본성이 나타나지 않는다면 그것은 그 용서를 제대로 받아들인 것이 아닐 것이다.
이 말씀을 하신 것은 다른 사람의 죄를 사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을 이루기 위한 조건이 아니라,
이미 이루어진 죄사함 가운데서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삶을 살아야 한다는 것을 말씀하시기 위해서이다.
하나님의 용서를 받았다는 것은 하나님의 자녀가 되어 자신 안에 예수 그리스도께서 계신 것이기 때문에,
그 하나님의 형상을 나타내는 삶을 살지 못할 때는 참 용서가 없다는 것이다. 참 용서가 없다는 것을 반대로 말하면,
자신이 진정으로 구원받지 못했으며 하나님나라의 자녀가 되지 못했다는 것이다. 다른 말로 하나님나라에서의 자녀의 삶을 박탈당한다는 것이다.

이제 하나님의 자녀의 관점에서(일만 달란트를 탕감받은 자로서) “우리가 우리에게 죄 지은 자를 사하여 준 것 같이 우리 죄를 사하여 주시옵고”에
대해서 알아보자. 우리가 하나님께 지은 죄가 얼마나 큰 지 그 죗값이 일만 달란트에 달한다.
그런데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로 인하여 그 죗값을 탕감받았다는 것은 믿지만,
실제로 그것이 얼마나 큰 하나님의 은총인지를 경험하지 못하는 경우가 너무나 많다.
그렇다면 내 죄가 사함 받았다(옛사람에서 새사람이 되었다)는 것을 어떻게 증명할 수 있는가?
그것은 바로 우리가 우리에게 죄지은 사람을 용서해 주는 것을 통해서 알 수 있다.
하나님의자녀가 된 우리가 우리에게 죄지은 자를 사하여 주는 것을 통하여,
우리는 우리의 죄가 사함 받은(옛사람에서 새사람이 되었다는) 것을 실제적으로 체험하게 되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예수님께서 그렇게 말씀하신 이유이다.

이 구절을 보다 정확하게 해석하기 위해서 몇 가지 측면에서 살펴보자. 첫 번째는 행위보상적인 사고방식에서 벗어나는 것이다.
그것은 바로 하나님께서 “… 해 주시면, 나도 그렇게 하겠습니다.”라는 사고방식이다.
이 사고방식은 어떤 목적을 이루기 위해서는 어떤 조건을 달성해야 한다는 사고방식이다.
그러나 하나님나라의 사고방식은 “하나님께서 이미 해 주셨기 때문에, 나도 주 안에서 그렇게 할 수 있습니다.”의 사고방식이다.
이것은 앞 구절인 마태복음 6장 10절의 “뜻이 하늘에서 이루어진 것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이다”와 같은 이치이다.
이러한 사실은 주기도문을 배운 제자들이 그 말씀을 어떻게 적용했는지를 통해서도 더 잘 알 수 있다.

 

서로 친절하게 하며 불쌍히 여기며 서로 용서하기를 하나님이 그리스도 안에서 너희를 용서하심과 같이 하라 엡4:32

 

누가 누구에게 불만이 있거든 서로 용납하여 피차 용서하되 주께서 너희를 용서하신 것 같이 너희도 그리하고 골3:13

 

두 번째는 우리의 현실적이고 실제적인 경험을 통해서 우리 안에 있는 본질을 경험하게 된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 기름부으심의 비밀도 이와 같다. 하나님께서 우리 안에 계시기 때문에 우리 안에 이미 기름부으심이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그 기름부으심을 경험하지 못한다.
그러나 우리가 주께서 주시는 부담감을 가지고 주의 뜻에 순종할 때, 그 결과로 내 안에 있는 기름부으심을 경험하게 되는 것이다.

이와 마찬가지로 “우리가 우리에게 죄지은 자를 사하는 것처럼”은 우리의 죄가 사함을 받지 못했지만
우리가 다른 사람의 죄를 사하면 그 조건으로 우리의 죄가 사함 받는다는 뜻이 아니라는 것이다.
우리는 이미 하나님의 자녀로 우리의 원죄를 사함 받았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가 다른 사람이 지은 죄를 사해줄 수 있는 것이다.

 

하나님께로부터 난 자마다 죄를 짓지 아니하나니 이는 하나님의 씨가 그의 속에 거함이요

그도 범죄하지 못하는 것은 하나님께로부터 났음이라 요일3:9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매일 주의 뜻대로 살지 못하는 죄를 범하고 있다.
다른 말로 우리는 주의 뜻대로 살아야 함에도 불구하고, 우리의 마음을 새롭게 하지 않고 영적으로 깨어 있지 않으면
육체의 욕심을 따라 썩어져 가는 구습을 좇을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만일 우리가 죄가 없다고 말하면 스스로 속이고 또 진리가 우리 속에 있지 아니할 것이요

만일 우리가 우리 죄를 자백하면 그는 미쁘시고 의로우사 우리 죄를 사하시며 우리를 모든 불의에서 깨끗하게 하실 것이요

만일 우리가 범죄하지 아니하였다 하면 하나님을 거짓말하는 이로 만드는 것이니

또한 그의 말씀이 우리 속에 있지 아니하니라 요일1:8-10

 

따라서 주께서 내 안에 계심으로 인하여 내가 다른 사람의 죄를 용서한 것처럼,
나도 매일 짓는 죄를 내 안에 계신 주님으로 인하여 사함을 받게 해 달라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가르쳐 주신 기도의 핵심이다.
타락한 우리는 죄성을 지니고 마귀의 본성을 나타내는 존재였지만,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을 때 새로운 피조물로서
더 이상 본질적으로 죄를 지을 수 없는 존재일 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본성을 나타내는 존재가 되었지만,
현실적인 삶에서는 여전히 우리의 마음이 세상에 묶일 때가 많고 우리의 육신은 하나님께서 원치 않는 죄를지을 때가 많다.
바로 예수님께서 내 안에 계심으로인하여 내가 다른 사람의 죄를 사하여 준 것 같이,
우리 자신의 죄도 내 안에 계시는 예수님으로 인하여 죄사함을 받게 해 달라는 뜻이다.
이것이 바로예수님께서 가르쳐주신 죄사함의 원리이며, 또한 우리가 매일 다른 사람의 죄를 용서하는 것같이 내죄를 용서함을 받아야 한다.
그래야 항상 주의 영광을 드러내며 주의 뜻을 이루어갈 수 있게 된다.

새롭게 변화된 본질(그리스도 안의 새로운 피조물)에 기초하여 다른 사람에 대한 나의 태도를 바꿀 때,
첫 번째로는 내 본질이 무엇인지를 알 뿐만 아니라, 두 번째로는 나의 현실적 삶도 본질에 기초하여 살 수 있게 된다는 것이다.
다른 말로 우리는 이러한 죄사함을 통해서 하나님 아버지의 크신 은혜가 무엇인지와,
동시에 내가 이미 구원을 받았지만 여전히 매일 성화되어가야 할 존재로서 하나님 앞으로 나와 우리 육신을 깨끗케 해야 한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우리는 하나님의 크신 사죄의 은총을 체험하면 할수록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의 자녀의 특권을 누리게 된다.

세 번째로는 내 죄를 사해 달라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죄를 사해 달라는 것이다. 우리는 이 구절에 분명히 우리의 죄를 사해 달라고 읽지만,
그 적용은 자신의 죄를 사해 달라는 것으로 받아들인다. 그만큼 우리가 자기중심적이고 개인주의적으로 말씀을 적용하고 있다.
다시 한 번 생각해 보라. 주기도문은 나를 위한 기도가 아니라 주의 뜻을 이루기 위해 주님께서 우리에게 가르쳐 주신 기도이다.
“우리 죄를 사하여 주시옵고”라는 것은 하나 되지 못하는 우리 죄를 말하는 것이며, 주의 지체로서 온전히 각자의 위치에 서지 못하는 죄를 의미한다.
즉, 자신의 탐욕을 채우고 서로가 높은 자리를 차지하고자 하는 우리의 죄를 사하여 달라는 것이다.

결론적으로 볼 때 “우리가 우리에게 죄지은 자를 사하여 준 것 같이 우리 죄를 사하여 주시옵고”라는 구절은
본질적으로 이 세상에 속하지 않은 하나님의 자녀(이미 구원받은 자녀)가 현실적으로 이 세상에서 살아가는데 있어 가장 중요한
“회개와 용서”에 대해서 가르치신 것이다. 우리 삶의 모든 문제는 궁극적으로 죄의 문제이며,
그것은 우리가 다른 사람에게 행한 죄와 다른 사람이 우리에게 행한 죄이다.
따라서 우리가 이 세상으로부터, 흑암의 권세를 지닌 마귀로부터 자유를 얻게 하는 가장 중요한 핵심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다른 사람이 나에게 행한 것에 대한 용서와 내가 다른 사람에 대해서 행한 것에 대한 회개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