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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희는 이렇게 기도하라 VII

너희는 이렇게 기도하라 VI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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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기도문 새로보기

3장. 하나님나라의 관점에서 본 주기도문

 

5. 오늘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시옵고

 

1) “지금 여기”에 있는 우리를 위한 기도

앞서 전반부의 네 가지 기도가 하나님께 대한 것이라면, 후반부의 세 가지 기도는 “지금 여기”에 살고 있는 “우리”를 위한 기도이다.
“지금 여기”라고 말하는 것은 비록 하나님나라가 임했고 우리가 하나님나라의 자녀이며 하나님의 유업을 이어받았지만,
여전히 흑암의 권세가 영향력을 미치고 하나님을 믿지 않는 자들과 함께 하며 세상적인 유업을 이루고자 하는 그들과 부딪히는 것이
이 땅에서의 현재적삶이기 때문이다. 또한 “우리”라는 것은 전반부가 하나님을 향한 기도였다면,
후반부는 하나님께서 우리를 통하여 이 땅에 주의 뜻을 이루기 위한 기도를 의미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주님께서는 기도의 전반부에 하나님 아버지의 이름의 거룩하심과 나라의 임하심과 뜻이 하늘에서 이루어진 것과
땅에서의 성취를 위한 기도를 알려 주셨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님께서는 후반부에 일용할 양식과 죄 용서와 시험과 악으로부터의
해방을 위한 기도를 우리에게 가르쳐 주셨다. 더욱이 이 기도는 따로 분리된 것이 아니라 “그리고”로 서로 연결되어 있어
그 중 하나라도 따로 떼어서 생각할 수 없다.

이미 언급한 바와 같이 예수님께서 가르치신 주기도문의 대상은 이미 예수 그리스도의 죽으심에 연합함으로써 죄와 율법과 세상에 대해서 죽고,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하심에 연합된 자로서, 이미 하나님의 의로서 새로운 피조물이 된 자이다.

 

내가 율법으로 말미암아 율법에 대하여 죽었나니 이는 하나님에 대하여 살려 함이라 갈2:19

 

너희가 세례로 그리스도와 함께 장사되고 또 죽은 자들 가운데서 그를 일으키신 하나님의 역사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그 안에서 함께 일으키심을 받았느니라

또 범죄와 육체의 무할 례로 죽었던 너희를 하나님이 그와 함께 살리시고 우리의 모든 죄를 사하시고 골2:12-13

 

따라서 언뜻 생각하기에는 이런 기도가 필요가 없는 것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님께서는 수많은 기도 중에 왜 이 세 가지를 우리에게 가르쳐 주셨을까?
이것을 제대로 이해하기 위해서는 현재적 하나님나라의 속성을 제대로 이해하여야 한다.

우선 하나님나라의 도래에 따른 그리스도인의 삶의 좌표와 새로운 삶을 확인해 보자.
우리의 주관적 관점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생명 안에 있는 관점, 이 땅의 현실적 관점이 아니라 이미 도래한
현재적 하나님나라의 복음적 관점(마6:10), 흑암의 권세 아래 사는 관점이 아니라 하나님 아들의 사랑의 나라에 사는 관점(골1:13),
열심인 신앙생활과 간절한 기도의 관점(세상적 멘탈리티)이 아니라 하나님의 영광의 임재와 그분의 뜻이 이루어지는 관점(킹덤 멘탈리티),
간절한 기독교 신자의 관점이 아니라 하나님 자녀의 관점(갈4:7), 육적이고 혼적인 관점이 아니라 영혼육의 하나됨의 관점,
율법적인(행위보상적인) 신앙적 태도가 아니라 주의 뜻을 이루어 가는 태도의 관점,
믿음이 하나님의 마음을 움직이거나 무엇인가를 받아내는 수단이라는 관점이 아니라 은혜로 이미 주어진 것을
이 땅에 실체로 이루고자 하는 통로로 보는 관점, 자녀는 승리하거나 온전하기 위해서 살아가는 존재라는 관점이 아니라
주의 뜻과 형상을 드러내기 위해서 살아가는 존재라는 관점,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미 이루신 말씀의 법적인 관점에 더하여
우리의 믿음을 통해서 현실에서 실체를 나타내어야 하는 관점 등은 현재적 하나님나라의 독특성을 나타내고 있다.

좀 더 구체적으로 설명하자면, 현재적 하나님나라의 실체를 다소 애매모호한 시간적 측면뿐만 아니라 차원적 측면(하늘나라와 이 땅)에서도
함께 고려해야 한다. 이미 많은 학자들이 현재적 하나님나라의 특징을 “already but not yet”이라고 규정하며,
이미 시작되었지만 아직 완전하지 않은 상태가 바로 현재적 하나님나라의 특징이며,
예수 그리스도께서 재림하실 때 그 완성이 이루어진다고 보고 있다.
많은 경우 이 현재적 하나님나라의 특징을 우리는 단순히 시간적 측면에서만 고려해 왔지만,
차원적 측면에서 함께 볼 때 그 놀라운 비밀을 보다 명확하게 이해할 수 있다고 본다.

하나님나라의 도래와 이 땅에서의 실현의 차이를 알아야 한다. 다른 말로 현재적 하나님나라는 이천년 전에 이미 도래하였지만,
그 도래에 따른 “now & here”의 현실적 성취는 아직이라는 것이다. 대개의 경우 이 현실적 성취는 예수님의 재림 후인 미래적 하나님나라로
돌리는 경향이 있는데, 그 이유는 기사와 표적의 희귀성에 기초한 경험적 판단에 따른 신학적 해석이라고 본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선포하신 하나님나라는 보혜사 성령님의 강림으로부터 시작되었지만,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이 땅은 여전히 흑암의 권세 아래 있으며 그들의 권세와 영향력은 여전하며,
거짓과 속임으로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나라의 복음을 듣지 못하게 하고 또한 육적인 삶으로 만족하게 만들고 있다.
따라서 하나님의 상속자요 유업을 이어받은 자녀들은 이 현실에 묶이지 말고 그의 나라와 의를 구해야 하며,
그 결과로 하나님의 영광의 임재 안에서 주의 말씀을 믿고 선포하고 행동함으로써 실제적 하나님나라를 자신의 삶속에서 실현시켜가야 한다.
다른 말로 하나님나라가 도래하지 않았기 때문에 그 도래를 구하는 것이 아니라,
이미 하나님나라가 도래했기 때문에 지금 여기에서 그 실체를 나타내기 위해서 구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주의 약속이 “now & here”에 온전히 나타나지 않기 때문에 현재적 하나님나라의 제한이 있는 것이다.
이 주장의 핵심은 예수님께서 이루신 약속의 말씀은 하나님의 자녀를 통하여 지금 여기에서 실체적으로 일어나고 있지만
완전치 않기 때문에 우리의 믿음과 선포를 통해서 더 나타내도록 해야 하는 것이지
(차원적인 측면에서 뜻이 하늘에서 이루어진 것 같이 땅에서 이루어지도록), “already but not yet”을 단지 시간적으로만 해석하여
말씀의 실체를 나타내는데 수동적인 태도를 취하거나 포기한 채 미래적 하나님나라에서 이루어진다라는 식으로 해석하는 것은
잘못된 것이라고 본다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킹덤 멘탈리티의 핵심 중 하나이다. 이것을 보다 정확하게 이해하기 위해서 법적 측면과 실제적 측면에 대한 비유를 들어 생각해 보자.
만약 어떤 사람이 집을 사기 위해서 대금을 치르고 쌍방 간 계약서에 서명을 했다면,
이제 실제 집은 보았거나 보지 않았거나 가보았거나 가보지 않았거나 법적으로는 이미 자신의 집이 된 것이다.
그러나 계약서를 가졌다 하더라도 실제 그 집에 들어가 사는 것은 다른 이야기이다.
그가 자신의 집에 들어가 살기 위해서는 이미 그 집에 살고 있는 자를 내보내야 한다.
이와 마찬가지로 현재적 하나님나라의 속성은 하나님나라가 이 땅에 임하였기 때문에 하늘에서 이루어진 것 같이(법적으로 이미 이루어졌음),
우리의 믿음을 통해서 이 땅에서 실제적으로 이루어야 한다(아직 현실적으로 이루지 못했음).
이것을 단지 시간적인 측면에서만의 “이미 그러나 아직”으로 보아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법적인 일을 이미 행하셨지만(뜻이 하늘에서 이루어진 것 같이), 우리는 땅에서 이 일을 이루어나가야 한다는 것이다
(땅에서 이루어지이다). 이 과정은 아직 완성되지 않았으며, 이 과정은 우리의 순종과 거룩, 말씀과 성령, 믿음과 선포를 통하여
더 나타나게 될 것이며,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 때까지 이 과정을 이루어가야 한다는 것이다.

이제 후반부의 세 가지 기도를 다시 생각해 보자. 하나님께서 모든 것을 이미 주셨는데 우리가 다시 일용할 양식과 죄 사함과 악에서
구함을 위해서 기도할 필요가 있는가? 당연히 그렇게 해야 한다.
이미 법적으로 주셨기 때문에 우리는 주어진 것을 믿음으로 취하여 이 땅에서 내 삶 속에서 이루어가야 하기 때문이다.

 

2) “오늘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시옵고”

우리가 일용할 양식을 달라고 구하는 것은 매일 먹을 양식이 부족하기 때문이다.
이 기도문을 제대로 이해하기 위해서 양식(헬, 알톤)의 의미를 제대로 파악해야 하며,
이 “양식”을 어떻게 해석하는가에 따라서 이 기도의 해석이 달라진다. “알톤”은 크게 두 가지 용법으로 사용되고 있는데,
좁은 의미로는 육신을 위해 먹는 빵을 나타내며, 넓은 의미로는 생명을 위한 양식을 지칭한다.
다른 말로 이 단어는 경우에 따라 매일 육신을 유지하기 위해서 먹는 일용할 양식으로 혹은 영적인 양식으로 해석된다.

많은 경우 이 구절을 생각할 때, 구약에 하나님께서 출애굽하여 광야의 삶을 사는 이스라엘 백성에게
하루하루의 생활에 필요한 일용할 양식인 만나를 공급하여 주신 것을 떠올리며 일용할 양식으로 본다.

 

그 때에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보라 내가 너희를 위하여 하늘에서 양식을 비 같이 내리리니

백성이 나가서 일용할 것을 날마다 거둘 것이라 이같이 하여 그들이 내 율법을 준행하나 아니하나 내가 시험하리라 출16:4

 

오멜로 되어 본즉 많이 거둔 자도 남음이 없고 적게 거둔 자도 부족함이 없이

각 사람은 먹을 만큼만 거두었더라 모세가 그들에게 이르기를 아무든지 아침까지 그것을 남겨두지 말라 하였으나

그들이 모세에게 순종하지 아니하고 더러는 아침까지 두었더니

벌레가 생기고 냄새가 난지라 모세가 그들에게 노하니라 출16:18-20

 

엿새 동안은 너희가 그것을 거두되 일곱째 날은 안식일인즉 그 날에는 없으리라 하였으나

일곱째 날에 백성 중 어떤 사람들이 거두러 나갔다가 얻지 못하니라 출16:26-27

 

그런데 그렇게 해석할 경우 이 말씀은 다음의 구절들과 서로 상치된다.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목숨을 위하여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몸을 위하여 무엇을 입을까 염려하지 말라

목숨이 음식보다 중하지 아니하며 몸이 의복보다 중하지 아니하냐 마6:25

 

이미 도래한 하나님나라의 관점에서 이 구절을 새롭게 보라.

 

오늘 있다가 내일 아궁이에 던져지는 들풀도 하나님이 이렇게 입히시거든 하물며 너희일까보냐
믿음이 작은 자들아 그러므로 염려하여 이르기를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입을까 하지 말라
이는 다 이방인들이 구하는 것이라 너희 하늘 아버지께서 이 모든 것이 너희에게 있어야 할 줄을 아시느니라
그런즉 너희는 먼저 그의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
마6:30-33

 

예수님께서는 육신의 삶을 유지하기 위한 일용할 양식에 대해서 염려하지 말라고 하신다.
그리고 이미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무엇이 필요한지도 알고 계신다고 말씀하신다.
그렇다면 그의 나라와 의를 구한 자에게 있어서 일용할 양식이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
우리는 주님의 말씀을 통해서 그것이 무엇인지를 알 수 있다.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기록되었으되 사람이 떡으로만 살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입으로부터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살 것이라 하였느니라 하시니 마4:4

 

또한 예수님께서 수가성 여인을 만난 다음에 제자들에게 양식에 대해서 말씀하셨다.

 

이르시되 내게는 너희가 알지 못하는 먹을 양식이 있느니라 제자들이 서로 말하되 누가 잡수실 것을 갖다 드렸는가 하니 예수께서 이르시되

나의 양식은 나를 보내신 이의 뜻을 행하며 그의 일을 온전히 이루는 이것이니라 요4:32-34

 

예수님께서는 여러분이 먹는 양식은 바로 보내신 이의 뜻을 행하고, 그 일을 온전히 이루는 것이라고 언급하셨다.
그렇다면 무엇이 아버지의 뜻을 행하고, 그 일을 온전히 이룰 수 있는 것인가? 그것은 바로 말씀이다.
하나님께서는 말씀으로 천지만물을 지으셨고, 오늘도 말씀으로 천지만물을 붙들고 계시며,
왜곡되고 변질되고 타락한 세상을 바꾸는 것도 말씀이라고 하셨다.

한 걸음 더 나아가서 예수님께서는 당신 자신이 양식 즉 생명의 떡이라고 하셨고, 자신 안에 거하는 자는 모든 양식이 풍성하다고 말씀하신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나는 생명의 떡이니 내게 오는 자는 결코 주리지 아니할 터이요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라 요6:35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라 그가 내 안에, 내가 그 안에 거하면 사람이 열매를 많이 맺나니

나를 떠나서는 너희가 아무 것도 할 수 없음이라요15:5

 

너희가 내 안에 거하고 내 말이 너희 안에 거하면 무엇이든지 원하는 대로 구하라 그리하면 이루리라요15:7

 

따라서 양식은 육신을 보존하기 위해서 먹을 양식을 의미하는 것보다는 오늘 필수적으로 이루어야 할 하나님의 뜻을 이루기 위한
생명의 양식을 의미한다. 그것은 바로 말씀이며 우리가 이미 하늘나라에서 법적으로 이루어진 주의 말씀을 먹고 살 때,
우리는 이 땅에 그 말씀에 따른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것이다.
우리가 오늘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이 양식(말씀)은 결국 먹을 음식뿐만 아니라
의복, 주택, 건강, 더 나아가 하나님의 사랑을 전하는 것도 포함하고 있다.

한편 “일용할”은 헬라어로 “에피우시온”으로, 이 단어는 아직도 일치된 견해가 없을 만큼 해석하기 어려운 단어이다.
이 단어는 “존재를 위해서 필수적인”, “오늘을 위한”, “다음날을 위한” 또는 “미래를 위한” 등의 다양한 뜻으로 해석된다.
어느 한 정의에만 국한될 것이 아니라 이 뜻을 통합해서 이해하는 것이 보다 포괄적이고 정확한 의미를 나타낸다.
우리는 매일 하나님의 뜻을 이 땅에 이루어가는 존재로 새롭게 지음을 받았다.
따라서 “일용할”의 뜻은 “앞으로 살아가야 할 하루 동안 필수적인”의 의미를 지닌다고 볼 수 있다.
그 말은 “우리가 기도하는 그 시간부터 앞으로 보낼 하루 동안 우리 자신의 뜻을 이루는 삶을 살지 않고,
주의 뜻을 이루는 삶을 살 수 있는”이라는 뜻을 지닌다.

따라서 일용할 양식은 매일 살아가면서 주의 뜻을 이루기에 합당한 말씀을 달라는 것이다.
그것이 바로 자녀의 삶에 있어 모든 것들의 근원적인 양식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매일 매일 새로운 신선한 음식을 먹어야 한다.
그 말은 매일 매일 주님께서 주시는 말씀으로 살아야 한다는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그분 앞으로 나아갈 때 매일 매일 그 날을 위한 말씀을 주신다.
우리에게 성경의 말씀(logos)이 있지만 그 날을 위해 주님께서 주시는 말씀(rhema)이 있어야 한다.
우리는 이 말씀을 그 날에 이 땅에이룸으로써 허락하신 그 날을 보내는 것이다

 

3) 왜 일용할 양식이 필요할까?

이 문제에 답하기 전에 하나님께서 만약 일용할 양식이 아니라 일주일 먹을 양식, 한 달 먹을 양식을 주신다고 생각해 보라.
우리는 이 세상에 살면서 하나님의 뜻을 나타내는 존재이지만, 이 세상신인 마귀는 늘 환경을 통하여 우리의 마음이
하나님의 뜻을 이루기보다는 자신의 뜻(탐욕)을 이루도록 우리를 속이고 위협한다.
그 가운데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그렇게 되지 않도록 매일 주님 앞에 다시 나오기를 원하시고, 우리를 새롭게 하시기를 원하시고,
그 마귀를 멸할 새로운 계획과 전략을 주시기를 원하신다.

설령 우리가 어떤 때에 하나님의 양식을 먹지 못하고 또 주의 뜻대로 살지 못했을지라도 회개하게 하시고 매일 새롭게 다시 시작하기를 원하신다.
우리로 하여금 다시 돌아 올 수 없는 먼 길로 가지 않기를 원하신다. 매일 만나주기를 원하신다. 얼마나 자비로운 하나님이신가?
또한 매일 주님과 관계하며 주님을 의지할 때 우리를 먹여 살리는 것이 양식이 아니라, 그 양식을 주시는 하나님께서 바로 우리의 생명이시고,
우리를 이 땅에 자녀로 존재케 하시는 분이시라는 사실을 알려 주기를 원하신다.

 

여호와의 인자와 긍휼이 무궁하시므로 우리가 진멸되지 아니함이니이다

이것들이 아침마다 새로우니 주의 성실하심이 크시도소이다애3:22-23

 

우리는 말씀이 진리이고 하나님께서 말씀을 주신 것을 알기 때문에 말씀으로 살아가기를 원한다.
그래서 말씀공부를 신앙생활에 있어 가장 귀중한 것으로 여긴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말씀을 주신 이유는 그 말씀을 통해서
하나님을 만나기를 원하시며, 그분과 생명을 나누기를 원하시기 때문이다.
그런데 언제부터인지 우리는 살아계신 하나님을 만나기보다는 기록된 말씀을 가지고 살아가는 경우가 허다하다.

 

그 말씀이 너희 속에 거하지 아니하니 이는 그가 보내신 이를 믿지 아니함이라

너희가 성경에서 영생을 얻는 줄 생각하고 성경을 연구하거니와

이 성경이 곧 내게 대하여 증언하는 것이니라

그러나 너희가 영생을 얻기 위하여 내게 오기를 원하지 아니하는도다 요5:38-40

 

4) 일용할 양식은 매번 동일한 것인가?

우리는 일용할 양식이라면 똑같은 음식일거라고 생각한다. 구약에서는 만나와 메추라기로 40년 동안 먹었기 때문에 싫증을 내고
고기를 먹고 싶어 했다. 그러나 신약에 와서는 일용할 양식은 동일한 음식이 아니다.
우리는 매일 매일 새로운 그 날에 주시는 영혼의 양식을 먹게 된다. 새 날에 하나님께서는 새로운 말씀을 주셔서 주의 뜻을 이루기를 원하시고,
새로운 영토를 확장하기를 원하시고, 마귀를 물리치기를 원하신다.

우리가 성경 전부를 암기하고 있다고 해서 올바른 삶을 살게 되는 것은 아니다. 자신이 많은 말씀을 외우고 있다고 생각해 보라.
자신 안에 있는 풍성한 말씀으로 인하여 그 진리의 말씀만 의지하여 살아가게 될 것이다.
그렇게 될 때 정작 그 말씀을 통하여 역사하시는 살아계신 하나님을 의지하지는 않을 것이다.
우리는 그 날 그 날 그분이 나에게 주시는 말씀을 들어야 한다. 그것이 바로 레마이다. 우리는 그 레마를 듣고 그 레마를 이루는 삶을 살아야 한다.
우리가 자신의 능력이나 소유나 권력, 자신의 머리에 의지하지 않고, 주님께 의지하기 위해서 일용할 양식이 필요하다.
하나님께서는 말씀을 통해서 말씀이신 하나님을 만나도록 하기 위해서,
말씀을 통해서 하나님의 마음을 나누기 위해서 매일 일용할 양식을 주기를 원하신다.

 

5) 왜 나의 양식이 아니라 우리의 양식인가?

우리는 한 아버지를 둔 가족이며, 예수 그리스도와 한 형제이다. 또한 우리는 한 성령 안의 지체이며, 그리스도의 몸된 교회이기도 하다.
주기도문은 우리 아버지에 대한 그리고 우리를 위한 기도이지, 나의 아버지에 대한 그리고 나만을 위한 기도가 아니다.

“우리”의 일용할 양식은 나만이 다른 사람보다 뛰어나게 주의 뜻을 이루게 해 달라는 것이 아니다.
각자에게 주의 뜻을 이루게 하심으로 인하여 그리스도의 몸이 세워지기를 원한다는 뜻이다.
삼위일체 하나님께서 공동체를 이루신 것처럼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하나님의 자녀가 될 때 우리는 결코 혼자일 수는 없다.
그분이 하나가 되신 것처럼 우리도 하나가 되어야 한다. 즉, 하나님의 가족이 되어야 한다.
이 말은 우리는 자신을 위한 기도뿐만 아니라 하나님 가족 공동체를 위한 기도를 해야 한다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각자에게 주신 양식을 통해서 하나님의 가족이 온전히 세워지도록 해야 한다.

 

그에게서 온 몸이 각 마디를 통하여 도움을 받음으로 연결되고 결합되어

각 지체의 분량대로 역사하여 그 몸을 자라게 하며 사랑 안에서 스스로 세우느니라 엡4:16

 

6) 결론

우리의 현재 신앙의 수준은 “지금 그리고 여기”에서의 하나님의 관계(친밀함)의 정도 바로 그것이다.
어제 죽은 사람을 살렸다 할지라도 오늘의 신앙이 결코 어제의 신앙 수준으로 대치될 수 없는 것이다.
끊임없는 하나님과의 실제적인 관계 속에서 우리의 실존이 유지될 뿐이다. 그런데 많은 경우 자신이 과거에 금식을 얼마나 했는지,
어떤 놀라운 하나님의 역사를 경험했는지, 부흥회 때 얼마나 놀라운 은혜를 받았는지로 지금의 신앙을 평가하고자 한다.
이는 마치 지금은 처량한 신세이지만 과거에는 잘 나갔던 사람이라고 자랑하는 사람과 동일하다. 신앙은 현재적이다.
현재 삼위일체 하나님과의 관계가 바로 그 사람의 신앙수준이다. 따라서 우리는 날마다 일용한 양식을 먹어야 한다.
주신 그 말씀을 이땅에 실체로 나타냄으로써(우리를 통해서 이루어짐으로써) 하나님의 뜻을 이루어가는 삶을 살아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