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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킹덤빌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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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킹덤빌더다

 

 

 

 

안민신

  북미 KBS 3, 4, 5기 수료

 

 


2011년 겨울, 저녁 클래스를 마치고 돌아오는길에 같은 반 클래스메이트였던 젊은 남학생의 차가 뒤에서 제 차를 받는 작은 접촉 사고가 있었습니다. 다행이 큰 부상은 없었지만 마음속에선 하나님을 향한 원망이 절정에 달하는 순간이었습니다. 남편이 빌리 그래함 구제 재단인 <사마리아인의 지갑(Samaritan’s Purse)>에 취직이 되면서 웬만한 미국 사람들은 들어본 적 없는 노스 캐롤라이나(North Carolina) 주의 분(Boone)이라는 작은 타운으로 이사 와서 산 지 8년 째 되던 해였습니다.

컴퓨터 그래픽을 전공한 남편은 본인이 계획했던 캘리포니아 주의 굴지의 회사에 취직이 되었지만, 하나님의 갑작스런 인도하심에 순종하여 빌리 그래함 재단에 오게 되었습니다. 그 엄청난 순종의 결과로 얻게 된, 한국 마켓도 한국 교회도 어떠한 문화적인 혜택도 없는 외진 시골에서의 삶은 사람들의 눈에는 그저 실패자(Loser)의 모습일 수밖에 없었습니다. 가족이나 가까운 친구들이 방문했다가 돌아갈 때는 늘 우리 가족을 불쌍히 여기는 눈빛만이 남겨졌고, 어린 두 딸들은 떠나는 자동차 불빛이 사라질 때까지 창문가에 매달려 눈물을 훔치던 처절하게 외롭고 쓰라렸던 8년의 시간이었습니다.

곧 큰 도시로 옮겨질 줄 알았던 남편의 직장은 마음대로 되지 않았고, 결국 저는 이곳에서 살아남기 위한 방편으로 한국에서의 전공과 다른 회계(Accounting) 공부를 시작하게 되었습니다. 드디어 졸업을 한 학기 앞둔 겨울, 그렇게 심리적으로 상황적으로 또 경제적으로도 곤고할 대로 곤고해져 가던 즈음, 반갑지 않은 교통사고까지 찾아온 것이었습니다. 처음에는 별 통증이 없이 지나가더니 그로부터 6개월 뒤 교통사고 후유증으로 허리, 목, 팔 등 온몸이 신호를 보내오기 시작했고, 애틀랜타에 살고 있는 친지의 추천으로 알게 된 척추의사(Chiropractor) 김도영 집사님을 찾아가기 전까지는 제 인생은 컴컴한 터널 깊숙한 곳에 그렇게 널브러져 있었습니다.

치료를 받던 중, 제2기 북미주 『킹덤빌더스쿨(KBS)』이 열린다는 소식을 전해 듣게 되었고, 이미 등록이 끝났지만 우리의 사정을 듣고 당장 그 밤에 신청서를 들고 나를 만나러 와 주신 에스더 정 권사님과 데니얼 민 형제의 열정어린 모습은 아직도 눈앞에 생생하기만 합니다. 둘이 함께 참석하기를 원했지만 적지 않은 참가비에 재정적 부담을 느껴 남편이 먼저 KBS에 참석하게 되었습니다.

남편이 KBS에서 돌아온 후 우리의 삶에는 영적 돌파가 일어나기 시작했습니다. 남편은 자신이 이제 거지에서 왕자로 신분이 변했노라 하면서 일주일간 받은 은혜를 생생하게 전해주었습니다. 여느 수련회와는 달리 금방 사그라들것 같았던 남편의 회복은 시간이 지날수록 견고해져갔고, 그런 남편의 변화를 보며 그럼 나는 도대체 거지의 아내인지 왕자의 아내인지 혼란스럽기 시작했습니다. 그런 정체성의 혼란을 안고 그 다음 해 스쿨을 기대하며 1년간을 기도하며 기다렸습니다.

드디어 기대하고 고대하던 제3기 북미주 『킹덤빌더스쿨(KBS)』에 참석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기대와는 달리 저에게는 어떠한 특별한 경험도 치유도 없이 4박5일이 흘러갔는데, 한 가지 이상했던 건 기간 내내 강의 시간이나 기도시간, 예배 시간에 주체할 수 없는 양의 눈물이 흐르면서 회개하는 마음이 지속되었다는 것이었습니다. 지금껏 그렇게 이기적이고 삶의 모든 어려움들은 다 다른 사람들의 탓이었던 제 마음 속에, 나로 인해 고통 받았을 가족과 주변 사람들에 대한 아픈 마음이 올라오기 시작했습니다. 주체할 수 없는 양의 눈물, 콧물을 쏟아내고 그렇게 탈수가 된 몸을 이끌고 집으로 가던 차 안에서, 그 마음 그대로 주님께 드리며 기도하던 중 생각지도 못했던 한 장면이 제 마음속에 떠올랐습니다.

큰 딸이 4살 경에 제가 그 아이를 방구석에 몰아넣고 혼을 내고 있는 모습이었는데, 딸아이는 울면서 “엄마, 무서워!”라고 말하고 있었습니다. 그 순간 갑자기 그 아이가 딸이 아닌 바로 제 어릴 적 모습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전에도 가끔 그 날이 생각날 때가 있었지만 그때마다 죄책감에 마음 아파서 괴롭기만 했던 그 기억이 바로 그 순간 떠오르게 되었고, 그것이 딸아이의 상처가 아닌 바로 제 상처라는 것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그리고는 잠시 후 좀 전까지 가슴이 메도록 울고 있던 제가 큰 소리로 웃고 있는 것이었습니다. 그렇게 하나님께서는 제 깊은 슬픔을 희락으로 바꾸어주셨고, 그 길로 집에 돌아가서 딸아이를 앉혀놓고, 그 발 앞에 무릎을 꿇었습니다. 그리고 용서를 빌었습니다. 이번 KBS를 통해서 엄마가 왜 그렇게 반복적으로 넘어질 수밖에 없었는지 엄마의 상처를 알게 되었고, 하나님께서 치유해주셨음을 나누었습니다.

그렇게 제 인생에 그날(on that day)이 찾아온 후 우리 가정에 진정한 회복이 일어났고, 지금까지도 계속적으로 딸아이는 엄마의 변화를 체험하고, 인정하며, 스스로도 하나님께 더 가까이 나아가고 있습니다. 그뿐 아니라 KBS에서 내려온 지 이틀 뒤에 회사 인터뷰 합격 소식을 듣게 되었고, 지금은 남편이 일하는 빌리 그래함 구제 재단인 <사마리아인의 지갑(Samaritan’s Purse)> 재정부서에서 일하는 특권을 누리고 있습니다.

그날(On that day)에 하염없는 회개의 눈물만을 쏟게 하시고, 제 삶의 가장 큰 상처를 치유해주신 주님은 이사야서 6장의 말씀을 레마로 주셨고, 지난날의 부정했던 입술과 하나님 없이 내 힘과 노력으로 살아보려 했던 죄를 회개하게 하시고, 마침내는 “나를 보내소서”라는 고백을 하기에 까지 인도하셨습니다. KBS를 수료한 이후 지금까지 매년 KBS가 열릴 때마다 주변의 지인들을 보내고 권면하면서 제가 품는 소원과 바람은 단 한 가지, 제게 찾아와주신 그 주님을 더 많은 사람들이 만나고 온전한 치유와 회복이 이루어지기를 바라는 마음뿐 입니다.

 

주 여호와의 영이 내게 내리셨으니 이는 여호와께서 내게 기름을 부으사 가난한 자에게 아름다운 소식을 전하게 하려하심이라 나를 보내사 마음이 상한 자를 고치며 포로된 자에게 자유를 갇힌 자에게 놓임을 선포하며 사61:1

 

얼마 전 작은 딸아이의 돌잔치 동영상을 우연히 보게 되었는데, 너무도 낯설고 무섭기까지한 저의 옛 모습을 보면서 지금의 제가 있는 것은 그저 은혜임을 고백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늘 분노하고, 불평하고 누군가를 정죄하고, 사람들의 시선을 의식하며, 악에 받쳐 살았던 제 삶속에 하나님은 한줄기 빛으로 친히 찾아오신 것입니다. 40년간 거짓에 속아 살아왔던 제 삶이 억울하고 분하면서도, 지금이라도 저를 건져주신 주님의 은혜가 감사할 뿐입니다. 지난 10여년의 고립된 삶이 저주가 아닌 하나님의 축복이었음을 이제는 알게 되었고, 그 외로움의 시간이 없었더라면 저는 아직도 제 마음대로 살면서 하나님을 그저 작은 장식처럼 달고 다녔을 것입니다. 고난의 끝에 준비된 상상도 못했던 선물상자를 열어보며, 이제는 날마다 주님께 감사하는 삶을 살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