굿 윌 헌팅

굿 윌 헌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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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INGDOM LIFE &

힐링시네마
굿 윌 헌팅 Good Will Hunting

 

작가 이애경

 

세상은 상처를 입고 살아가는 사람들로 가득 차있다. 중요한 것은 상처를 부여잡고 힘들게 살아가고 있느냐 혹은 상처를 치유 받고 극복하며 살아가고 있느냐는 것이다. 상처를 곱씹으며 스스로를 자기 안에 가둔 채 살아가는 삶은 지옥 같지만, 한순간 치유의 빛이 임하면 어둠은 깨어지고 천국이 임한다. 자기가 쌓아놓은 성벽 안에서 고통스러워하던 빈민가의 천재 윌(맷 데이먼)이 세상에 나올 수 있도록 이끌어준 사람은 심리학자 숀(로빈 윌리엄스)이었다. 그는 ‘마음이 상한 자를 고치며 포로 된 자에게 자유를, 갇힌 자에게 놓임을 선포하며(사 61:1)’를 경험하게 해준 따뜻한 빛, 사랑의 복음이었다.

 


 

90년대 최고의 여배우 심은하가 연기력의 정점을 찍었던 드라마 <청춘의 덫>에 나왔던 대사를 기억하는가. “당신 부셔버릴 거야!”라는 그 처절한 대사를. 이대사를 듣자마자 누군가를 떠올리며 이를 가는 사람들도 있었고, 사람이 가질 수 있는 복수심의 끝을 본것 같은 서늘함에 몸을 떨던 사람들도 있었다. 어쨌건 이 말은 많은 사람들의 뇌리에 박혀 지금까지 회자될 정도로 강렬했다.

인생을 살아가는 원동력을 복수, 원망, 증오에서 끌어다 쓰는 사람들이 있다. 이들은 자신이 받은 고통과 상처를 남들에게 고스란히 되돌려주기 위해 이를 악물고 성공하려 애쓰거나 복수의 길을 간다. 반면 자기의 인생 자체를 망가질 대로 내버려두는 것으로 고통 받고 상처 난 인생에 대해 최대한의 복수를 하는경우도 있다. 자기의 인생을 꼬이게 만들어버린, 혹은자기의 고통을 외면하고 있는 신에 대한 철저한 복수인 셈이다. 윌 헌팅(맷 데이먼)도 그런 스무 살 청년이었다.

윌은 자기 또래의 천재들이 학구열을 불태우고 있는 MIT 공대에서 건물 청소를 하며 돈벌이를 하는 블루컬러 노동자다. 어느 각도에서 둘러보아도 껄렁해 보이고 한심해 보이는 친구들과 어울려 술집에 다니며 여자들에게 추근거리고, 심심치 않게 폭행에 휘말리며‘될 대로 되라’는 식으로 세상을 살아간다. 말 한마디 할 때마다 추임새처럼 자연스럽게 덧붙여지는 욕설과 사람들에 대한 반항은 그의 모난 성격을 그대로 드러낸다. 누가 보아도 그는 루저로 살아가는 인물이었다. 세계 최고의 수학자라고 불리는 제랄드 램보 교수가 학생들을 상대로 낸 문제를 그가 풀어내기전까지는 말이다.

학생들이 모두 돌아가고 텅 빈 복도를 청소하던 윌은강의실 바깥 칠판에 써놓은 문제를 한순간의 망설임도 없이 풀어내고 사라진다. 다음날 학교는 이 문제를 풀은 천재수학자에 대한 관심으로 떠들썩해지지만 학생이 아닌 그는 당연히 강의실에 등장하지 않는다. 얼굴 없는 천재의 출현에 램보 교수는 실망하지만 그가 다음 문제를 풀어줄 것을 기대한 램보 교수는 다음 문제를 칠판에 써놓는다. 윌은 숨바꼭질하듯 문제를 풀고 또 다시 숨어버린다. 엄청난 윌의 천재성에 매료된 램보 교수는 그를 찾아 온 학교를 뒤지기 시작한다.

 

수재들이 모인 MIT에서 발견된천재 청소부

영화의 무대는 보스턴이다. 전 세계의 수재들이 모인 대학촌 도시인 보스턴 남부에는 의외로 빈민가가 자리 잡고 있다. 그리고 세계 두뇌들의 집합소로 일컬어지는 MIT에서 발견된 수학 천재는 아이러니하게 학생이 아닌 청소부다. 영화는 도입부터 극명하게 대비되는 환경을 설치해놓고 그 두 조건을 엇갈려 만족시키는, 즉 ‘보스턴 빈민가의 천재 윌’이라는 주인공을 통해 시작부터 강렬한 질문을 관객들에게 던진다. 가난과 부유함, 천한 것과 귀한 것, 싫은것과 좋은 것, 나아가 악과 선은과연 무엇인가에 관한 질문을 말이다.

그 질문은 윌을 찾기 위해 청소용역업체를 찾아온 램보 교수가 자기를‘수학 박사’라고 소개하자용역직원이 자신을 가리키며 ‘나는 청소학 박사’라고 비아냥거리는 장면으로 이어진다. 이것은 우리가 존경하고 가치를 높게 여긴다는 것은 무엇인지, 그 기준은 무엇인지, 우리가 직접 심판자가 되어 좋고 싫은 것을 판단하는 것은 과연 옳은 것인지 등에 관한 질문이다. 즉 선과 악에 대해 스스로 판단하고자 선악과를 따먹어버린 아담과 이브처럼 그들의 자녀인 우리들 또한 스스로 판단의 칼을쥐고 세상을 바라보고 있는 것은 아닌지를 생각해보게끔 만드는 것이다. 광야를 떠돌던 이스라엘 백성이 약속의 땅인 가나안 땅으로 들어가기 전에 하나님은 갈렙과 여호수아, 그리고 선악을 분별하지 못하던 자녀들을 제외한 모든사람은 그곳에 들어가지 못할 것이라고 말씀하셨다(신 1:39). 좋고싫음, 선과 악, 귀하고 귀하지 않은 것을 우리의 생각으로 판단하는 것이 얼마나 어리석고 하나님의 뜻을 거스르는 것임을 일깨워주고 싶은 것이었다.

겨우 윌을 찾아낸 램보 교수는 달뜬 마음으로 ‘문제아’인 윌에게 심리치료를 받게 한 뒤 세상에 드러내려고 한다. 다섯 명의 심리학자가 동원되어 그를 성벽 밖으로 끄집어 내놓으려고 애썼다. 하지만 이미 세상과 단절하고 소통을 피하려고 자기가 쌓은 성벽 안에들어가 있는 윌에게 모든 노력은 허사였다. 게다가 머리와 임상경험으로만 환자를 다루는 심리학자들의 치료 행위는 윌에게 더욱더 큰 절망만 안겨주었고, 더욱더 자기의 껍질 안으로 숨어들게 만들었다.

 

상처받은 치유자가 아픈 사람을치유 한다

램보 교수가 마지막 선택으로 대학 동기인 숀 맥과이어 교수를 찾은 것은 숀과 윌에게 공통점이 있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윌처럼 보스턴 남부출신인 숀은 학창시절동기들과는 가치관이 다른 삶을살았다. 다른 친구들은 유명해지고 성공하는 것을 목표로 살았지만 숀에게 그런 것들은 무의미했다. 사랑하는 여인을 만나 결혼했지만 10년간의 결혼 생활과 이어진 수년의 투병생활, 그리고 아내의 죽음으로 그는 태풍에 던져진 조각배 같은 삶을 겪었다. 하지만 아픔을 겪고 큰 상처를 받아본 경험은 그의 치료방식에도 많은 영향을 미쳤다. 그는 머릿속에 든 지식이나 건조한 이론으로 환자를 판단하고 치료를 하는 것이 아니라, 환자와 믿음과 신뢰를 쌓는 것을 중요시 하고 마음으로 다가가는 진정한 치유자였던 것이다.

하지만 더욱 마음이 굳게 닫힌 윌은 자기가 다른 사람들에게 당한만큼 숀을 밀어붙인다. 숀이 과거에 그린 그림을 보고 그의 심리상태를 읽어내고, 결혼생활에 문제가 있었다는 것을 직감하고 난도질을 한다. 그 과정을 겪으면서 숀은 강렬하게 반응하고 아파하고, 또 상처가 있는 부분의 감정을 드러낸다. 숀은 자신의 감정을 숨기지 않고 고스란히 윌에게 펼쳐놓는다. 윌은 그런 숀에게 반항하면서도 그의 인간적인 모습에 조금씩 끌리기 시작한다. 자신이 상처받은 연약한 아이라는 것을 드러내지 않기 위해 으르렁대고 날카롭게 세우던 이빨을 조금씩 잠재운다. 자기가 만들어놓은 성벽 안에 숨어 떨던 아이는, 상처를 받은것을 표현해내도 괜찮다는 것을 조금씩 알아간다.

 

치유되지 않은 상처가 또 다른 상처를 낳는다

하버드 의과대학에 다니는 수재 스카일라는 윌과 첫 눈에 반해 마음을 나누며 그의 삶에 조금씩 들어오기 시작한다. 하지만 부잣집 상속녀라는 조건은 언제나 윌에게 커다란 벽으로 다가온다. 그리고 고아로 버려진 암울한 과거와 일용직 노동자로 살아가는 볼품없는 현재의 삶은, 그녀에게 마음이 가면 갈수록 그를 반대 방향으로 잡아끌어 내린다. 그는 사람들이 자기에 대해 갖고 있는 이미지가 벗겨지고 진짜 자기가 어떤 사람인지, 어떤 배경을 지녔는지 알게 된다면 모두 떠날 것이라는 두려움을 갖고 있었다.

그렇게 사람들에게 버려지는 것이 너무나도 싫었던 윌은 사람들이 아예 자기의 인생으로 들어오는 것을 거부했고, 그건 여자 친구인 스카일라에게도 마찬가지였다. 스카일라가 그에 대해 더 많이 알려고 할수록 그는 성벽 안으로 도망간다. 자기 형제가 12명이라고 하면서 형제들 이름을 주르륵 읊어넘기는가 하면, 자기 가정을 그냥 평범한 집안이라고 포장하고 얼버무린다. 자기 집에 가보고 싶어 하는 여자 친구에게 그는 언제나 ‘다음에’라는 말로 넘기고 그녀를 그의 공간 안에 들여놓지 않는다. 그리고 철옹성 같은 윌의 마음을 두드리며 마음에 호소했던 스카일라를 결국 떠나게 만든다. 사랑을 받아보지 못해 사랑을 주는 방법을 몰랐던 윌에게 돌아온 또 다른상처였다.

 

너의 잘못이 아니야

윌과 숀의 만남은 언제나 불안하고 위태했지만 둘 사이에는 조금씩 어떤 관계가 만들어지기 시작한다. 시간이 지남에 따라 상대방에 대한 믿음이나 우정이 생겨났기 때문일 수도 있고, 혹은 상처받은 사람들 사이에서 솟아난 애처로움이 바탕이 된 관계일 수도 있다. 그것이 무엇이었든 간에 언제어디서 터질지 모르던 일촉즉발의 긴장감 속에서도 그 둘의 관계는 묘하게도 자라난다.

그러던 어느 날 숀은 알코올중독인 아버지에게 항상 맞고 살아야했던, 불우했던 어린 시절에 대해 이야기를 해준다. 윌 또한 양부에게 죽도록 맞고 살았던 어린 시절을 털어놓는다. 성벽 안에 숨어있던 윌이 자기에 대한 이야기를 하는 것으로 세상으로 한 걸음 내딛은 순간이었다. 마음과 마음이 맞닿은 그 순간, 온 몸과 마음이 상처투성이인 그에게 숀은 윌이 반드시 들었어야 했던 말, 하지만 평생토록 들을 수 없었던 말을 그에게 전해준다. 그가 그렇게 된 것은그의 잘못이 아니라는 말을.

“네 잘못이 아니야!”라는 말은 들은 윌은 숀의 시선을 피하며 “알아요.”라고 말한다. 하지만 그 말은 숀에게 “됐어요!”라는 의미 그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다. 윌이 그말의 진짜 뜻을 깨닫지 못한 채뱉은 대답이었기 때문이다. 그의 잘못이 아니라고 거듭 말하는 숀에게 계속해서 안다고 대답하는 윌. 숀은 집요하게 다가가 그의 마음의 문을 두드린다. 너한테 잘못이 없다고. 네 잘못이 아니라고. 버림받고 상처받은 뒤 떨고 있던어린 시절의 윌은 그 말의 진짜의미가 가슴으로 조금씩 다가오자 격하게 반응하기 시작한다. 철벽같이 쌓아두었던 성벽이 흔들리기시작하자 본능적으로 나오는 방어기질이었다. 자신을 가리고 있던 보호막이 사라지면 ‘버림받은 가난한 고아’인 자기가 고스란히 드러나는것이고, 그것은 더 큰 상처를 받게 될 수도 있다는 것을 의미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숀은 그에게 마음으로 다가갔다. 그리고 진실한 마음을 담아, 다시 한 번이야기한다. 네 잘못이 아니라고. 결국 윌은 눈물을 터뜨리며 자기자신과, 또 세상과 화해를 한다.

 

윌과 숀에게 배우는 용서와 이해

용서하지 않고 미움과 증오를 붙들고 있는 것은 결국 나만 해치는 결과를 가져다준다. 나에게 잘못을 저지르고 고통을 준 사람은 대부분 그 잘못했던 행위나 말 등을기억 못하기 때문이다. 혹은 기억하더라도 그것을 고통스러워하거나 죄책감을 느끼지 않는다. 아이러니하게도 그 고통과 상처를 짊어지고 되풀이해서 기억하고 되새기는 일은 피해를 당한 사람들에게 머물러있다. 결국 피해자의 삶은 증오와 복수심, 피해의식, 수치감 등으로 덧입혀지고 안타깝게도 자기의 삶을 파괴해버리는 인생을 살게 되는 것이다.

윌에게 숀은 복음이었다. 잔잔하면서도 따뜻하게 다가간 햇살 같은 복음. 숀이 윌과 나누었던 말들은 그의 언 마음을 조금씩 녹였고, 결국“네 잘못이 아니야!”라는 강력한 진리를 쏟아부어줬을 때 주인공은 반응했다. 이사야서 61장1절에 ‘마음이 상한 자를 고치며 포로 된 자에게 자유를, 갇힌 자에게 놓임을 선포하며’라고 말씀하신 것처럼 숀을 통해 들어간 복음은 마음이 상한 윌을 고치고 그에게 자유를 주었다. 그리고 하나님이 애초에 심어준 놀라운 천재성을 세상에 널리 드러낼 수 있도록 그의 삶에 빛을 선사해주었다.

램보 교수의 역할도 윌을 세상 밖으로 끄집어내는데 중요한 역할을했다. 램보 교수가 윌의 천재성을 알아보았기 때문이다. “대부분은 자기가 얼마나 천재인지 모르고지나가. 그걸 믿어주는 선생을 못만나기 때문이지. 결국 자신이 멍청하다고 믿게 되는 거야.”물론 그가 업적 성취 위주의 가치관을 가지고 살기 때문에 윌의‘천재성’에만 관심을 갖고 그를 일으켜세우려고 한 개인적인 욕심은 있다. 하지만 윌을 램보 교수가 발견하지 못했다면 그는 숀을 만나지못했을 것이다. 램보는 재능이 있지만 방향을 알지 못하는 천재를 안타까워하며 도와주려고 했고,결국 그를 세상 밖으로 이끌어내는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

‘하나님이 보내주시는 사람’이라는 말처럼 인생의 시즌에는 하나님이 시기적절하게 보내주시는 사람들이 있다. 램보 교수처럼 우리 삶에 가이드라인을 주기 위해, 혹은 나는 깨닫지 못하고 있지만 내게 있는 소중하고 특별한 달란트들을 알려주기 위해서 말이다. 또한 숀처럼 좌절되고 상처받아 갇혀있던 자아를 치유해주고 세상밖으로 끄집어내주어 세상의 소금이 될 수 있도록 이끌어주는 사람들도 존재한다.

때로 고집 센 나의 자아가 반항하고 있는 것을 느낀다면, 분명 하나님이 내 안에서 어떤 작업을 하시는 경우일 것이다. 그럴 때는 윌처럼 성벽안에 나를 가둔채 고집피우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나를 다루시도록 내어드리는 마음을 가져야 한다. 그런 나의 모습들이 정제되고 제련된 후에 결국 드러나게 되는 것은 하나님이 내게 심어놓으신, 태초부터 계획하고 내안에 넣어놓으신 정금 같은 그 무엇임에 분명하기 때문이다.

영화의 제목은 왜 <굿 윌 헌팅>일까. 우선 주인공의 이름이 윌 헌팅이기에 ‘좋은 청년 윌 헌팅’혹은 ‘멋진윌헌팅’으로 해석될 수 있다. 그런데 잘 살펴보면‘윌(will)’ 이라는 단어는 의지, 뜻, 소망, 하고자 하는 일이라는 의미이고 ‘헌팅(hunting)’은 찾아 나선다는 뜻이다. 결국 ‘자기가 하고 싶은 일을 찾아나선다’는 영화의 전반적인 내용을 포함하고 있는 뜻 깊은 제목이다. 신앙인의 관점에서 한가지 더 흥미로운 해석을 해볼 수도 있다. 성경에서‘will’을 자주접하게 되는 건 주기도문에서인데 ‘뜻이 이뤄진 것 같이(your will be done)’의 will은 하나님의 뜻을말한다. 즉 우리를 이 땅에 보내실 때 태초부터 갖고 계신 하나님의 선하신 뜻을 의미하는 굿 윌(Good will). 이 땅에 보내진 우리가 해야 할 일은 우리의 상처를 치유하고, 또 상처받은 자들을 치유해주며 선하신 하나님의 뜻을 찾아(hunting) 이루기 위해 노력하는 것이 이 땅에 천국을 임하게 만드는 일임을 알려주려고 한 것은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