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 엠 샘

아이 엠 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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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INGDOM LIFE &

힐링시네마
아이 앰 샘

 

작가 이애경

 

7살짜리 딸과 7살 지능의 아빠, 능력이 없는 아빠가 아이를 기를 수 없다는 세상의 편견과 의혹을 이기고 사랑으로 가정을지키려는 이야기 <아이 엠 샘>은 휴머니즘을 강조한 최루성 영화만은 아니다. 지적장애인 아빠 샘을 통해 영화는 복잡하지않은, 짧은 말과 행동으로 우리들에게 많은 질문을 던진다. 다름이란 무엇이며 평등이란 무엇인지, 또 진짜 사랑이란 무엇인지에 관한 질문들 말이다. 그래서 영화를 통해 치유를 얻는 것은 장애자라는 타이틀 때문에 가슴을 태워야했던 사람들이 아니라, 어떻게 보면 고집과 생각이 꺾여지고 새로운 마음을 갖게 되는 우리 자신들이다.

 


 

이젠 어엿한 숙녀로 자란 할리우드 스타 다코타 패닝의 천재적인 연기와 숀 펜의 지적 장애인 연기로 전 세계를 눈물바다로 만들었던 영화. 똑똑한 7살짜리 딸과 지적 장애아빠의 가정을 지키려는 이야기는 순수함을 엿볼 수 있는동시에 상처받은 어른들의 세계에‘치유’라는 선물을 주며 많은 인기를 누렸다. 누적 관객 1,200만 관객을 넘으며 올초 영화계를 뜨겁게 달궜던 영화 <7번방의 선물>, 조승우 주연의 <말아톤>도 마찬가지였다. 지적 장애인들의 이야기를 소재로 한 영화는 언제나 사람들에게 많은 감동을 선물하고, 살면서 잃어버린 것들을 돌아보게 만드는 역할을 한다.

지적 장애로 인해 지능이 7세 정도밖에 되지 않는 샘은 커피전문점에서 일하고 있다. 그는 레베카라는 이름의 여인이 진통을 겪으며 자신의 딸을 낳는 자리를 지키지만, 그녀는 아이를 샘에게 주고는 초연히 사라진다. 당황스러운 상황 속에서도 자신의 딸에 대한 부성으로 가득 찬 샘은 아이에게 루시 다이아몬드라는 이름을 지어주고 둘만의 삶을시작한다. 비틀즈의 노래가사인‘루시 인 더 스카이 위드 다이아몬즈(Lucy in the sky with diamonds)’에서 아이디어를 딴 이름처럼 반짝이는 눈을 가진 루시는 아빠의 사랑을 받으며 무럭무럭 자라나간다.

루시와 샘의 친구들은 지적 장애인이거나 피해망상증 혹은 외출공포증을 앓고 있는 사람들이다. 그러나 그들의 영혼은 순수하고 착해, 마치 아이들처럼 단순하게 말하고 행동하며 서로를 사랑하고 의지하며 살아간다. 그 중 샘에게 가장 큰 조언자이자 힘을 보태주는 사람은 이웃집에 사는 애니. 대인공포, 외출공포증으로 집에서 피아노만 연주하고 살아가는 그녀는 루시가 아프거나 문제가 생길 때마다 루시를 돌보거나 샘에게 조언해주며 루시가 건강하고 예쁘게 잘 자라날 수 있도록 도와준다.

샘과 친구들의 삶 또한 대단히 단순하다. 이들에게 머리가 지끈지끈한 골치 아픈 문제는 없다. 원하는 것을 서로 솔직하게 이야기하고 루시에게 신발 사줄 돈이 모자라자 1~2달러씩 주머니에서 동전을 내어줄 정도로 마음이 순박하고 따뜻하다. 겉으로 봤을 때는 피해망상을 앓고 있거나 지적장애를 앓고 있는 친구들이지만 그들은 수요일에는 팬케이크, 목요일에는 비디오 보기, 금요일에는 노래방에 다니며 함께 즐겁고도 참된 우정을 익힌다.

그러던 샘과 루시의 삶에 큰 시련이닥친다. 루시가 아빠의 지능 수준을 넘어서기 시작하면서부터다. 결국 지적 장애인인 아빠에 대해 왠지 모를 부끄러운 마음을 갖고 있던 루시의 생일날, 잠재해있던 모든 문제들이 드러나면서 정부가 개입되고, 결국 아빠인 샘에게 아이를 양육할 능력이 없다는 판단을 하는 상황에 이르게 된다.

사회보호시설로 옮겨진 루시는 아빠와 2주에 한 번씩 면회를 하게 되고,샘은 딸을 되찾기 위해서 법정에서 싸워서 이겨야겠다고 결심한다. 전화번호부를 뒤져 변호사 리타를 만나고, 성공가도를 달리며 오직 일만하고 살았던 그녀에게 도움을 요청한다. 처음에 리타는 샘을 쫓아내며 거부하려고하지만, 자신의 능력과 정의를 자랑하다가 자기가 샘의 무료 변호를 맡겠다고 동료들에게 선언해버리고, 샘은 엉겁결에 변호사를 얻는다.

리타는 샘에게 루시를 양육할 수 있는 능력이 있다는 것을 입증하려고 하지만 경제적인 자립도나 생활환경, 주위환경은 오히려 불가능하다는 것을 증명하기만 한다. 강제적으로 떨어지게 된 샘과 루시의 그리움은 더욱 깊어가고 아이는 아빠의 사랑을 그리워하지만, 조금 더 편하고 좋은 환경에서 자랄 수 있게 만들어주는 것도 어른들이 해야 할 의무라는 점에서 많은 사람들이 이들의 가정을 놓고 고심을 하게된다.

 

다름과 틀림의 차이, 우리는 모두 평등한 존재들

어떤 영화든 도입부분의 첫 장면은 중요하다. 영화가 하고자 하는 이야기를 자연스럽게 흘려 내리거나 주제를 보여줄 수 있기 때문이다. 때문에 스릴러 영화나 추리 영화는 숨이 막힐 듯한 스피드함으로 전개를 몰아가고, 로맨틱한 영화는 외로움이나, 사랑에 대한 사전 복선을 깔아놓는다. <아이 엠샘>에서 감독은 커피전문점에서 일하는 샘이 커피에 넣는 1회용 인공감미료를 정리하는 손을 클로즈업해 계속해서 보여준다. 샘의 손에서 계속 머무르는 일회용 인공감미료의 이름은 ‘equal’, 즉 평등이다. 타이틀 음악이 흐르는 동안 샘은 계속해서 테이블 위의 인공감미료들을 색깔별로 정리하며 ‘평등’을 강조한다.

영화는 7살의 루시나 7살 지능을 가진 아빠 샘이나 은둔주의자 애니나 지적 장애를 가진 샘의 친구들이나, 한번도 재판에서 패한 적 없는 변호사나세상의 똑똑한 사람들, 세상을 이끌고 지도해나간다고 여겨지는 리더들 모두가, 즉 우리 모두가 ‘평등’하다는 것을 강조하려고 한다. 이 평등함은 지능이 높든 낮든, 교육을 받았든 받지 못했든, 부자이든 가난하든, 사회의 리더로 불리는 이들이든 루저로 불리는 이들이든 모두 한 고귀한 생명이고 인간이라는 평등함이다. 사람을 잣대로 재지 말고, 초라하고 볼품없다고 업신여기지 말고, 외모를 보지 말고 중심을 봐야한다는 성경 말씀과도 상통한다. 하나님 앞에 모두 소중한 아들딸들이며 예수님이 목숨을 바쳐 살리려고 했던 귀한 영혼들이라는 것이다.

하지만 현재를 사는 대부분의 사람들은 모두가 평등하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설령, 이론적으로 그렇게 생각하더라도 실제 삶에서 그 이론이 적용되지는 않는다. 우리는 평등하게 태어났다고 믿지만 실제적으로는 태어나면서부터 인종과 빈부의 차이를 안고 태어난다. 그것은 다름일 뿐인데 우리들은 그것을 불평등이라고 여긴다. 사람들은 각기 생각하는 것이 다르고, 서로 살아갈 삶이 다른데도 말이다. 영화는 서로 ‘다름’은 인정하지만 그것을 평등과 불평등의 개념에서 분리시켜야 한다고 주장한다.

‘다름’에 관한 정의는 7살 루시가 읽게 된 새 책을 읽어주는 과정에서도 나타난다. 샘은 루시에게 책을 읽어주다가 어떤 단어를 읽지 못하고 계속더듬댄다. 그 단어는 ‘다름(different)’ 이라는 단어다. 처음에는 읽지 못하는 아빠를 도와‘different’라고 읽어주지만 샘이 다음에도 읽지 못하자 딸은 ‘different’라는 단어를 발음하려고하지 않는다. 그 단어를 모른다고 떼를 쓴다. “아빠가 못 읽으면 나도 읽기싫어!”라는 루시의 말 속에는 아빠가 남들과 ‘다르다’는 것이 부정적인 이미지로 각인되어 있기에 그것을 인정하고 싶지 않은 두려움이 내포되어있다.

다름과 차이는 존재하지만 그것이 옳고 그름은 아니고, 의롭고 의롭지 않음도 아니고 잘나고 못나고도 아니다. 하지만 우리들은 이 모든 엉클어진 기준을 머릿속에 끌어안은 채 분별하지 못하고 살아가고 있다.

 

샘이 들려주는 깊은 메시지 “우리가하는 말에는 힘이 있다”

7살의 지능을 가진 샘은 복잡하게 살지 않는다. 생각하는 것을 말하지만, 돌려 말하지 않는다. 담백하고 명료하다. 그가 자주하는 말은“아주 잘 고르셨어요(That’s a wonderful choice)!” 와 “애니가 그러는데….”이다. 손님들의 메뉴 선택 뒤에 샘은 언제나 ‘잘 택했다’고 격려한다. 그것이 비록 카페 라테를 마실지, 에스프레소를 마실지 선택하는 소소한 일상이라도 말이다. 사람들은 누구나 자기를 지원하고 격려해주는 사람이 필요하지 않던가. 그런 점에서 샘은 작은 격려와 희망의 메시지를 사람들에게 전해주고 있었다.

샘에게 있어 애니는 절대적인 존재이며 샘은 애니의 말을 듣고, 기억하고,또 사용한다. 그녀의 말은 틀린 것이없다. 적어도 샘의 세상에서는 말이다. 갓 태어난 아기는 두 시간에 한번씩 분유를 먹어야한다는 것이나, 조지 해리슨은 곡을 쓸 능력이 없다고생각했지만 그가 쓴 곡이 <애비로드>앨범의 최고의 곡이 되었다는 것이나샘은 애니의 말을 듣고 기억한다. 그리고 그녀의 말은 샘의 삶에 있어서 중요한 잣대가 되기도 하고 나침반이 되기도 한다.

그리고 샘의 언어의 대부분은 직설적이고 명료한 말들이다. “오늘 정말 예쁘구나!”, “루시는 똑똑해요.”, “루시는예뻐요.”, “루시는 냄새가 너무 좋아요.”언제나 좋은 말만하고 칭찬만 한다. 남을 비방하거나 거짓말하거나 해치려는 말을 하지 않는다. 악한 말들과 거짓말들, 비방하는 말들과 참소하는 말들이 누룩처럼 번져있는 이 세상에서는 보기 드문 광경이다.
어른이 되어 갈수록 복잡하게 이야기하고 남을 격려하기 보다는 상처 주는이야기를 하는데 우리는 더 익숙하다. 게다가 남의 이야기를 잘 듣지 않는다. 내 주장만 펴고, 내 이야기만 한다. 샘이 사람들과 소통하는 방법에서 오히려 우리가 그에게 배워야할 것이 많지 않을까. 샘의 사건을 해결하려 애쓰면서, 아들과의 관계가 회복되기시작한 변호사 리타가 샘에게 “당신이얻은 것보다 내가 당신에게서 배워가는것이 더 많은 것같다.”고 고백한것 처럼 말이다.

 

질문과 이해되지 않는 대답 속에서 중요한 건 서로 소통한다는 것

루시가 자라나고 있는 과정을 그린 장면에서 인상 깊은 것 중 하나가 루시가 샘에게 끊임없는 질문을 하는 장면이다. 말을 배우고 아빠와 대화를 할수 있게 된 딸과 아빠의 커뮤니케이션 과정을 그린 장면. 탐구적인 루시에게 대답하는 아빠의 대답이 재미있다.

“왜 하늘에서 눈이 내려?” “왜냐면 하늘에서 눈이 내리니까.”, “겨자는 뭘로 만들어?”“왜냐면 겨자는 노란 케첩이니까.”, “왜 대머리가 돼?” “머리가 반짝이다가 얼굴 면적이 넓어지니까.” 샘은 질문에 대한 답이 아닌, 엉뚱한 대답을 계속 내어놓는다. 동문서답, 어쩌면 우리의 수많은 질문들과 하나님의 응답하심도 가끔 이런 패턴을 띠고 있는 것이 아닌지. 우리는 궁금하고 알고 싶은것이 많고 특히 언제, 왜 라는 질문을 할 때가 많지만 질문과는 다른 대답을 들을 때가 많다. 하나님의 자녀들인 우리는 명쾌한 답을 해주시지 않는 하나님을 원망할 때가 많지만, 하나님은 대화 자체를 이끌어가시는 것을 좋아하신다. 마치 샘과 루시의 대화처럼 말이다.

루시는 마지막으로 아빠에게 “하나님이 아빠를 이렇게 한 건 하나님의 뜻이야 아니면 사고야?”라고 묻는다. 루시가 자라나면서, 아빠와 친밀한 시간을 함께 보내면서 또 많은 대화를 통해 깨닫게 된 것이 있다. 그것은 바로 아빠가 다른 사람과 다르다는 것이다. 그것을 아주 잘 알게 되었다. 우리도 마찬가지다. 내가 하나님께 기도하고 질문하면서 원하는 답은 나오지 않을지 몰라도 그 과정에서 얻어지는 것이있다. 함께 하는 시간이 늘어나고 친밀해지며, 또 바로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 더 잘 알아가게 되는 것이다.

 

외로움을 상징하는 파란색으로 부터 따뜻함을 상징하는 빨강색으로의 전환

영화는 전반적으로 파란색 톤을 유지한다. 파랑색은 고대 초부터 중세 중반까지 회화나 벽화 등에서 거의 사용되지 않았던 색이라고 한다. 미개하고 어두운 색이라고 생각되어 초기 교회에서도 파랑색은 사용되지 않았다고 한다. 영화는 파랑색이 갖고 있는 외로움, 고독, 불평등함, 위태함을 보여주기 위해 배경을 파란색으로 쓰는 장치를 사용했다. 학교, 변호사 리타의 사무실, 새벽의 푸르스름한 빛, 샘이 루시에게 책을 읽어주는 밤, 비가 부슬부슬 내리는 저녁 등 영화 전반에서그 느낌을 감지할 수 있다.

이것은 샘이 갖고 있는 불평등함이나 샘과 루시가 치러내야 할 외로움과 고독을 표현하기 위한 시각적인 설정일 가능성이 크다. 왜냐면 루시가 사회복지시설을 거쳐 양부모에게 입양되었을 때 루시의 주변은 밝은 빛과 붉은빛을 많이 사용했으며, 특히 루시가 그린 그림에서 해와 집의 지붕이 빨간색으로 예쁘게 칠해졌기 때문이다. 해가 하나님, 빛, 지배함을, 지붕이 보호를 상징하는 것으로 보았을 때 어쩌면 이별의 기간을 지낸 뒤 다시 찾게 되는 샘과 루시의 사랑은 외로움과 고독을 이긴, 엄마의 사랑처럼 따뜻하고 보호되는 사랑일 것이라는 미래에 대한 암시를 주는 것이 아닐까하는 생각이든다.

 

혼잡함과 바쁜 일상 속에서 우리가 놓치는 것들

샘의 변호를 맡아줄 유능한 변호사 리타는 하루에도 10개 이상의 의뢰인들의 이야기를 들어줘야하고 법정에 나가야 하느라 바쁘다. 그런 그의 삶을보고 있자면 번잡함 속에 살고 있는 우리들이 놓치고 있는 것들을 깨닫게된다.

첫 번째, 나라는 사람에 대한 정의이다. 바쁘게 계단을 오르던 리타가 샘에게 하던 말. “그러니까, 뭐라고 당신을 뭐라고 불러야할까요. 장애라고 부르는 것보다… 정신지체라는 말은 어떨지… 그것도 적합하지는 않군요….” 이렇게 그를 간편하게 정의하려는 리타에게 샘은 떠듬떠듬 하면서도 간결하게 대답해준다. “샘… 그냥 샘이라고 하세요.”라고. 리타는 정신없이 전화를 받고 응대하면서 흘려듣듯 알겠다고 말한다. 리타는 대충 넘어갔지만, 그 대화를 듣는 사람들의 마음에는 깊은 감동이 온다. 샘은 그저 샘일뿐, 정신박약도 아니고 정신지체도 아니니까. 우리는 너무 바쁘고 복잡해 되도록 빠르고 편리하게 선과 기준을 세워놓고 사람을 분리시키고 그 기준에 따라 사람을 대하려는 습성이 있다. 그 사람이 어떤 사람인지 정확히 인식하지 못하면서 말이다.

두 번째 가족이란 무엇인가에 관한 질문이다. 리타는 모든 걸 다 가진 듯보이지만 성공한 그의 삶에는 조각난 가족이 있을 뿐이다. 아들에게 장난감을 사주기 위해 없는 시간을 쪼개 밤을 새워가며 찾아다니지만 정작 아들은 계속해서 엇나간다. 남편은 자기보다 더 능력 좋은 여자와 바람을 피우고 있다. 사람들이 흔히 말하는 성공은 가정의 파괴를 가져다주었다. 성공을 얻었지만 가정과 사랑을 잃었다면 그것이 진정한 성공일까.

아들과의 관계에서 자신이 저능아처럼 느껴지던 리타는 결국 이렇게 고백한다. “돌아보면 나만 빼고 모두 다잘 사는 것 같고, 모두 문제를 잘 풀어나가는 것 같은데 나는 아무리 노력해도 안 된다.”고. 샘의 가정을 지키기 위해 리타는 울며 겨자 먹기 식으로 변호를 맡았지만, 결국 치유를 경험한 것은 그녀였다. 샘과 루시의 가정을 지키기 위한 노력을 하며 가족의 참사랑을 깨달았고 결국 아이를 마음으로 사랑해주는 방법을 조금씩 터득했던 것이다.

 

가난하고 무능력한 하나님을 사랑할 수 있는가?

법정에서 루시를 양부모에게 입양시키려는 측에서는 루시에게 “정말 마음깊은 곳에서는 아빠가 해줄 수 있는 것보다 더 많은 것을 마음속으로 바랬던 것은 아니냐?”고 질문한다. 영화를 보는 우리들은 샘과 루시의 편이 되어, ‘사랑’이라면 그 모든것을 극복하고 남을 수 있다고 대부분 생각한다. 그래서 영화를 보는 내내 샘과 루시를 지지하게 된다. 결국 영화는 진정한 사랑을 루시에게 채워줄 수 있는것은 아빠라고 결론지어주고 양부모는 루시의 입양을 포기하고 샘에게 돌려주는 해피엔딩으로 끝난다. 물론,더 좋은 환경과 좋은 조건을 베풀어 줄 수 있는 양부모 밑에서 자라는 것이편하고 풍요로울 수 있다는 것을 알지만 적어도 무조건적인 아버지의 사랑을 따라가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것을 증명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의 아버지이신 하나님은 어떤가. 우리는 하나님을 사랑한다고 고백하고 또 그분을 사랑한다. 그러나 전제 조건은 하나님이 온 세상을 컨트롤 하시고 무소부재하시고 모든 능력 위에 뛰어나신 분이시라는데 있다. 그런데 이런 질문이 떠오른다. 만약 하나님이 가난하고 무능력하다면, 우리가 과연 하나님을 사랑할 수 있는지. 아무 것도 자녀에게 해줄 수 없고 오직 사랑만 주실 수 있다면, 그래도 우리는 그분에게 사랑한다고 고백하고 그분을 좇을 수 있는지 말이다. 하나님이 샘 같은 분이시라면, 하나님을아버지로 삼을 수 있는지 말이다.

알게 모르게 우리의 마음에는 능력자이신 하나님이기에 그분을 사랑하고 그분의 자녀가 되는 것을 기뻐하는 마음이 있지 않을까. 루시처럼, 하나님이 설령 아무것도 해주시지 않고 오직 변함없는 아비의 사랑만 주신다 할지라도, 편하고 좋은 것들을 주는 세상을 미뤄두고 하나님만 바라 볼 그 사랑이 우리에게 존재하느냐는 질문을 스스로에게 던져보는 것은 어떨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