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킹덤빌더다
나는 킹덤빌더다
주세훈 (법도 종합법률사무소 경영이사)
KBS 9, 10, 12, 15기 수료
내 삶을 향한 하나님의 새로운 계획 – “목사 말고 변호사가 되어라!”
KBS 8기 수료 후 제 관심사는 단 하나였습니다.
“내 계획이 아니라 내 삶을 향한 하나님의 계획”만이 궁금했습니다. 오직 이것에만 집중하며 3~4개월을 기도했습니다. 목사가 될 각오도 선교사가 될 각오도 되어 있었습니다. 기도하고 또 기도했습니다. 그렇게 시간을 보내던 중 2012년 3월 무렵 드디어 내 삶을 향한 하나님의 계획을 알 수 있었습니다. 요한복음 3장 16절로 말씀해 주셨는데, 요약하자면 “목사나 선교사가 되겠다는 바로 그 마음으로 세상 속으로 가라”는 것이 그분의 계획이었습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그를 믿는자마다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하려 하심이라 요3:16
그제야 동영상 설교를 처음 보던 그날로부터 시작하여 1년 이상의 기간 동안 손 장로님을 인생의 롤모델로 삼을 만큼 존경하고 사랑하게 된 이유를 이해할 수 있었습니다. 그것은 제 마음이 아니라 세상 속으로 가길 원하시는 예수님의 마음이었습니다. 손 장로님의 삶을 통해 그 길을 가는 모델을 보여주신 것이었습니다. 성령님께서는 세상으로 나가는 구체적인 방법에 대해서도 인도해 주셨습니다. 어느 날 환상을 보았는데, 청록색 유리로 지어진 커다란 빌딩이었습니다.
그 빌딩을 보는 순간 그것이 무엇인지 바로 알 수 있었습니다. 그 빌딩은 “대형로펌(대형법률회사)”이었습니다. 처음에는 환상으로 보여주신 빌딩을 보고 나서 변호사인 아내의 비전을 제가 본 것인 줄 알았습니다. 저는 학력이 고졸에다가 법조문은 한번도 본적이 없는, 법률과 아무런 관련이 없는 사람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아내에게 이야기했습니다. “형찬이 엄마, 요즘 하나님이 당신 비전을 내게 보여주시는 것 같아.” 우린 그냥 그러려니 하고 넘어갔습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날수록 법률회사에 대한 비전은 더 큰
감동으로 제게 다가오기 시작했습니다. 지금껏 하나님이 제게 하신 살 떨리는 믿음의 훈련들을 생각해 볼 때 제게 법조인의 비전을 주실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아니, 우리 아버지는 워낙 센세이셔널하고 파격적인 분이시기 때문에 충분히 그러실 수 있습니다. “혹시나?” 하는 마음으로 기도했는데 “역시나!”였습니다. 성령님은 제게 변호사가 되라 말씀하셨습니다.
선행을 배우며 정의를 구하며 학대 받는 자를 도와 주며 고아를 위하여 신원하며
과부를 위하여 변호하라 하셨느니라 사1:17
얼마나 놀랐는지 모릅니다. 천만 원 빌려 와서 흘려보내라 하실 때, 삼천만 원짜리 회개에 합당한 열매를 맺으라 하실 때, 서초동 아파트로 가라 말씀 하실 때, 살 떨렸던 믿음의 훈련들은 다 저리 가라였습니다. 아버지는 항상 불가능한 것을 말씀해 오셔서 새삼스러울 것도 없었지만, 제가 변호사가 되는건 다른 문제였습니다. 학력은 고졸, 출신성분은 시장바닥에서 천 원짜리 양말 팔던 사람, 나이는 마흔, 공부하고는 담 쌓고 산 세월. 설혹 변호사가 된다 해도 대학 4년, 로스쿨 3년을 포함하여 최소 10년 뒤. 그러면 내 나이 쉰. 이건 놀랄 일도 아니고 살 떨릴 일도 아닙니다. 기가 막힐 일입니다. 제가 어떻게 했을 것 같으십니까? 순종했을 것 같다고요? 아니요. 틀렸습니다. 불순종 했냐고요? 아니요.그것도 틀렸습니다. 저는 확인을 구했습니다. “주님. 제가 정말 변호사의 길을 가길 원하신다면 확인해 주십시오.” 성령님께서는 기꺼이 확인시켜 주시는 분입니다.
그때도 ㈜필팝을 운영하고 있을 때였는데, 어느 날 제 회사를 상대로 소송을 하겠다는 내용증명이 날아왔습니다. 저작권을 침해했다는 내용이었는데, IT와 관련한 법 문제라 제가 풀어야 하는 문제였습니다. 아내에게 기초적인 법률들을 물어가며 열심히 법전을 뒤졌습니다. 이 순간이 바로 제가 법 공부를 처음 시작하던 순간입니다. 성령님께서는 법 공부를 그렇게 시키셨습니다. 실마리가 보이기 시작했습니다. 아내의 도움을 얻어 결국 대응 법률을 찾아내었습니다. 그래도 이 정도를 가지고 제가 변호사의 길을 가는 것에 대해 성령께서 확인해 주셨다고 하면 안 될 것 같았습니다. 그래서 또 한 번 기도했습니다.
“주님. 이건 살다보면 있을 수 있는 일입니다. 다시확실하게 확인해 주십시오.” 물론 성령님께서는 기꺼이 확인시켜 주셨습니다. 제 회사를 상대로 소송을 하겠다는 내용증명을 다른회사로부터 또 받은 것입니다. 두 번째 실전 법 공부(?)가 시작되었습니다. 내 권리의식과 의무의식이 깨어나는 순간이었습니다. 물론 아내의 도움을 받아 해결도 잘 했습니다. 확인해 달라면 기꺼이 확인해 주시지만 아버지의 확인 방법은 살벌합니다. 말씀하실 때 한번 만에 알아듣는 게 좋다는 것을 새삼깨달았습니다.
그 때가 여름이었는데, 저는 즉시 ‘서울디지털대학교 법학과’에 입학했습니다. 세상을 사랑하시는 아버지의 마음을 안고 법학과를 지원했습니다. 일반대학을 갈수는 없었습니다. 변호사가 되기까지 법률회사를 만들어 가야 하는 비전을 함께 받았기 때문입니다. 입학당시 서울디지털대학교 법학과 교수님을 찾아가서 물었습니다.
“교수님. 디지털대학을 나오면 로스쿨을 들어갈 수 있습니까?”
교수님의 대답은 단호했습니다.
“아니요. 불가능합니다. 사례도 없습니다.”
“확률이 1%도 안 됩니까?”
“복수전공을 하면 1%는 되지 않을까요?”
그래서 저는 지금 99% 확률의 불가능과 1% 확률의 가능성을 안고 ‘법학과’와 ‘컴퓨터소프트웨어학과’를 복수전공 중입니다. 지금까지 제가 경험한 하나님은 1%면 충분합니다. 오병이어의 기적에서 물고기 두 마리와 보리떡 다섯 개는 먹은 사람들의 수의 1%도 되지 않았으니까요.
하나님께서 주신 우리 부부를 향한 비전인 “변호사인 아내와 함께 법조계를 하나님의 나라로 만드는 것”을 위해 저는 제 인생을 예수님께 통째로 드리기로 결정했습니다. 그 당시 제가 하던 ㈜필팝 사업을 내려놓고 아내가 변호사로 일하는 법무법인의 직원으로 취직했습니다. 그리고 신학교를 입학하는 마음으로 2012년 8월에 서울디지털대학교 법학과에 입학했습니다. 낮에는 법률사무소 직원으로 실무에서 부딪히고, 밤에는 경험을 바탕으로 법 공부를 했습니다. 하나님은 낮에 법원직원에게 욕을 얻어먹어 가며 배운 내용이 밤에 학교에서의 시험문제로 출제되게 하셨고, 그렇게 저와 성령님과의 교제는 삶의 현장에서 이어져 갔습니다.
그러나 이런 삶이 항상 좋은 것만은 아니었습니다. 솔직히 말하면 이런 삶을 선택할 때 두려움도 많았습니다. 마치 건너지 말아야할 강을 건너 버린 느낌이었습니다. 마흔의 나이에 대학교를 간다는 것도 두려웠고, 한 번도 생각해 보지 않았던 법 공부를 한다는 것도 두려웠습니다. 그뿐만 아니라 믿음이라는 명목 하에 세상의 상식을 무시하고 가야 할 때는 언제나 정말 두려웠습니다.
2012년 제10기 「킹덤빌더스쿨(KBS)」 – 서울역 노숙자교회로의 부르심과 법률회사 설립과 믿음으로 태어난 아기
2012년 10월. 저는 KBS 10기에 다시 들어갔습니다. 넘지 말아야할 강을 건너버린 순간 돌아갈 수 있는 길은 없었습니다. 제가 갈 수 있는 길은 더 깊이 들어가는 길 말고는 없었습니다. 그래서 KBS에 재차 지원했습니다. 이전까지의 익숙했던 삶을 모두 내려놓은 채 대학교는 생각해보지도 못하고 살아왔던 제가 법학을 공부하고 있는 현실이, 사업 말고는 해본 적이 없는 제가 평사원으로 일하고 있는 현실이, 우습기도 하고 한심해 보이기도 하고 이상해 보이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믿음으로 바라보면 하나님의 뜻대로 행하고 있는 삶이었습니다. 10기를 수료하며 다시 한 번 옳은 선택을 했음을 확인받고 아내의 도움을 받아 법 공부와 법률사무소 일을 했습니다.
서울역 노숙자 교회로의 부르심
KBS 10기를 수료 했을 때 또 하나의 큰 변화가 있었습니다. 성령님께서는 “첫사랑을 회복하고, 믿음으로 낮은 곳으로 가라” 말씀해 주셨습니다. 특별히 보여주신 곳은 저희 부부가 수년간 후원을 하고 있던 서울역 노숙자와 쪽방촌을 섬기는 교회였습니다. 저희 가정은 성령님의 인도하심에 순종하여 서울역 노숙자교회인 “소망을 찾는 이” 교회로 옮겼고, 지금도 여기서 찬양인도 등의 일을 하며 신앙생활을 하고 있습니다. 쪽방촌 사람들과 노숙자들과 부딪히다보면 좀 힘이 들 때도 있지만, 이곳이 우리가 있어야 할 자리임을 알기에 마냥 즐겁기만 합니다.
또한 이곳에서 신앙생활을 하다보면 마음 깊은 곳에서부터 마귀에 대한 분노가 치밀어 올라옴도 느낍니다. 불안, 공포, 걱정, 두려움 등은 말할 것도 없고, 가난, 도박중독, 알코올중독, 폭력 등등 마귀들이 인간을 학대하는 극치들을 보여주는 곳이 이곳인 것 같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곳에서 신앙생활을 하면서 절실하게 드는 생각은 마귀들이 묶어놓은 묶임들을 끊어내고 싶다는 것입니다. 시간이 지날수록 앞에서 말씀드린 성령사역자의 비전에 대한 갈망이 점점 더 커져감을 느낍니다. “노숙자들의 손기철 장로”가 되어 마귀로부터 학대받는 자를 도와주며 살고 싶은 소망이 물밀 듯 밀려옵니다.
도둑이 된 내 아들 – “그거 내 거였어.”
“목사님! 큰일 났어요! 헌금함이 깨져 있어요!”
누군가 소리쳤습니다. 쪽방촌 사람들과 노숙인들이 함께 모여 예배하는 공원예배를 모두 마치고 교회로 돌아와 잠시 쉬고 있는데 일이 생겼습니다. 화들짝 놀라서 모두 다 본당으로 모였습니다. 나무로 만들어진 헌금함이 깨져 있고 돈은 이리저리 흩어져 있었습니다. 누군가 돈을 훔쳐가기 위해 헌금함을 깨트린 것 같은데, 모두 다 가져가진 않고 조금만 가져간 것 같아 보였습니다. 주일학교 저학년 아이들을 데려다가 다그치니 한 명씩 자백을 하기 시작했습니다. 총 네 명의 아이가 일을 저지른 것입니다. 그런데 믿을 수 없었던 사실은 당시 일곱 살이던 제 큰 아들 형찬이도 공범(!)으로 그중에 끼어 있었다는 사실입니다. 얼마나 화가 치밀어 오르던지 참지 못해 눈물이 날 지경이었습니다. 옆에 있던 아이 엄마는 이미 울고 있었습니다.
주님이 낮은 곳으로 가라 말씀하셔서 순종하며 온 교회. 그 곳에서 다른 사람도 아닌 제 아들이 도둑놈으로 서 있는 것입니다. 그것도 하나님의 돈을 훔친 것입니다. 얼마나 마음이 상하는지 안 겪어 본 사람은 모릅니다. 마귀가 공격하기 시작했습니다. 회의가 밀려왔습니다.
“이 곳으로 온 게 잘 한 일일까?” 서초동 아파트에 와 보니 그곳의 생활수준은 대한민국 최고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습니다. ‘서울중앙지방법원’ 앞이기 때문에 판사, 검사, 변호사 아들들이 형찬이 친구들입니다. 그런데 주일이 되면 쪽방촌 아이들 하고 놉니다. 그곳의 윤리의식의 수준은 일반인의 상상을 초월합니다. 일곱 살 밖에 안 된 형찬이가 그런 것을 이해할 리가 없었습니다. 마귀가 다시 한 번 공격합니다.
“아직 일곱 살 밖에 안 된 아이한테 부모로서 몹쓸 짓을 한건 아닐까?” 일주일 내내 이 일로 고민하고 또 고민했습니다.
“내 아들이 도둑질을 했어. 그것도 하나님의 돈을 훔쳤어.”
월요일이 되었습니다. ‘선한목자교회’에서 열리는 <월요말씀치유집회>에 참석했습니다. 설교가 거의 끝날 무렵. 손 장로님께서 모두 다 일어나서 어떤 기도도 생각도 하지 말고 조용히 아버지의 음성을 들으라고 하셨습니다. 아버지의 음성이 들려왔습니다.
“그거 내 거였어.”
이 한 마디에 마귀가 흔들어 놓은 제 마음이 모두 다 무너져 내렸습니다. 저는 내 아들이 하나님의 돈을 훔쳤다는 정죄감에 시달리고 있었는데, 아버지는 “내 거였으니 괜찮다. 다른 사람 것을 훔쳤으면 어쩔 뻔 했니?”라는 의미로 말씀하신 것입니다.
초등학교 2학년이 된 우리 형찬이는 이제 이곳에 적응을 잘 했습니다. 서초동에서도 쪽방촌에서도 잘 놉니다. 이곳에 오길 정말 잘 했습니다. “산교육”의 장이 이 곳이니까요.
재정훈련 – 믿음으로 세운 로펌 “법도 종합법률사무소”
2013년 5월. 믿음으로 또 한걸음을 내딛어야 하는 커다란 변화가 찾아왔습니다. 법률사무소 사무장으로서 업무가 손에 익어가고 법학 공부도 기초수준을 넘어가고 있을 무렵, 성령님께서는 독립된 법률사무소를 설립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기존에 일을 하던 곳에서는 아내는 법무법인 소속 변호사였고 저는 법무법인 직원이었습니다. 모아놓은 돈이 없었던 저로서는 법무법인을 벗어나면 영업에 문제가 있을 거란 생각에 쉽게 결정하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성령님께서는 믿음으로 가라고 우리 부부의 등을 떠 미셨습니다. 결국 믿음으로 우리 부부는 건물 9층 전체를 임대했습니다. 저희 법률사무소의 창밖을 내다보면 ‘서울중앙지방법원’, ‘서울중앙지방검찰청’, ‘대검찰청’, ‘대법원’이 한눈에 모두 들어옵니다. 대한민국의 사법 일번가가 한눈에 보이는 것이지요. 창밖을 내다보면서 수시로 한국의 사법정의를 위해 기도할 수 있습니다.
돈이 없으면 돈을 의지하지 않게 되는 것 같습니다. 의지할 데가 없으니까 예수님만 의지하고 가게 되는 것 같습니다. 이것을 잘 알고 계신 우리 아버지는 우리의 믿음의 훈련을 위하여 때로는 돈을 없게 하시는 것 같습니다. 저희 사무실을 임대할 때도 재미있는 일이 있었습니다. 저희는 돈이 없으니까 돈에 맞는 사무실을 알아보고 다녔습니다. 그러나 성령님께서는 믿음에 맞는 사무실을 구하라 하셨습니다. 어느 날 제 마음에 이런 음성이 들려왔습니다. “하나님은 네 탐욕을 채우시진 않지만 필요는 반드시 채우신다. 임대료는 필요한 것이다. 임대료가 싼 곳을 임대할래 아니면 비싼 곳을 임대할래?” 저는 당연히 “비싼 곳을 임대할래요!”라고 대답했습니다. 그렇게 믿음으로 과분한 곳을 선택한 곳이 지금의 회사공간입니다.
예수님은 한 번도 임대료나 직원들의 월급이나 회사운영상의 문제로 걱정해야 할 상황을 저희에게 주시지 않으셨습니다. 그렇다고 퍼부어주시지도 않으셨습니다. 많이 쓰면 많이 쓰는 만큼 채워주셨고, 적게 쓰면 적게 쓰는 만큼 채우셨습니다. 이렇게 저는 “하나님은 탐욕은 채우시진 않지만 필요는 반드시 채우신다.”는 진리를 깨달았습니다. 아니, 경험했습니다. 그래서 저는 필요한 때에 많이 씁니다. 쓰고 주는 만큼 하나님은 더 많이 부어주심을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믿음이 실상이 되어 태어난 아기
“법도 종합법률사무소”를 설립할 무렵 또 하나의 큰 축복을 받았습니다. 막내 형신이가 태어난 것입니다. 형신이는 우리 부부의 믿음이 실상이 되어 태어난 아이입니다. 형신이를 가지기 전의 일입니다. <월요말씀치유집회> 중에 손 장로님께서 “믿음으로 바라는 것을 그리라” 하셔서 저는 믿음으로 제가 아이를 안고 있는 모습을 그려보았습니다. 그런데 그 모습이 얼마나 분명했던지, 제가 믿음으로 상상하며 바라본 것인지 실제로 환상을 본 것인지 구분이 안 될 정도로 분명히 보였습니다. 우리 부부는 그것을 믿음으로 취하고 바로 그 다음날부터 아이가 있는 것처럼 행동했습니다.
저녁을 먹고 나면 당시 여섯 살이던 큰 아이 형찬이와 우리 부부가 함께 소파에 앉아 엄마 배를 만지며 이렇게 이야기했습니다. “형찬아! 여기에 네 동생이 있어 불러봐.” 그러면 형찬이는 기대감에 가득 찬 눈으로 “내 동생아 얼른 나와!” 하며 수태도 되지 않은 엄마 뱃속의 동생을 불렀습니다. 우리는 그렇게 3개월 동안 없는 아이를 있는 것처럼 생각하고 살았습니다. 3개월째 되는 날 놀라운 일이 생겼습니다. 아이 엄마가 병원을 다녀왔는데 아이가 생긴지 1개월이 되었다는 이야기를 듣고 왔던 것입니다! 그래서 믿음으로 태어난 아이. “빛나는 믿음으로 살아라.”라는 의미로 빛날 “형”, 믿을 “신” 자를 써서 형신(炯信)이라고 지었습니다. 이 아이가 “법도 종합법률사무소”를 설립할 때 태어난 또 하나의 큰 축복입니다. (다음 호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