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INGDOM LIFE &
힐링시네마
레미제라블 Les Miserables
작가 이애경
우리의 삶에는 폭풍도 존재하고 광야도 존재한다. 죽을 것 같은 추위도 찾아오고 꿈과 희망이 모두 사라질 것 같은 공포도 엄습해온다. 그런 환난의 때에 우리는 이 질문을 스스로에게 던져야 한다. “너의 중심에는 무엇이 있느냐”는 질문을. 그곳에 하나님이 있다면, 그리고 그것을 인지한다면 두려움이 있을지언정 두려움은 이빨 빠진 호랑이처럼 우리에게 맥을 추지 못할테니까. 그리고 우리는 결국 승리할 테니까.
영화 <레미제라블>에는행복한 사람이 단 한 명도 등장하지 않는다. <레미제라블>이라는 제목처럼모두 비참하고 상처 입은사람들만 존재할 뿐이다.그러나 그 시궁창 같은, 세상에서 소외된 가난한삶 속에서도 끈질기게 살아가려는 그들의 절규는 기이하게도 아름다운 형태로 변화되어 우리들의 마음의 문을 두드린다. 절망적인 과거를 지우고 빛 가운데로 가기 위해, 딸을 부양하기 위해, 자신의 믿음을 지키기 위해, 사랑하는 사람을위해 싸우는 그들의 처절한 몸부림에서 우리는 자신의 모습을 발견하고 그들을 통해 치유됨을 경험하기 때문이다.
“사회에는 법률과 풍습으로 말미암은 처벌이 존재하여
그것이 문명 속에 인위적으로 지옥을 만들어내어
신성한 운명을 불행으로 뒤얽히게 하는 한
그리고 이 시대의 세 가지 문제
프롤레타리아 탓으로 남자가 낙오되고 굶주림으로 여자가 타락하고
어둠 때문에 아이들이 비뚤어지는
세 문제가 해결되지 않는 한
다시 말해 좀 더 넓게 보아 이 지상에 무지와 비참이 있는 한
이러한 책들이 쓸모없지는 않을 것이다.”
– 빅토르 위고의 <레미제라블> 서문 –
음악과 감수성에 몰입되는 158분의 숨 막히는 시간
비참한 사람들’이라는 뜻의 <레미제라블>은 프랑스작가 빅토르 위고가 35년간에 걸쳐 쓴 방대한 분량의 소설로, 후에 전설적인 뮤지컬 제작자 카메론 매킨토시가뮤지컬로 만들어냈으며 <캣츠>, <미스 사이공>, <오페라의 유령>과 함께 세계 4대 뮤지컬로 꼽히며 전 세계에서 끊임없이 상연되고 있는 작품이다. 스크린을 통해서는 10여 년 전인1998년에 리암 니슨, 제프리 러쉬, 우마 서먼 등이 주인공을 맡아 영화로 선보인 적도 있다.
때문에 배고픈 조카를 위해 빵 하나를 훔친 죄로 감옥에 수감되어 19년을 살아온 장발장의, 누구나 다 아는 이야기가 뮤지컬 영화로 만들어졌다는 소식은 처음에는 사람들의 관심을 크게 끌지 못했다. 뮤지컬 영화가 국내에서 성공한 케이스가 거의 없었고, 뮤지컬 영화의 특성상 거창한 사운드 트랙을 동반한 장면들을 보는 내내 풍성한 음악의 울림은 있을지 몰라도 대사와 노래의 교합으로 다소 산만함을 주기에 가슴까지 연결되는 감정의 연결선을 찾기가 어렵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게다가 용서와 은혜, 선과 악 등서사 전체에 전반적으로 개입되어있는 종교적인 색채는 일반인들에게 지루한 인상을 주기가 쉽고, 지극히도 많은 스포일러 덕에 결말을 뻔히알고 영화를 봐야하는 지루함이 극장에 앉아 있는 내내 지속될 수 있다는 이유에서였다.
하지만 톰 후퍼 감독의 <레미제라블>은 달랐다. 영화 <킹스 스피치>에서 보여준 웅장함과 탁월한 연출력이 다시 한 번 업그레이드되었다. 다 아는 내용인데도 스크린에서 시선을 뗄 수 없을 정도로 영화는 긴박감이 넘치고 흥미진진했으며 서정적이고 때로는 강한 리듬감으로 다가오는 노래들은 대사로 입혀진 가사와 잘 어우러져 감정을 정확히 전달해주는데 큰 몫을 했다.
영화는 배우들의 대사가 전혀 없이 158분 동안 오직 노래로만 의미 전달을 하는데 이를 위해 현장에서 라이브로 노래를 녹음하는 방식을 택했다. 때문에 배우들의 노래 대사 한마디 한마디에 감정이 살아있고 그것은 손발이 오글거리는 느낌을 벗어나 경이적이라는 탄식이 흘러나오게까지 만들었다. 영화의 시대적 배경이 된 가난한 민중의 현실과 시민들의 혁명에 관한 이야기가, 변화를 꿈꾸며 대선을 치른 대한민국 국민들의 마음을 실제로 만져준 것인지 영화는 개봉 18일만에 국내관객 400만명을 끌어들이면서 승승장구하고 있다.
스토리의 큰 줄기는 이렇다. 프랑스 혁명이 일어난 뒤 26년 후, 국민들은 빈곤에 허덕이고 나라 전체가 혼란스러운 상황에 놓인다. 물가가 천정부지로 솟은 탓에 굶주림을 면하기 위해 장발장은 유리창을 깼고,빵 하나를 훔친 대가로 19년의 옥살이(정확히는 노역)를 하게 된다. 가석방된 장발장은 신부의 호의를 입고 성당에서 하룻밤을 지내게 되지만, 사회에 대한 증오심이 끓어오른그는 은식기를 훔쳐 달아났다가 경찰에게 잡혀온다. 하지만 신부는 경찰에게 본인이 모두 선물로 준 것이맞다고 하면서 “잊고 간 은 촛대도어서 가져가라”며 용서를 베풀어준다. 신부의 은혜도 모르고 나쁜 짓을 저질렀던 그는 신부의 용서와 가르침에 감동, 참회의 눈물을 흘리며 새사람으로 거듭난다. 하지만 장발장은 가석방된 채 도주한 자신을 찾는자 베르 경감에게 평생을 쫓기며 성공하지만 숨어사는 인생을 살아간다.
‘나는 누구인가’장발장이 던지는 정체성에 관한 화두
19년간의 감옥 생활에서도 장발장이 정확히 인지하고 있던 것은 바로 ‘죄를 지은 건 저들이다’라는 것이었다. 굶어죽는 조카를 위해 빵을 훔친 것은 ‘긍휼’ 혹은 ‘인류애’의 결과가 아닌가. 때문에 사회 구조적인 모순에 희생되어 징역살이를 했던그는 자신을 죄인으로 바라보지 않았다. 그리고 장발장은 끊임없이 스스로에게 바로 ‘나는 누구인가?(Who am I?)’라는 질문을 던진다. 그는 치열하게 삶을 살고 은혜를 베풀면서 자신이 누구인지를 고민하는데, 그 고민은 결국 영화를 보는 우리들에게도 동일한 질문으로 다가온다.
장발장이라는 이름으로 살아온 그는 감옥에 들어가 복역을 하면서 ‘장발장’이라는 이름 대신‘24601번’이라는 새로운 번호를 부여받는다. 그것은 부모님이 밤새 고심하며 뜻을 부여하거나, 인격이 있는 이름도 아니고 그저 일련으로 매겨진 숫자일 뿐이다. 가석방 되어 나가게 되자 그는 24601이라는 죄수번호도 장발장이라는 이름이 적힌 신분증도 찢어버리고 신분세탁을 한다. 탁월한 감각과 노력으로 성공한 사업가가 되고 한 도시의 시장이 되었음에도 언제 붙잡힐지 모른다는 불안감에 쫓기는 삶을 살던 그는 자신을 대신해 다른‘장발장’이 잡혔다는 소식을 듣는다. 고민에 빠진 그는 결국 진실을 밝히기 위해 법정에 가 자기를 드러내기로 결정한다.
신분이탄로 난 그는 도망친 뒤 또 다시 신분을 속이고 몇 년간 숨어살게 되는데 후에 다시 한 번 자신이 장발장임을 밝히는 순간이 온다. 그것은 딸 코제트가 사랑하는 남자 마리우스에게였다. 노년이 된 장발장은 모든 것을 내려놓고 딸의 행복을 위해 사라지기로 결심하며 마지막으로 마리우스에게 자신이 누구인지를 밝힌다. 그리고 장발장이라는 이름으로 생을 마감한다.
그는 비록 쫓기는 삶을 살았을지는 몰라도 그는 끊임없이 자신의 정체성에 대해 고민하며 진리를 찾기 위해 노력했던 인물임을 알 수 있다. 부단한 질문 끝에 얻은 결론은 자신이 24601도 아닌, 시장도 아닌, 코제트의 아버지도 아닌 장발장이라는것! 그리고 그의 깨달음은 자신이 ‘장발장’임을 밝혀야 할 중요한 순간에 용기를 내어 커밍아웃을 하는 대담함으로 그를 인도해주었다. 그것은 아마도 배고픈 조카를 위해 유리창을 깨고 빵을 훔친 그가 가졌던 동일한 용기였을 것이다. 그 용기의 근원은 다른 사람을 자신 때문에 곤경에 빠뜨리면 안 된다는 이웃에 대한 ‘사랑’때문이었고 딸에 대한 ‘사랑’때문이었다. ‘사랑 안에 두려움이 없고 온전한 사랑이 두려움을 내쫓나니(요일4:18)’의 말씀이 생각나는 대목이다. 장발장에게 사랑이 없었다면 용기를 가질 수 없었을 것이다. 그런 면에서 그는 이 땅에 받은 ‘은혜’로 말미암아‘사랑’ 을 내어주고 간 인물로 그려진다.
판틴의 삶에 적용된, 인간의 삶을 파멸시키는 사단의 전략
코제트의 엄마인 판틴이라는 인물을 통해 하나님이 우리들 각자에게주신 정체성이 어떤 방식으로 파괴되고, 삶에 거짓들이 들어오며 사람들을 파멸의 길로 이끄는지를 볼 수있다.
미혼모인 판틴은 여관에 아이를 맡겨놓고 자신은 다른 지역에 있는 공장에서 일하며 살아가고 있지만 우연한 일로 그녀에게 아이가 있다는사실이 드러난다. 공장에서 함께 일하던 여인들은 그녀에게 ‘순진한 척하더니 뒤로 호박씨를 깠다’는식으로 공격하고, 그녀는 사람들의 비난과 저주를 받으며 공장에서 쫓겨난다.
돈을 벌 수 없게 된 판틴이 딸의 양육비를 마련하기 위해 간 곳에서 그녀의 삶은 짓밟히기 시작한다. 그녀에게 돈이 필요하다는 것을 안 늙은 여자가 판틴의 아름답고 긴 생머리를 잘라 팔게 만들고, 들쑥날쑥 잘려버린 더벅머리의 판틴에게 돈을더 주겠다며 그녀의 생니를 뽑아버린 뒤 지독한 통증을 가라앉힐 겨를도 없이 그녀를 남자들에게 팔아넘긴다. 그리고 판틴은 냄새나고 더러운 시궁창 같은 곳에서 남자들에게 철저하게 유린당한다.
‘젊음을 비싸게 팔아라’며 매춘을 강요당하고 나락까지 떨어진 경험을 하고 난 그녀에게 주위 사람들은 ‘너도 나랑 다를게 없다’, ‘밑바닥까지 떨어졌다’라고 속삭이며 그녀의 정체성을 마구 흔들어 놓는다. 결국 판틴은 ‘모든 것이 잘못되어 버렸다’ 고 좌절하고 돌아갈 길을 찾지 못한채 모든 꿈이 짓밟힌 악몽같은 그곳에 모든 것을 포기한 채 머무르게 된다. 그리고 몸과 마음이 지옥으로 떨어져버린 판틴은 절규하듯이‘I dreamed a dream(나는 꿈을 꾸었었네)’이라는 독백을 한다.
나는 지나가 버린 옛날 꿈을 꾸었어요
그 때는 희망이 가득하고 삶은살만한 가치가 있었죠…
곤경은 한밤중에 찾아와요 목소리는
천둥처럼 부드럽지만
소망을 갈기갈기 찢어버리고 꿈을 수치심으로 바꿔버리죠…
이루어지지 않는 꿈도 있죠 헤쳐나갈 수 없는 폭풍도 있구요…
지금 내가 사는 지옥과는 아주다른 인생을 사는 꿈을 꾸었었죠
삶은 내가 꿈꿔왔던 꿈을 죽이고
말았네요 내가 꾸었던 꿈을
우리에게는 누구나 한 번쯤은 꿈꾸던 것이 짓밟히거나 좌절된 경험이있다. 그래서인지 절망의 늪에 빠진 판틴이 부르는 가녀리고 애절한 노래가 절규로 치달을 때, 토할 듯 복받쳐오는 설움을 공감하게 되는 것 같다. 우리는 처음에는 꿈과 희망에가득 찬 삶을 살지만 어떤 순간에, 큰 사건이든 작은 사건으로 인해 무언가가 잘못 엉키게 되는 경험을 하게된다.
그래서‘목소리는 부드럽지만 소망을 갈기갈기 찢어버린다’는 대사는 많은 생각을 하게 한다. ‘참소하는자’답게 사단은 시련 중에 찾아와 부드러운 목소리로 흔들리는 삶에 계속해서 거짓말을 불어넣는다. 그리고 우리의 꿈을 빼앗고 그곳에 수치심을 집어넣는다. 아담이 선악과를 따먹었을 때 ‘내가 부끄러워 숨었나이다’라고 고 했던 수치심이다. 결국 수치심에 가득 싸인 우리들은 하나님을 피해 숨게 되고 꼼짝없이 어둠에 갇힌 채 원하지 않는 힘든 지옥과 같은 삶을 살게 되는 것이다.
은혜를 입고 살아가는 장발장과 율법에 충실한 자베르
경감 자베르는 자기 신념이 확실한 사람으로 자기가 믿는 것을 위해 열심히 노력하는 사람이다. 감옥에서 죄수의 아들로 태어나 태생부터 사회에 속할 수 없는 소외자로 살아왔다. 그는 태생이 주는 한계에서 벗어나기 위해 죄를 혐오하는 편에 서기로 한다. 그리고 그는 죄를 정죄하고 들추어내는 감시자의 역할을 맡아살아간다. 때문에 ‘정의’로 통칭되는 자기 신념은 그에게 무엇보다 더욱 중요한 인생의 기준이 되었다. 자베르나 영화에 등장하는 경찰들은 모두 ‘직무에 충실하다’는 평가를 받으며 살아나가는데 은혜를 모르고 율법만 강요하던 성경 속 율법학자들과 바리새인들을 떠올리게 한다.
혁명을 위해 모인 곳에 위장을 하고 들어왔다가 탄로나 사로잡힌 자베르는 장발장을 만나고, 자신을 죽일 수도 있던 순간에 장발장이 자신을 살려준 것에 대해 상당한 충격을 받는다. 자기가 잡기 위해 평생을 쫓아온 죄수가 자신의 목숨을 구해준 구원자가 된 것이다. 게다가 장발장이 죽을 위험을 무릅쓰면서까지 다른 사람을 살리는 모습을 보고 자괴감에 빠진다.
죄를 극도로 혐오하고 정의를 실행하기 위해 법 앞에서는 자비를 논하지 않는 철두철미한 자기 신념주의자에게 절체절명의 순간에 들이닥친 구원과 은혜는 그가 믿고 있던 신념을 송두리째 뒤흔들게 된다. 자베르는 마음이 흔들릴 때마다 건물 옥상에 올라가 난간을 걷는 모습을 보여주는데 위태위태한 그의 마음을 대변하는 이러한 행동들을 보며 관객들 또한 아슬아슬함을 느낀다. 결국혼란에 빠져있던 그는 장발장을 잡으러가는 대신 자살을 택한다. 반면 장발장은 은혜를 경험하고 은혜를 베푸는 삶을 살아가는 인생을 보여준다. 장발장을 구해준 신부는 그에게‘높으신 그분의 뜻을 알고 정직하게 살아가라’며 은혜를 베푼다. 죄인인 자신을 손님으로 대접하고 구원을 베풀어준 신부를 만나고 ‘신부의 용서가 내 영혼을 움직였다’고 고백하던 장발장은 변화된 삶을 살기 위해 노력한다. 노인 포슐레방이 마차에 깔렸을 때 신분 노출의 위험이 있었음에도 그곳을 지나치지않고 괴력을 드러내며 마차를 들어내 그를 살려낸다. 또 판틴이 죽어가며 부탁한 딸 코제트를 딸로 삼아 아름답게 성장시킨다. 아무런 의미가없던 인생에 한줄기 빛으로 들어온 코제트를 바라보며 비로소 삶을 찾았다고 고백하며 그녀를 위해 자신의 삶을 희생한다.
은혜를 경험한 장발장은 숨어 다니고 가면을 쓴 채, 정체성을 잃은 채살아야하는 자신의 처지에도 불구하고 다양하게 베푸는 삶을 살아간다. 그리고 마지막 죽어가는 순간에 자신은 축복된 삶을 살았다고 고백한다. 평생을 쫓겨 다녔으면서도 결국 그것이 ‘은혜’이고 ‘축복’이었음을 고백하는 장발장. 그의 소박한 고백앞에서 사람들은 숙연해질 수 밖에없는 것이다.
변화를 바라는 성난 민중들이 가득한 시대 속의 사랑과 혁명
영화를 관통하는 또 하나의 큰 줄기는 가난을 참지 못하고 일어선 민중들의 봉기일 것이다. 그리고 그중에서도 혁명을 위해 붉은 깃발을 드는 비밀 결사대의 주요 인물이면서도 첫 눈에 사랑에 빠져버려 순식간에 사랑이 세상의 전부라고 믿게 된 마리우스의 이야기는 그 중심에 놓여있다.
장발장을 따라 시내로 나온 코제트를 본 마리우스는 단번에 사랑에 빠진다. 그녀가 사는 곳을 알기 위해 에포닌에게 부탁을 하고, 마리우스를 짝사랑하고 있던 에포닌은 질투의 감정도 표현하지 못한 채 그를 위해서 그가 기뻐하는 일을 한다. 혁명이 일어나기 전날, 친구들은 혁명을 코앞에 두고 난데없이 사랑에 빠져버려 정신을 못 차리고 있는 마리우스를 놀리고 그는 자신의 이념과 투쟁정신이 응집된 혁명과 첫 눈에 반해버린 사랑 사이에서 갈등한다.
마리우스는 결국 꼬마 가브로쉬를 시켜 코제트에게 편지를 전해달라고하고 혁명을 꿈꿔온 형제들과 남아있기로 결정한다. 하지만 혁명은 실패로 돌아갔고 혁명에 가담한 모든이들의 죽음을 뒤로 하고 마리우스는 장발장에 의해 가까스로 목숨을건진다. 그리고 코제트와 만나 결혼에 이르게 된다.
형제들이 꿈꾸던 혁명이 참혹한 실패로 돌아간 뒤, 재빠르게 귀족의 신분으로 돌아가 아름다운 코제트와 알콩달콩 살아가는 모습에서, 죽어간 혁명군들이 흘린 피에 가슴이 뜨거워졌던 사람들은 격분할 수도 있다. 하지만 한 사람을 위해 모든 것을 바치는 삶의 가치는 가볍고, 민중들이 꿈꾸는 변화나 혁명의 가치가 무겁다고 과연 누가 말할 수 있을까. 장발장은 자신의 생을 바쳐 코제트를 키워냈고, 다른 사람들을 위해 자기의 삶을 살았다. 그 모습에서 우리는 나 한 사람을 살리기 위해 목숨을 바치신 예수님의 모습을 본다. 예수님은 정부를 대항해서 혁명을 시도하지는 않았지만, 다른 생명을 위해자기의 생명을 바쳤고 그것은 결국 혁명과 변화를 이끌어냈다.
오프닝 테마곡인‘Look Down’ 중 이런 가사가 생각난다.
고개 숙여. 하늘에는 신이 없고,
땅에는 자비가 없고, 나는 죄가없네.
주님은 관심도 없어. 고개숙여. 모두 다 널 잊었어.
넌 영원한 노예일 뿐.
감독은 반어적으로 영화를 시작하고 싶었던 것이 아니었을까.
고개를 들어. 하늘에는 신이 있고, 나는 죄가 있지만 땅에는 자비가 있네.
주님은 내게 관심을가지고 계셔. 고개를 들어. 하나님이 널 기억해. 넌 노예가 아닌 자유야
이렇게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