잠수종과 나비

잠수종과 나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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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INGDOM LIFE &

힐링시네마
잠수종과 나비

 

작가 이애경

 

때로는 인간의 상상보다 실화가 더 거짓말 같이 느껴지는 경우도 있다. 뇌졸중으로 쓰러진 뒤 감금증후군 진단을 받고 한 쪽 눈을 깜빡이는 것으로 의사소통해 130여 페이지 분량의 책을 쓴 기적의 주인공 “장 도미니크 보비”. 1997년 그는 자신의 이야기를 담은 <잠수종과 나비>를 출간했고 열흘 후 사망했지만, 그 이야기는 영화로 만들어져 관객들을 울렸다. 잠수종(Diving Bell)처럼 자기 몸 안에 갇힌 채 아무것도 할 수 없게 되었지만 영혼은 나비처럼 자유로웠던 한 남자의 날갯짓은, 우리에게 삶의 열정이란 무엇인지에 대해 생각하게 하는 작은 파장을 일으킨다.

 


 

패션지 <엘르>의 편집장으로서 자유분방하고 자신만만하게 살았던 장 도미니크 보비는, 어느 날 아들과 드라이브를 가다가 뇌졸중으로 쓰러진다. 20일을 혼수상태로 보낸 뒤 눈을 뜬 그에게 다가온 의사는, 그가 감금증후군(Locked-in Syndrome)에 걸렸다는 진단을 내린다. 감금증후군이란 전신마비 증세와 유사해 몸에 운동 감각, 기능이 전혀 없어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상태로, 인식은 가능하지만 반응은 할 수 없는 상태다. 오직 눈만 자기 의지대로 움직일 수 있는데, 안타깝게도 오른쪽 눈마저 궤양의 우려가 있어 봉합되어 버리자, 보비는 왼쪽눈으로만 살아가게 되는 환경에 처한다.

전도유망하고 남부러울 것 없이 살았던 보비는 이제 다른 사람의 도움이 없이는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처지가 되었다. 혀의 기능이 마비되어 음식을 씹을 수 없으므로 식도를 뚫어 영양분을 공급받아야 했고, 근육조절기능이 없어 기저귀를 차야했다. 다른 사람들이 그를 씻겨줘야 했고 방향을 바꿔주지 않으면 계속 같은 곳만 바라볼 수밖에 없는, 아무것도 스스로 할 수 없는 상황이 된 것이다.

하루아침에 모든 것이 바뀌어버린 그가 가장 처음 한 것은 사람들과 소통하는 법을 배우는 것이었다. 많이 쓰는 알파벳을 시작으로 언어치료사가 알파벳을 순서대로 불러나가면, 본인이 원하는 알파벳에 눈을 깜빡여 표시를 하는 식으로 사람들과 소통하는 법을 익혀 나가기 시작했다. 침대 위에 누워 꼼짝하지 못하게 된 보비가 알파벳으로 소통하는 방법을 새롭게 배워 말한 문장은 아이러니하게도 “죽고 싶다!”였다. 그는 이런 상황에 처한 자신의 처지를 냉소적으로 비관한다.

다행히도 그를 지켜주고 돕는 사람들 덕에 보비는 조금씩 마음이 변화된다. 결혼이라는 구속을 싫어하는 보비의 자유주의 성향 덕택에 세 아이의 엄마이지만 아직 아내는 되지 못한 셀린느는 자주 찾아와 그의 곁을 지키고 위로해준다. 눈으로 말을 하는 방법을 가르쳐준 언어치료사는 그와 꾸준히 눈으로 커뮤니케이션 하며 그의 마음을 어루만진다. 그리고 근육을 조금씩 움직일 수 있도록 도와주는 운동치료사 등 많은 사람들이 보비의 곁에서 그의 재활을 돕는다.

수많은 사람들의 노력과 자기와의 치열한 싸움을 견뎌낸 그는, 자신을 더 이상 불쌍하게 여기지 않고 열심히 살겠다고 결심한다. 그리고 보비는 건강할 때 계약해놓은 출판계획 약속을 깨지 않고, 그 상태에서 책을 쓰기로 결정한다. 마흔 세 살에 쓰러져 감금증후군에 갇혀버린 자신의 이야기를 담은 <잠수종과 나비>는 그렇게 시작된다. 15개월 동안, 120만 번의 눈의 깜빡임 끝에 130여 페이지 분량의 책이 만들어지게 된다.

 

세상을 보는 시선, 진실을 보는 시선

영화는 뇌졸중으로 쓰러졌다가 의식이 돌아온 보비가 깜빡이는 눈꺼풀 사이로 투시되는 사물들과 인물들을 응시하는 흐릿한 시선처리로 시작된다. 그를 들여다보는 의사들이 보이기 시작하자 심장박동이 조금 더 빨라지며 긴장감이 더해진다.

사랑하는 딸과 아들을 안아줄 수도 없고 한 마디 말도 해줄 수 없는 보비의 슬픔은 뿌옇게 흐려지는 화면을 통해서도 전달된다. 병원에 와보고 싶지만 몸이 좋지 않아 올 수 없는 92세의 아버지와의 통화에서도, 보비의 좋았던 모습만을 기억하고 싶어 병원에는 올 수 없다는 애인의 전화 뒤에도 그의 뿌연 슬픔은 고스란히 전달된다.

영화 초반에는 화면이 상당히 제한되어 있어 답답함을 느끼기가 쉽다. 보비가 거울을 통해 자기 모습을 보는 것을 거부했기 때문에 보비의 얼굴은 관객들에게도 보여지지 않는다. 그렇게 답답했던 시선처리가 끝나는 지점은 그가 자신을 불쌍히 여기지 않겠다고 결심한 이후, 자기가 잘 생기고 유쾌하고 섹시한 사람이었다는 것을 기억해낸 때부터다.

우리들은 비밀을 감춰야한다는 두려움에 사로잡혀 진실된 나를 드러내놓는 것을 꺼려한다. 어쩌면 우리 모두에게도 늑대인간처럼, 감추고 싶은 비밀들이 인생에 숨어있을 지도 모른다. 이것이 밖으로 표현될 때, 하나님 앞에 토설되고 용서받아야 할 것들이 용서될 때, 우리는 엄마처럼 따뜻한 하나님의 품으로 들어갈 수 있게 되는 것이다.

일그러진 입술, 그 사이로 흘러나오는 침, 뻣뻣한 몸, 과도하게 끔뻑거리는 한쪽 눈. 보비가 자신의 모습을 거울을 통해 처음 조우하게 되는 순간, 관객들도 동일하게 그의 모습과 처음 조우하게 된다. 그것은 모두에게 작은 충격으로 다가온다. 하지만 이미 마음의 준비가 되어 있었기에 그 장면은 슬프거나 괴로움으로 발전하지는 않는다.

비록 외형은 달라졌다 하더라도 근본은 변하지 않듯이, 보비는 자신이 어떤 정체성을 갖고 있던 사람인지를 기억하고 그것을 바탕으로 살아간다. 자신감 넘치고 매력적이었던 그. 그는 지금 현재 ‘눈에 보이는 것’을 진실로 믿지 않고 과거의 기억과 자기의 정체성을 기억해내며, 그것에 근간을 두고 ‘눈에 보이지 않는 것’을 진실로 믿고 살아가기 시작한 것이다.

 

절망의 끝에서 선포되는 희망의 말들

처음 보비가 눈을 떴을 때 의사들과 간호사들은 한결같이 희망적인 이야기를 해준다. 물론 감금증후군에 걸려 전신이 마비된 형태로 있다는 사실은 숨기지 않고 말이다. 의사는 “놀라지 마세요.”, “저희들이 보비 씨를 보살펴드릴 겁니다.”, “깨어나셨으니까 좋아질 겁니다. 저를 믿어보세요.”라는 말로 보비를 안심시킨다.

물론 전신이 마비되어 몸을 전혀 쓸 수 없다는 소식을 들은 그는 자괴감과 충격에 빠진다. 병원에 있는 사람들은 그가 살아났다고 기뻐하지만 이렇게 사는 것이 과연 ‘삶’이라고 표현할 수 있는 것인가에 대한 혼란에 휩싸인다. 그렇게 그는 자기의 상태와 상황을 인식하기 시작한다.

그가 눈으로 말하는 법을 배워 처음 뱉은 문장은 ‘죽고 싶다’는 것이었다. 언어치료사는 그와의 소통을 처음 시도하면서 그가 말하고 싶은 스펠링에 눈을 깜빡이는 형식으로 커뮤니케이션을 하다가, 그가 ‘죽고 싶다’는 단어를 이야기하려한다는 것을 안다. 순서대로 알파벳을 읊는 그녀의 눈시울이 붉어지고 목소리가 떨리기 시작한다. 보비가 죽고 싶다는 단어의 스펠링을 모두 완성하자 그녀는 어떻게 사랑하는 사람들을 두고 그런 생각을 할 수 있냐고, 보비는 그녀에게도 소중한 사람이라고 진심을 이야기한다.

일반적으로 사람들이 예상외의 불행을 받아들일 때는 강한 부정(내게 이런 일이 생길 리가 없어!)-분노(왜 다른 사람은 멀쩡하고 나에게만!)-타협-체념-수용 등의 일정한 심리 단계를 거친다고 하는데, 보비의 경우도 동일하다. 물론 이 과정이 다소 부드럽고 빠르게 지나간다.

말을 하지 못하는 그의 생각들은 독백으로 처리되는데, 처음에는 인간답지 못한 삶은 삶이 아니라고 생각하고, 입술은 흉하게 일그러져있고 눈 한 쪽은 꿰매진 자기의 모습이 괴물 같다고 여기고, 다른 사람들에게 분노하지만 차차 인정하는 형태를 띠게 된다. 아마도 그의 자유로운 마인드 속에 강하게 자리 잡고 있는 자기애와 인식의 자유로움이 주변 사람들의 긍정적인 말들을 통해 이런 상황 속에서 그를 긍정적으로 이끌어낸 원동력이 되지 않았나 싶다.

근육훈련이 계속되는 동안에도 희망의 말들은 계속된다. “정말 잘했어요. 혀를 움직여 봐요.”, “걱정 마세요. 감각이 돌아올 거예요.” 같은 긍정의 말을 간호사들이 계속해 주었다. 실제로 나중에는 신음소리 같긴 하지만 노래를 할 정도로 근육의 감각이 조금씩 돌아오기도 했다.

 

트라우마, 절망적 기억에 맞서다

자기 몸 안에 갇혀있게 된 보비는 잠수종에서 벗어날 수 있는 유일한 수단이 기억과 상상력이라고 인식하며, 그것들을 활용해 살아갈 것을 다짐한다. 가장 자유로운 시간은 상상과 기억의 날개를 펼치는 시간. 물론 기억이라는 것에는 양면이 있다. 기억은 그를 자유롭게 해주는 것이기도 하지만, 고통 속으로 밀어 넣는 도구이기도 하다. 자유롭게 무엇이든 할 수 있었던 시절의 기억을 떠올리고 그 때를 상상하며 행복해할 수도 있지만, 아들의 머리 한 번 쓰다듬어주지 못하는 현실은 철저히 파괴적이고 고통을 줄 수 있기 때문이다. 그 기억의 양날 중에 긍정적인 것을 택하기로 하는 결정은 뜻밖에도 그가 피하고 싶었던 트라우마와 정면으로 맞부딪히는 데서 비롯되었다.

그의 인생에서 가장 피하고 싶었던 만남은 바로 피에르 루쌩과의 만남이었다. 피에르 루쌩은 몇 년 전 보비가 타려고 했던 비행기 좌석을 양보해 달라고 도움을 청해 결국 비행기를 바꿔 탔다가 어처구니없게 사고를 겪은 인물이었다. 운명의 장난처럼 그 비행기가 납치된 것이었다. 납치된 채 4년 4개월 동안의 감금생활을 한 피에르 루쌩이 후에 석방되어 돌아왔지만, 보비는 그에게 연락을 하지 못했다. ‘죄책감’ 때문이었다. 보비가 비행기 자리를 양보하지만 않았어도 그는 납치되지 않았을 테니까 말이다.

그렇게 저만치 미뤄둔 고통과 죄책감을 해결하고자 뚫고 나온 건 놀랍게도 피에르 루쌩 자신이었다. 그 고통을 겪고 이겨낸 그가 쓰러진 보비에게 찾아와 위로와 격려를 하기 시작한다. 고통과 증오를 극복하고 찾아온, 상처 입은 치유자인 그가 보비의 ‘죄책감’과 맞선 것이다. 피에르는 자신이 인질로 잡혀 캄캄한 방에 감금되어 있는 고통이 보비가 겪는 고통과 비슷했다고 자신의 이야기를 시작한다. 그 당시 자살하고 싶은 충동도 느꼈는데, 무덤 같은 곳에 감금되어 있는 것보다 더 큰 고통은 기약이 없는 기다림이었다는 것. 그는 그래도 포기하지 않았다고, 인간으로서의 나를 포기하지 않았다고, 보비에게도 포기하지 말라고 권유한다.

결과는 피에르의 승리였다. 상처 입은 치유자가 상처로 고통 받는 자를 치유하기 시작했다. 피에르가 먼저 그에게 손을 내미는 것으로 보비가 갖고 있던 과거에 대한 죄책감이 치유되었고, 비슷한 고통을 겪었던 그가 보비에게 희망의 메시지를 던져줌으로써 부정적이던 시각에 변화가 생긴다. 그 날 이후 보비는 ‘죽고 싶다’는 말을 하는 것으로 감정의 바닥을 친 뒤, 조금씩 회복되기 시작한다. 자기의 인생이 실수투성이였다는 것을, 기회도 놓치고 행복한 순간을 그대로 다 놓쳐버렸다는 것을 깨닫는다. 그리고 처음으로 사람들에게 ‘고맙다’는 표현을 한다.

하나님은 내 안에 있는 생명을 살리시기 위해, 내 안에 잠재되어 있는 생명에 활기를 불어넣고 자유롭게 터져 나오도록 이끄시기 위해, 가끔 내가 잊고 싶은 나쁜 기억들을 맞닥뜨리게 하시는 경우가 있다. 사람을 통해서든 사건을 통해서든 깊이 감춰두고 묻어두었던 상처, 죄책감, 고통을 다시 한 번 조명해주신다.

그것을 피하지 않고 맞섬으로 내 안에 새로운 생명을 불어넣을지, 아니면 외면하고 더 깊이 숨어버림으로써 죄책감과 상처를 더 깊이 오랫동안 쌓아둘 지는 우리에게 달려있다. 몸은 비록 갇혀있으나 마음과 생각은 자유롭게 되었던 보비와는 반대로, 몸은 멀쩡하고 움직이고 삶을 영위할 수는 있으나 마음과 생각이 완전히 잠수종에 갇혀버린 사람으로 평생을 살아갈 수도 있다. ‘포로된 자에게 자유를 갇힌 자에게 놓임을 선포(사 61:1)’하기 위해 오신 하나님의 빛을 받아들이는 것은 고스란히 우리의 몫이다. 가장 피하고 싶은 그곳이 강한 생명이 숨겨있는 곳일 수 있다.

 

죽을 만큼 절망적인 기다림의 시간, 해야 할 일은?

와인 마니아였던 피에르는 죽을 것 같은 절망의 시간 동안, 포로로 갇힌 기다림의 시간 동안 계속해서 와인의 이름을 외웠다고 했다. 그렇게 그는 절망의 시간을 견뎌냈다.

인생의 과정에는 잠수종에 갇힌 것 같은 생각이 드는 시절이 분명히 온다. 뭔가 내 뜻대로 전혀 할 수 없는 시간, 아등바등 거려도 아무것도 해결되지 않고 그대로인 시간, 끊임없는 기도와 간구로 살려달라고 외쳐 봐도 하나님이 전혀 꿈적하지 않으시는 것처럼 느껴지는 시간, 우리가 흔히 말하는 광야 같은 시간이 분명히 찾아온다.

그 죽을 만큼 절망적인 시간이 더욱 더 견딜 수 없는 것은, 그 기다림이 언제 끝날지 모르기 때문이다. 시간이 정해진 기다림이라면 손꼽아 기다리면 그 뿐이지만, 기약이 없는 기다림은 사람의 피를 말리게 하는 고통을 준다. 피에르가 그 고통을 바꿀 수 있었던 유일한 도구는 작은 움직임이었다. 긍정적인 생각과 작은 움직임. 피에르는 와인의 이름을 외우는 것을 택했고, 보비는 책을 쓰는 것을 택했다. 어처구니없이 노예가 되고 죄수가 된 요셉은 보디발의 집에서 그리고 감옥에서 열심히 일하는 것을 택했다. 혹시, 죽을 만큼 절망적인 시간 속에서 무언가를 기다리고 있다면, 그 기다림의 시간 동안 무엇을 할 것인가? 그 선택은 우리 자신에게 달려있다. 내가 어쩔 수 없는 상황은 잊고 내가 할 수 있는 기적을 만들어 낼 것인지, 아니면 어쩔 수 없는 환경만을 탓하며 그 광야 속에 계속 머무르고 있을 것인지는 전적으로 나에게 달려있다.

 

소소한 것에서 느끼는 기적, 행복

언어치료사와 눈으로 대화를 할 때 그녀의 표정 속에서 행복이 보인다. 그녀가 알파벳을 순서대로 말해 단어를 완성시켜나가는 과정에서 보비가 무슨 단어를 말하려는지 알아챌 때 변하는 표정을 따라 관객들의 표정도 변한다. 어느 날 보비가 그녀에게 도와줘서 고맙다는 뜻인 ‘merci’를 말하기 시작하자, 보비를 빤히 쳐다보며 알파벳을 빨리 말하는 그녀의 표정 변화는 이 영화의 가장 아름다운 장면 중 하나다.

토끼털로 만든 모자를 가지고 와서 자기 맘대로 씌워 놓고는 자신을 쳐다보지도 않고 알파벳을 읽어 내려가는 어설프고 어이없는 친구의 행동에서도 그는 냉소적으로 웃지만, 관객들은 그의 유머를 느끼기 시작한다.

코끝에 붙어있는 파리를 쫓아내기 위해 가까스로 머리를 조금 움직이자 병동이 소란스러워지기 시작한다. 그가 머리를 움직이는 것을 ‘기적’이라고 부르며 사람들이 달려들었기 때문이다. 이 소소한 것들은 모두 기적의 재료들이다.

어떻게 보면 기적은 죽은 사람이 살아나거나, 암에 걸린 환자가 치유가 되는 것처럼 그렇게 거창하지 않은 것일 수도 있다. 상대방에게 던지는 작은 미소 한 번, 다른 사람의 생각을 알아채는 마음의 소통, 실수투성이지만 마음이 전해지는 친구의 행동, 오랜만에 만난 아버지의 수염을 밀어드리는 것, 휠체어에 탄 채 바닷바람을 맞는 것 또한 삶에서 일어나는 소소한 기적일 수 있다. 그 모든 것이 살아있기에 가능한 일이다. 살아있음은 그 자체로 기적이기 때문이다.

이 영화가 뻔한 휴먼 감동스토리가 되지않은 것은 눈물을 강요하는 장면을 억지로 집어넣지 않고, 그의 시선의 흐름을 따라 삶의 흐름을 따라 벌어지는 일들과 사람들과의 관계를 담담히 그렸기 때문이다. 현실과 상상을 엄하게 가르듯이 뚝뚝 끊어버리고 장면을 전환하는 편집 스타일은 관객들을 당황하게 만들기도 한다. 그만큼 주인공의 현실은 혹독하다는 것을 영화를 보는 사람들에게도 인지시킨다.

걷기가 불편해 주인공에게 가지 못하는 보비의 아버지가 ‘너는 네 몸에, 나는 이 아파트에 갇혀있어.’라고 한 말은 인상적으로 남는다. 보비는 자신의 몸에 갇히게 되었는데도 정신만은 자유로웠고, 치열하게 삶을 살았고 그것으로 기적을 이뤄냈다. 부정하고 싶었던 병원에서의 삶을 인정하며 ‘내 삶은 이곳에 있다. 이곳이 영원한 내 안식처다.’라고 인정하기시작하고 책을 쓰는 기적을 이뤄냈다. 아무것도 할 수 없음을 극복하고 탄생한 것은, 마치 누에고치가 나비가 되듯 상상할 수 없는 획기적이고 차원을 넘는 변화다. 혹시 나는, 어디엔가 갇혀있다고 생각하고 있지는 않는지. 옴짝달싹 할 수 없는 무엇엔가 갇혀버린 채 살고 있다면 이젠 그곳에서 벗어날 때다. 나비처럼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