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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한다! 우울한 나의 자녀야. Ⅲ

사랑한다! 우울한 나의 자녀야. Ⅲ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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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INGDOM LIFE &

건강
사랑한다! 우울한 나의 자녀야. Ⅵ

 

한양의대 교수 김석현

 

지난 호에서 다루었던 “우울한 기분”에 대해 독자 몇 분께서 의견도 주시고 질문도 보내주셨습니다.
그 내용이 킹덤 라이프를 영위하면서 우울이라는 적과 싸워나가는데 매우 실질적이어서,
이번 호부터 다루기로 했던 “킹덤 인지치료”는 잠시 미루고 질문에 대한 답변을 나누기로 하겠습니다.

 

질문1

우울한 기분을 쫓아내어야만 하는 이유를 좀 더 구체적으로 설명해 주세요.

잘 아시는 바와 같이 우리는 영·혼·육으로 이루어진 존재입니다.
필요에 따라서 영·혼·육을 영과 육으로 나누기도 하고, 영혼과 육신으로 나누기도 합니다.
여기서는 이 질문에 대한 좀 더 명확한 답변을 위해 “영”과 “혼·육”으로 나누어서 설명하고자 합니다.
이렇게 나눌 수 있는 근거는 다음과 같습니다.

우선 우리의 영·혼·육 중에서 온전히 구원받은 것은 “영” 뿐이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구원을 받았다거나, 의인이 되었다거나, 새로운 피조물이 되었다거나,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다는 등의
다양한 표현으로 설명하는 현상의 가장 중요한 변화는 우리의 영 안에 성령님께서 거하신다는 것입니다.
성령님께서 우리의 영 안에 거하심으로 인하여 앞서 나열한 여러 가지 변화가 우리에게 일어나는 것입니다.
그 순서에 대해서는 신학적으로 다른 의견이 있을 수 있겠지만, 이러한 변화가 성령님께서 우리 안에 거하시지 않고서는
일어날 수 없는 일이라는 것에는 이견이 있을 수 없을 것입니다. 성령님께서 우리 안에 계심으로 인하여
우리는 성령님의 통치 아래 거할 수 있게 되고,

우리의 영으로부터는 언제나 하나님의 영향력, 능력, 말씀, 믿음이 흘러나와 우리의 혼과 육에 영향을 미칩니다.
그러나 아직 우리의 혼과 육의 구원은 완전하지 않아 구원을 계속해서 이루어가야 하기 때문에,
“영”과 “혼·육”으로 나누는 것이 가능하기도 합니다.
우리를 “영”과 “혼·육”으로 나눌 수 있는 또 다른 근거는,
혼과 육이 우리의 영으로부터 흘러나오는 하나님의 영향력에 어떻게 반응할지를 합작하여 결정하기 때문입니다.
성령님께서 내주하심으로 인하여 우리의 영에서는 하나님의 영향력이 끊임없이 넘쳐흐르고 있기 때문에,
죄의 병기였던 우리의 혼과 육이 드디어 의의 병기로 사용될 수 있는 가능성이 열렸습니다.
우리의 혼과 육은, 다른 말로 정신과 육체는 끊임없이 상호작용하면서 영으로부터 오는 영향력에 반응합니다.
그러나 우리의 혼과 육이 하나님의 영향력을 받아들이고 순복하는 정도는 사람마다 또는 상황마다 또는 사안마다 달라질 수 있습니다.
그래서 어떤 때는 온전히 하나님을 나타내는 사람으로 살다가도, 어떤 때는 구원받았는지가 의심스러운 상태로 살기도 합니다.
이런 이유에서 “영”과 “혼·육”으로 나눌 수 있습니다.
영은 언제나 동일하게 하나님의 영향력을 흘려보내지만, 혼·육은 긴밀히 상호작용하며 시시각각 다른 형태로 그 영향력에 반응하여,
하나님을 대적하기도 하고 하나님께 순복하기도 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구분이 유용한 또 한 가지 이유는 악한 영의 영향력에 노출되는 곳이 혼과 육이기 때문입니다.
악한 영은 성령님께서 거하시는 우리의 영을 공격할 수는 없지만, 우리의 혼과 육은 얼마든지 공격할 수 있습니다.
우리의 혼과 육에 남아있는 죄의 흔적들을 자극하고 유혹하여, 성령의 소욕이 아니라 육신의 소욕대로 생각하고 느끼고 말하고 행동하도록 만듭니다.
이것을 정확하게 이해하지 못하게 되면 건강에 어떤 문제가 생겼을 때 “이것이 영적인 문제인가요? 아니면 질병인가요?”라고 묻게 되기도 합니다.
특히 원인이나 병변이 눈에 보이지 않는 정신질강환의 경우에 이런 질문을 더 많이 하게 됩니다.
결론부터 말씀드리면 이 질문은 질문 자체가 틀린 것입니다.

왜냐하면 모든 문제는 영의 세계와 연관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렇게 질문하시는 이유는 크게 두 가지인데,
첫째는 우리의 영이라는 의미로 “영적인”이라는 표현을 쓸 때로,
즉 우리의 영에도 문제가 생길 수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사단은 성령님이 거하시는 우리의 영에는 손끝도 댈 수 없습니다.
둘째는 영적 존재, 즉 악한 영이라는 의미로 “영적인”이라는 표현을 쓸 때인데,
즉 이 세상에서 일어나는 일들을 영적인 부분과 물질적인 부분,
형이상학적인 부분과 형이하학적인 부분으로 구분하여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믿음으로 모든 세계가 하나님의 말씀으로 지어진 줄을 우리가 아나니 보이는 것은 나타난 것으로 말미암아 된 것이 아니니라 히11:3

 

우리가 보고 겪는 모든 것들은 볼 수 있는 어떤 것으로부터 온 것이 아닙니다.
그러므로 모든 일을 바라볼 때 보이지 않는 세계의 영향력이 더 크다는 것을 염두에 두어야 합니다.
“영”과 “혼·육”으로 나누는 것이 유용한 마지막 이유는 우리가 매일 치르고 있는 영적 전쟁의 전장이 정확히는 바로 영과 혼·육이 연결된 곳이기 때문입니다.
성령충만하다는 것은 어떤 상태를 의미하는 것일까요?
영과 혼·육의 연결통로가 활짝 열려서 성령님의 영향력이 충만히 우리의 혼·육을 사로잡을 때입니다.
그렇다면 반대로 성령충만하지 못하다는 것은 어떤 상태일까요?
어떤 이유에서든 그 연결통로가 좁아져 성령님의 영향력이 우리의 혼·육에 충분히 흐르지 못할 때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그 통로를 활짝 열어두어 온전히 성령의 소욕에 따라 살아가고 성령님의 인도함을 받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기를 원하십니다.
그러나 사단은 어떻게든 그 연결통로가 닫혀서 성령의 소욕보다 육신의 소욕에 더 민감하게 반응하도록 하여 성령님의 인도함을 받지 못하는 자가 되기를 원합니다.

생명수가 흐르는 송수관을 생각해 보십시오.
하나님께서는 상상도 할 수 없는 크기의 송수관을 우리의 영으로부터 혼과 육을 향해 내시고 이미 이루신
모든 은혜가 폭포수처럼 우리의 혼과 육을 적시기를 원하십니다.
그런데 그 송수관이 우리의 혼과 육에 연결된 부분에 개폐장치가 달려 있어서 생명수가 폭포수처럼 흘러들어오느냐
아니면 실개울의 물처럼 졸졸 흘러들어오느냐가 결정됩니다.
다시 말해 그 개폐장치를 얼마나 성령님 쪽으로 돌리느냐에 따라 흐르는 생명수의 양이 결정되는데,
그 개폐장치를 조작하는 주체가 바로 우리의 혼과 육인 것입니다.
사단은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어떻게든 우리를 그 개폐장치를 잠그는 쪽으로 움직이도록 하여
생명수를 충분히 공급받지 못하게 함으로써, 우리의 혼과 육이 말라서 육신의 소욕대로 살아가기를 원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온갖 부정적인 생각과 감정을 이용하여 우리의 의지와 행동이 개폐장치를 잠그는 쪽으로 작동하도록 하는 것입니다.
이런 악한 영향력을 미치는 감정 중 대표적인 것이 “우울한 기분”입니다. 우리가 하나님께서 바라시는 “기뻐하는” 상태가 아니라
우울한 기분을 포함한 부정적인 정서 상태에 있다는 것은 송수관이 닫혀서 생명수가 흐르지 않으므로 인해 우리의 혼과 육이 말라죽어가고 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라 그가 내 안에, 내가 그 안에 거하면 사람이 열매를 많이 맺나니

나를 떠나서는 너희가 아무 것도 할 수 없음이라 사람이 내 안에 거하지 아니하면

가지처럼 밖에 버려져 마르나니 사람들이 그것을 모아다가 불에 던져 사르느니라 요15:5-6

 

우리는 스스로 어떤 것도 할 수 없는 존재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늘 예수님 안에 거해야 하고, 예수님께 붙어있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죽을 수밖에 없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즉각적으로 우울한 기분에서 벗어나서, 한 시라도 성령님의 영향력이 줄어들지 않도록 해야 하는 것입니다.

2015_04_14

 

질문2

내가 지금 우울한지 아닌지를 알 수 있는 기준이 있나요?

이 질문이 정말 중요한 이유는 이것이 우리의 가치관,
세계관을 형성하는데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하는 판단기준을 함축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지금의 교육제도는 제가 학교를 다니던 때와는 참 많이 달라졌습니다.
그 중에서도 유난히 눈에 띄는 것 하나가 바로 ‘토론대회’라는 것이었습니다.
늘 선생님으로부터 일방적으로 지식을 전달받기만 하던 교육에서 벗어나

각자의 소신과 신념을 드러낼 수 있다는 느낌이 들어 상당히 매력적이고 교육적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런데 조금 더 그 속을 들여다 보고나서는 저는 적잖이 충격을 받았습니다.
저를 놀라게 한 것은 ‘토론대회’라는 것의 진행방식이었습니다.
제 생각에는 각자가 어떤 주제에 대해 자신의 소신과 신념을 논리정연하게 정리하여,
나와 입장이나 의견이 다른 상대를 설득해 나가는 것이 대회의 진행방식이라고 생각했는데, 실상은 그렇지 않았습니다.
토론주제는 미리 주어지지만, 준비해야 하는 것은 그 토론주제에 대한
나의 소신과 신념을 바탕으로 한 주장이 설득력을 갖도록 논리정연하게 만드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왜냐하면 대회의 진행방식이 미리 내 입장을 정하고 그것에 따라 의견을 주장하는 것이 아니라,
당일 정해지는 역할, 즉 그 주제에 대해 찬성하는 역할이 주어지느냐 반대하는 역할이 주어지느냐에 따라
나의 소신과 신념과는 전혀 상관없이 주어진 역할에 충실하게 상대팀을 제압해 나가는 방식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니까 나의 소신이나 신념, 입장은 전혀 중요하지 않고 당일 주어지는 역할을,
그것이 나의 신념과 일치하든 반대이든 간에 잘 수행해 나가는 것이 그 대회의 싸움법이었습니다.
이러한 방식은 이 시대를 관통하는 오해와 착각의 한 단면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오해란 이 세상에는 절대불변의 진리가 존재하지 않는다는 생각을 말합니다. 우리는 영원히 변치 않는 진리를 믿는 사람들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진리라고 믿는 것에 대해서는 확고부동한 태도를 지니고 있습니다. 그런데 세상은 그렇게 생각하면 안 된다고 말합니다.
그런 태도는 독선적이며 편을 갈라 사람들을 분열시키고 세상을 어지럽게 한다고 말합니다.
착각이라고 하는 것은 그렇게 절대불변의 진리가 없다고 하면서 너도 옳고 나도 옳으니 서로를 인정하고 존중하고
포용하면 갈등 없이 화합하여 잘 살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을 말합니다. 우리의 삶은 늘 선택입니다.
반드시 선택을 해야만 합니다. 선택을 안 해도 되는 상황이 있는 것이 아니라 선택을 미루어도 되는 상황만이 있는 것입니다.
선택이 불가피하지 않은 상황에서는 우리 모두가 서로를 존중할 수 있지만, 어차피 선택은 할 수밖에 없고
그 때는 그런 식의 애매모호한 화합이란 더 이상 설 자리가 없습니다.
이런 오해와 착각이 만들어내는 환상이 ‘중립지대’, ‘ 중간지대’, ‘회색지대’ 등으로 불리는,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 어떤 것입니다.

이런 분위기 속에서 배우고 살아가다보니 크리스천들도 분명한 목소리를 내는데 주저하게 되기도 합니다.
물론 이 말은 나와 의견이 다른 사람을 적대시하라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도 하나님의 은혜로 구원받기 전에는 죄인이었고, 하나님을 대적하였었고, 크리스천들을 미워하였습니다.
하나님을 대적하는 사람들은 이전의 나와 같은 행동을 지금도 하고 있는 사람들일 뿐입니다.
분명한 목소리를 내어야 한다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
즉 진리에 대해서는 확고한 태도와 입장을 유지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을 실천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대해서도 그런 애매모호한 태도를 취하기도 하는데,

그 외의 사안에 대해서는 더욱 그런 태도를 보이기가 쉽습니다.
그러다보니 나도 모르게 자꾸 중립지대, 중간지대, 회색지대라는 개념을 인정하며 뭔가를 판단하게 됩니다.
그리고 그렇게 경계가 불분명한 어떤 상태에 있는 것이 안전하다거나 성숙하다고 여기기도 합니다.
그런데 이 세상에는 그런 곳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빛과 어둠의 경계는 언제나 명확합니다.
새벽미명도 더 이상 밤이 아닙니다. 조금의 빛이라도 들어오기 시작하면 이미 어둠은 물러간 것입니다.
우리의 태도도 언제까지나 애매모호할 수는 없습니다. 선택이 불가피한 상황에서는 “네” 또는 “아니요” 두 가지만이 존재합니다.
이런 식의 불분명한 경계에 대한 인식이 우리의 감정을 분별하는 데도 작용을 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중립지대, 중간지대, 회색지대라는 곳이 감정의 영역에도 존재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다보니 “지금 기분이 어때?”라는 질문에 “아무 느낌 없어!”라거나 “무덤덤해!”라고 답하며,
자신이 중립적인 또는 중간의 기분을 느끼고 있다는 것을 표현합니다. 그런데 여러분 잊지 마십시오.
그런 상태는 중립적인 상태가 아닙니다. 그런 상태는 이미 부정적인 정서 상태로 들어가 있는 것입니다.
우리의 기분에는 좋은 상태와 중간 상태와 나쁜 상태가 있는 것이 아닙니다. 좋은 상태가 아니면 나쁜 상태입니다.

개그프로그램을 보다가 박장대소를 할 때가 있습니다.
웃기 시작할 때부터 다시 평상 상태로 돌아갈 때까지의 표정을 한번 상상해 보십시오.
그 과정에서 과연 즐거워하는 상태와 중간 상태와 평상 상태를 구분할 수 있으신가요? 그런 구분은 불가능합니다.
표정에 웃음은 아니라도 미소가 남아있을 때는 즐거운 상태이지만,
미소가 사라지고 표정이 굳기 시작하면 그때부터는 중간 상태가 아니라 즐거워하지 않는 상태가 되는 것입니다.
이 순간부터는 우울한 상태와 중간 상태, 우울하지 않은 상태라는 기준은 완전히 버리십시오.
앞에서 말씀드린 이유로 중간 상태는 존재하지 않습니다. 우울한 상태는 특별히 얼굴이 일그러지고
눈물이 그렁거리고 기분이 나빠 보이는 상태가 아닙니다. 우울한 상태는 우울한 것이 느껴져야 우울한 상태가 아니고,
기뻐하지 않는 상태면 그것이 바로 우울한 상태인 것입니다. 얼굴에 웃음은 아니라고 하더라도 미소조차도 없을 때는 우울한 상태인 것입니다.
이제부터는 기쁘다고 느끼지 못하는 상태를 우울한 상태라고 정리하십시오. 이것이 하나님의 잣대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우울한지 우울하지 않은지 보다 기뻐하는지 기뻐하지 않는지를 더 중요하게 생각하십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이미 다 이루신 은혜가 우리에게 흘러들어야 이 땅에 나타나기 위해서는 기뻐하므로 그 통로가 활짝 열려야 하기 때문입니다.
명심하십시오! 우리가 우리의 감정 상태를 점검할 때의 기준은 우울한지 우울하지 않은지가 아닙니다.
기뻐하고 있는지 기뻐하고 있지 않은지가 기준입니다. 다시 한 번 말씀드리지만, 기뻐하지 않고 있다면 지금 우울한 것입니다!

2015_04_13

 

질문3

우울한 기분으로부터 즉각적으로 벗어날 수 있는 방법에는 어떤 것이 있나요?

우울한 기분으로부터 즉각적으로 벗어날 수 있기 위해서는 평소에 마음의 대비가 필요합니다.
즉, 우울한 기분이 느껴지면 우울하구나 하며 그 기분에 젖어들거나,
내가 왜 이렇게 우울해할까를 생각하느라 시간을 보내는 것이 아니라 즉각적으로 그 기분에서 벗어나야겠다고 준비하고 있는 것입니다.
물론 우리가 자주 우울한 기분을 느끼게 된다면 그 이유에 대해서도 알아보아야 할 때가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그 이유를 찾아내려고 애를 쓴다고 해서 그런 기분에서 벗어나기가 쉽지 않습니다.
그 이유가 어떤 것이든, 때로는 이유를 잘 모르더라도 마음이 변화를 받으면 어두운 감정이 사라지게 됩니다.
그러므로 우울한 기분을 느끼게 되는 이유를 찾는 것보다 내 마음을 하나님의 기쁨으로 채우고 성령님의 계시로 마음이 변화를 받을 수 있도록 환경을 만들어 주는 것이 더 중요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울한 기분에 대한 경계심을 늘 가지고 있다가 그것이 왔다 느껴지면 바로 벗어날 수 있는 준비가 필요합니다.
우울한 기분이 우는 사자와 같이 늘 우리를 삼키려 한다는 것을 잊지 않고 있는 분이라면 자연스럽게 우울의 공격을 물리칠 무기를 준비하시겠죠?
평소에 나를 기분 나쁘게 하거나 우울하게 만드는 것 대신에,
나를 기분 좋게 만들고 웃게 만드는 것이 어떤 것이 있는지 잘 찾아보십시오.
그건 말씀일 수도 있고 찬양일 수도 있고 어떤 사진이거나 심지어는 카톡에서 쓰는 이모티콘일 수도 있습니다.
그런 것들을 늘 준비하고 계십시오.

지난 「화요말씀치유집회」에서는 <일어나라 찬양을 드리라>라는 찬양을 올려드렸습니다.

함께 모인 하나님의 자녀들이 전심으로 올려드리는 찬양 가운데 영광으로 임재하시는 성령님으로 인해 누리는 기쁨이 얼마나 컸던지요.

여러분들께도 이런 찬양이 있으실 것입니다.
그렇다면 그 찬양을 스마트폰에 저장해서 다니다가 우울한 기분이 느껴질 때면 바로 그 찬양을 들으면서 기분을 바꾸십시오.
물론 상황이 허락한다면 집회 때와 같이 손뼉을 치거나 손을 들거나 박자에 맞춰 몸을 흔들며 우리의 가슴 속에서 솟아오르는 기쁨을 다시 느낄 수 있다면 더욱 좋습니다.
저도 카카오톡으로 대화를 많이 하는데 이모티콘을 쓰는 것이 재미가 있어서 이모티콘도 많이 쓰고 있습니다.
그런데 어떤 이모티콘은 대화내용과 상관없이 보기만 해도 기분이 좋아지는 것이 있습니다.
여러분들께도 그런 것이 있다면 우울한 기분이 느껴질 때 바로 스마트폰을 꺼내서 들여다보십시오.
그러면서 활짝 웃어보십시오. 그러면 나를 둘러싸고 있는 기운이 바뀌는 것을 느끼실 것입니다.

결론

마지막으로 가장 중요한 사항을 말씀드리고 이번 호를 마무리하려고 합니다.
우리에게는 우울한 기분을 이길 능력이 없습니다.
우리가 노력해서 우리의 능력으로 우울한 기분을 몰아내는 것이 어느 정도 일시적으로는 가능한 듯 해 보여도
결국은 또 크게 달라지지 않은 자신을 발견하게 됩니다. 그래서 우리가 우울한 기분과의 싸움에서 이길 수 있도록
만들어주시기 위해 하나님께서 행하신 일이 우리를 새로운 피조물로 만드시는 것입니다.
부정적 정서에 대한 친화력이 무궁무진한 우리를 긍정적 정서를 받아들이고 그것으로 더욱 새롭게 될 수 있도록 하시기 위해 우리를 완전히 바꾸어버리신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가 우울한 기분과 싸울 때 반드시 기억해야 하는 두 단계 전략이 있습니다.
전략 1은 우리가 할 일은 우울한 기분에 대적하므로 성령님으로부터 흘러나오는 생명수의 송수관을 활짝 여는 것입니다.
그렇게 할 때 성령님의 능력이 최대 출력으로 우리의 혼과 육을 적시게 되고, 그 빛으로 인하여 우리를 사로잡으려는 어둠이 물러가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너희는 하나님께 순복할지어다 마귀를 대적하라 그리하면 너희를 피하리라 약4:7

 

전략 2는 우울한 기분을 이기기 위해 우리가 할 일을 다 한 후에는 성령님의 도움을 구하며,
내가 어떤 은혜를 누리고 있는 어떤 존재인지를 다시금 깨닫고, 그 사실을 선포하는 전략입니다.
우리의 능력에 초점을 맞추는 것이 아니라 성령님께 초점을 맞추어야 합니다.
전략 1을 수행하기 위해서 사용가능한 방법들에 대해서는 앞에서 나누었습니다.
전략 2를 수행하기 위해서 사용가능한 알약이 지금 읽고 계시는 『킹덤빌더』 매거진 표지 안쪽에 준비되어 있습니다.
이 약은 우울하지 않을 때도 복용가능하며 부작용은 전혀 없을 뿐만 아니라 많이 먹으면 먹을수록 더 큰 효과를 볼 수 있는 희한한 약입니다.
이 전략을 앞서 소개해 드린 <일어나라 찬양을 드리라>라는 찬양의 가사를 가지고 다시 한 번 적용해 보기로 하겠습니다.

일어나라 찬양을 드리라 우릴 구원하신 주께

일어나라 찬양을 드리라 우릴 구원하신 주께

마음 열고 주님 앞에 기뻐해

마음 열고 주님 앞에 기뻐해

마음 열고 주님 앞에 기뻐해

주님은 우리 왕

일어나서 찬양을 드리고 마음을 열고 기뻐해야 하는 것은 전략 1입니다.
주님 앞에 서서 그분께서 우리의 창조자, 구원자, 치료자 되심을 기억하고, 전지전능하신 그분께서 우리의 왕 되신다는 것을 선포하는 것이 전략 2입니다.
그러니 억지로 내 마음을 열고 억지로 기뻐함으로써 우울한 기분과 싸우려고하실 필요 없습니다.
이 찬양을 드리려고 일어날 때 전략 1이 달성되고 이 찬양을 부를 때 전략 2가 달성되면서 성령님의 능력이 흘러넘쳐 우울한 기분이 쫓겨 나가는 것입니다.

 

할렐루야!
마지막으로 한 가지만 더 제안을 드립니다.
킹덤빌더 여러분들의 발걸음이 닿는 어느 곳이든지 시간이 날 때마다 주위에 있는 형제자매들의 얼굴을 살펴보십시오.
그리고 그들을 사로잡고 있는 우울을 바라보십시오.
우울에 사로잡혀 굳은 표정으로 힘겹게 살아가는 그들을 주님의 마음으로 바라보십시오.
그리고 무엇보다 먼저 내가 우울한 기분을 이길 수 있는 새로운 존재가 되었다는 것을 기뻐하십시오!
그리고 나를 우울한 기분을 이길 수 있는 새로운 피조물로 만들어주신 주님께 감사드리십시오.
그리고 예전의 내가 그랬던 것처럼 우울한 기분에 사로잡혀 살아가는 형제자매들을 바라보며
예수님의 이름으로 그들을 괴롭히는 우울한 기분을 쫓아내고 그들을 축복하는 기도를 하십시오!
여러분으로 인해 여러분의 삶터가, 여러분의 출퇴근길이 하나님나라로 점점 변해갈 것입니다. 할렐루야!

보너스

이모티콘과 알약을 활용한 우울한 기분 퇴치용 카드를 여러분께 무료로 나누어드립니다.
이 이모티콘들은 스마트폰에서는 움직이게 되어 있습니다.

스마트폰을 이용하여 이모티콘의 움직임에 맞춰 알약을 선포한다면 우울한 기분은 우리의 털끝도 건드릴수 없게 될 것입니다.

2015_04_1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