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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한다! 우울한 나의 자녀야. Ⅶ

사랑한다! 우울한 나의 자녀야. Ⅶ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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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INGDOM LIFE &

건강
사랑한다! 우울한 나의 자녀야. Ⅶ

 

한양의대 교수 김석현

 

우울증의 주 증상 9가지

① 우울한 기분
② 모든 것이 귀찮고 사는 재미가 없다고 느낍니다.
예전엔 좋아했던 것들도 싫어집니다.
③ 체중변화, 식욕변화
④ 불면 또는 수면과다
⑤ 초조 또는 지체
⑥ 피로감, 무기력
⑦ 무가치감, 죄책감
⑧ 집중력 저하, 결단력 저하
⑨ 죽음에 대한 생각, 자살

그동안 함께 살펴보았던 우울증의 주 증상 9가지 중 이제 “죽음에 대한 생각, 자살”만을 남겨두고 있습니다.
우울한 상태가 오래 지속되다 보면 이 세상에 대한 희망이 더 이상 남지 않게 되고,
하루를 더 산다는 것 자체가 너무나 고통스럽게 느껴집니다.
그러다보니 자연스럽게 이 세상에서의 삶을 마감하는 것에 대해서 생각해 보게 됩니다.
죽으면 어떻게 될까… 지금보다 더 힘들까… 아무리 힘들어도 지금보다 더 힘들 리는 없겠지… 하면서 죽음에 대해 자꾸생각하게 됩니다.
그러다 죽는 것이 더 편할 것 같거나 최소한 지금보다는 더 나을 것 같다는 쪽으로생각이 기울면,
자살까지도 생각하게 되고 실제로행동으로 옮기기도 합니다.

“자살” 하면 우울증이연상될 정도로 이 두 가지는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기 때문에,
우울증을 앓고 있는 분들을 볼 때는 반드시 죽음에 대한 생각을 얼마나 하고 있는지,
자살에 대해서도 생각을 하고 있는지 등에 대해 알아보아야만 합니다.
죽음이란 인간에게는 누구도 피해갈 수 없는 필연적 운명이지만 동시에 누구에게나 미지의 영역이다 보니,
다들 이 주제에 대해서는 두려움을 가질 수밖에없습니다.
또한 나의 죽음이 아니라 하더라도 나와전혀 관계없는 한 인간의 죽음조차도 결코 아무렇지도 않게 바라보기는 쉽지 않습니다.
특별히 사랑하는 사람의 죽음은 우리가 살아가는 동안 겪어야 하는 어려움 중 가장 큰 고통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정도로 힘든 일이라,
누구나 그런 일은 상상조차 하고 싶어 하지 않습니다.
그러니 그런 죽음을 늘 생각해야 하는 우울증이란 참으로 어둡고도 힘든 병이구나 하는 생각을 새삼 하게 됩니다.

 

자녀들은 혈과 육에 속하였으매 그도 또한 같은 모양으로 혈과 육을함께 지니심은

죽음을 통하여 죽음의 세력을 잡은 자 곧 마귀를 멸하시며 또 죽기를 무서워하므로

한평생 매여 종 노릇 하는 모든 자들을 놓아 주려 하심이니 이는 확실히 천사들을 붙들어 주려 하심이아니요

오직 아브라함의 자손을 붙들어 주려 하심이라 히2:14-16

 

예수님, 감사합니다.

이렇게 무겁고 누구도 별로 말하고 싶어 하지 않는 주제를 다루어야 하는 이번 호를 집필하면서,
저는 사실 그 어느 때보다 가벼운 마음으로 글을 써내려가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우리 크리스천에게 죽음은 더 이상 두렵거나 무서운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크리스천들에게 있어서 죽음이라는 문제는 아직 구원받지 못한 사람들이 생각하는 것과는 완전히 다른 문제이기 때문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어떻게 보면 지금까지 다루었던 여러 가지 증상들 중에서 이번 호에서 다룰 “음”이라는 주제가 가장 쉬운 주제일수도 있습니다.
죽음의 문제를 예수님께서 완전히 해결해 주셨기 때문입니다. 할렐루야! 예수님, 감사합니다!

제가 만나게 되는 환자분들이 겪고 있는 고통스러운 증상의 대부분은 죽음에 대한 두려움과 직간접적으로 연결되어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건강염려증이나 공황장애의 경우처럼 그 불안이 불치의 질병, 그리고 그로 인한 자신의 죽음의 형태로 직접드러나는 경우가 아니라고 하더라도,
본질적으로는어떤 이유로 죽음에 이르게 될까봐 두려워하는 것입니다.
사람들이 죽기를 무서워하므로 죽음의 세력을 잡은 마귀에게 얼마나 휘둘리며 고통을 당하며 사는지를 늘 보게 되는 저는,
앞에 인용한 히브리서 말씀을 볼 때마다 가슴이 뜨거워지면서 저절로 할렐루야를 외치게 됩니다.
예수님께서 한평생 종노릇 하는 모든 자들을 놓아 주신 그 일이 얼마나 큰 은혜인지가 절절히 와 닿기 때문입니다. 할렐루야! 예수님, 감사합니다!

세상 사람들에게는, 아니 다른 사람들 이야기는 할 것도 없이 구원받고 새로운 피조물이 되기 이전의 나에게 그렇게도 위협적이었던 죽음이라는 것이,
하나님의 자녀로 살아가는 지금의 나에게 있어서는 얼마나 무기력해져 버렸는지를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놀랍지 않습니까?
이전의 나로서는 죽음을 향해 “올 테면 와보라!”라고 호령한다는 것이 상상이나 할 수 있는 일이었습니까?
그런데 지금 우리는 그렇게 할 수 있지 않습니까? 물론 조금의 두려움도 없이 그렇게 하고 있느냐,
아니면 조금 무섭기는 하지만 그렇게 하고 있느냐의 차이는 있지만,
그 차이는 죽음 앞에서 그저 떨 수밖에 없었던 옛 사람의 모습과 비교하면 이거야 말로 하늘과 땅 차이가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모든 사람들이 골리앗 앞에서 떨고 있을 때, 하나님의 이름을 외치며 당당히 대적했던 다윗!
우리가 지금 그 다윗처럼 하고 있지 않습니까? 얼마나 놀라운 일입니까? 할렐루야! 예수님, 감사합니다!

죽음을 비참한 결말이 아니라 완벽한 결말을 향해 나아가는 과정으로 바라볼 수 있다는 것,
죽음으로 인해 분리되는 것이 아니라 더 강력한 연합을 이룬다고 바라볼 수 있다는 것,
죽음 이후가 지금과는 비교도 할 수 없을 만큼 좋다고 바라볼 수 있다는 것, 이런 사람들 앞에서 죽음은 아무런 능력도 발휘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로마의 폭군 아래서 신앙생활을 했던 우리의 믿음의 선진들도 사자에게 물리고 화형을 당하면서도 주님을 찬양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삶의 무게로 인해 하루하루가 고단하신가요? 무거운 짐으로 인해 어깨가 축 늘어지셨나요?
그럴 때마다 죽음을 생각해 보십시오. 그리고 그 죽음이라는 것이 여러분에게 어떤 의미로 다가오는지,
여러분이 그 죽음 앞에서 얼마나 당당한 존재가 되어 있는지를 다시 기억해 보십시오.

예수님께서 우리와 같은 모양으로 혈과 육을 함께 지니시고 죽음을 통하여 죽음의 세력을 잡은 자 곧 마귀를 멸하셨기 때문에,
우리에게 사망권세는 더 이상 어떤 영향도 미칠 수 없는 상태로 무기력해져 버렸습니다.
여러분은 마귀가 가진 가장 강력한 무기인 사망권세로도 어떻게 할 수 없는 그런 존재가 되어있는 것입니다.
놀랍지 않으십니까? 그렇게 대단해 보이는 영화 속의 영웅들도 모두 죽음 앞에서는 무기력합니다.
심지어 수퍼맨도 돌조각 하나에 힘을 쓰지 못합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여러분은 영화 속에서조차도 상상할 수 없는 그런 엄청난 존재가 되어 있는 것입니다.
새로운 피조물인 여러분! 하나님의 자녀인 여러분! 여러분은 바로 그런 존재입니다. 할렐루야! 예수님, 감사합니다!

침몰해 가는 세월호 안에서 바깥으로 나왔다가도 사망권세 앞에서 떨고 있는 학생들을 향해 다시 뱃속으로 들어갔던 자매를 기억합니다.
세상은 그 자매를 잊어버렸을지라도, 또는 그저 슬픔으로만 기억할지라도 저는 결코 잊을 수가 없을 뿐만 아니라,
그 자매를 떠올릴 때마다 예수님께 감사와 찬양을 드리게 됩니다.
왜냐하면 그 일은 사망권세를 이긴 자가 아니고서는 절대로 할 수가 없는 일이기 때문이며,
그 일은 예수님께서 사망권세를 멸하셨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기 때문입니다. 할렐루야! 예수님, 감사합니다!

 

아직은 죽기를 무서워하는 영혼들을 위하여

사망권세를 멸하신 예수님께 감사를 드리는 것만으로도 지면이 부족하지만,
그 일을 행하신 예수님께서는 새로운 피조물이 된 우리를 통해서 더 많은 이들이 우리와 같이
더 이상 죄와 사망권세 아래서 신음하지 않고 자유를 누리도록 해 주신 예수님의 은혜를 누릴 수 있게 되기를 원하십니다.
그래서 우리가 비록 아직은 좀 우울하다고 하더라도 우리가 누릴 수 있는
그 놀라운 은혜를 다른 이들에게도 흘려보내는 일에 대해 조금 더 이야기를 나누어보려고 합니다.

앞에서 말씀드렸던 것, 우리가 어떤 존재가 되어 있는지를 생각해 보십시오.
설령 여전히 우울증으로 인해 고통 받고 있다고 하더라도 새로운 피조물로서 우울증을 겪는 것과 아직 구원받지 못한
인간으로서 우울증을 겪는 것과는 역시 하늘과 땅 만큼 차이가 나는 일입니다.
여러분이 여전히 우울로 인해 어려움을 겪고 있다고 하더라도 자부심을 가지십시오.
여러분이 겪는 우울은 구원받지 못한 사람들이 겪는 우울과는 차원이 다릅니다.
적어도 죽음이라는 문제 앞에서는 여러분은 완전히 다른 차원에 살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예수님께서 하기 원하시는 그 일이 우리를 통해 나타나도록 할 수 있는 것입니다.

차라리 죽는 것이 낫겠다거나 죽으면 이 고통 안 겪고 편할 것 같다는 말씀을 하시는 분들을 저는 많이 만납니다.
어떤 분이 여러분에게 자신의 어려움을 털어놓으면서 이렇게 말한다면 여러분은 뭐라고 말씀하시겠습니까?
정신치료적인 입장에서 정답을 이야기하자면, 우선 그 분이 겪고 있는 고통에 대해서 공감해 주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그렇군요. 죽는 것이 편하다고 느낄 정도로 힘이 드시는군요.
얼마나 힘드시면 죽는 것이 낫겠다는 생각까지 하시게 되었을까요?” 등등. 거기까지는 좋습니다.
그런데 그 분이 계속해서 죽겠다고 한다면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그때도 그 이야기를 반복해서 하시겠습니까?
물론 그렇게 위로받는 것만으로도 새로운 힘을 공급받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어디까지나 임시방편일 뿐입니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저는 이렇게 합니다. 그분이 겪고 있는 고통에 대해 충분히 공감한 후 듣는 분 입장에서는 어쩌면 당돌하기도 하고 황당할 수도 있는 질문을 합니다.
“얼마나 힘이 드셨으면 죽고 나면 지금 같은 고통을 겪지 않고 편할 것 같다는 생각까지 하시게 되었겠습니까?” 여기까지는 비슷합니다.
그 다음부터가 조금 황당합니다. “그런데 죽고 나면 지금보다 편하다고 누가 그러던가요?
죽고 나면 지금보다 편할 거라고 어떻게 확신하시죠?” 이쯤 되면 거의 모든 분들이 눈을 동그랗게 뜨고는 저를 쳐다봅니다.

말을 약간 더듬기도 하면서 “죽고 나면 아무것도 못 느끼고 생각도 못하니 지금보다 편하지 않을까요?” 그럼 저는 다시 질문합니다.
“누가 죽고 나면 아무것도 못 느끼고 생각도 못한다고 하던가요? 그걸 어떻게 확신하시죠?”

 

너희가 알 것은 죄인을 미혹된 길에서 돌아서게 하는 자가

그의 영혼을 사망에서 구원할 것이며 허다한 죄를 덮을 것임이라 야5:20

 

여러분들도 좀 황당하신가요? 어떻게 정신과 의사가 저런 말을 할 수 있을까 싶으신가요?
물론 아주 정중하고 공감적인 태도를 유지하며 하는 질문들입니다. “그런데 말이죠.
그럴 줄 알고 죽었는데 지금보다 안 편하면 어떡하죠? 그 때는 돌이킬 수도 없는데?
그렇다면 그냥 그럴 것 같다거나 남들이 그렇게 이야기하니까 라는 것보다는 좀 더 확실한 근거가 있을 때 죽는 것이 낫겠다고 생각해야 하지 않을까요?”
그 이후에는 각자의 반응에 따라 더 많은 이야기를 나누기도 하고 신앙서적을 소개해 주기도 합니다.
물론 제 이야기를 일축해 버리는 분들도 많이 계십니다. 그렇지만 근거도 없이 그냥 그럴 거라고 믿어버리며
자신의 목숨을 버리는 일을 가볍게 생각하는 태도에 대해서 잠깐이라도 의심해 보는 기회가 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도둑이 오는 것은 도둑질하고 죽이고 멸망시키려는 것뿐이요 요10:10

 

너희는 너희 아비 마귀에게서 났으니 너희 아비의 욕심대로 너희도 행하고자

하느니라 그는 처음부터 살인한 자요 진리가 그 속에 없으므로 진리에 서지 못하고

거짓을 말할 때마다 제 것으로 말하나니 이는 그가 거짓말쟁이요 거짓의 아비가 되었음이라 요8:44

 

거짓말로 속이고 도둑질하고 죽이고 멸망시키고자 하는 마귀에게 속아 죽는 것이
더 나을 거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에게 그렇지 않다는 것을 알려주는 것은,
죽을 것이냐 말 것이냐를 생각하는 사람에게 있어서는 정말 중요한 문제가 아닐 수 없습니다.
그래서 그 거짓말에 끌려 들어가고 있는 지체에게 그것이 거짓말이라고 알려주는 것은 정말 중요한 문제입니다.
자살과 관련해서 두 번째로 생각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세상에는 “죽는다 죽는다 하는 사람은 안 죽는다.”는 말이 있습니다.
그 말은 틀린 말입니다. 통계적으로도 죽는다 죽는다 하는 사람이 진짜 자살을 시도할 가능성이 훨씬 더 높게 나타납니다.
계속 입으로 죽음을 선포하고 죽음을 묵상하는 삶에서 죽음이 열매 맺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죽는다 죽는다 하는 분들에 대해서는 평소와 다르게 특별한 관심을 가져야 합니다.
그렇지만 또 죽는다 죽는다 하면서도 바로 자살을 시도하는 것은 아닙니다. 그래서 그런 이야기가 나왔겠지요.

그렇다면 그렇게 죽음에 대해서 이야기하는 분들이 진짜 자살을 결행하는 것은 언제일까요?
그것은 바로 이 세상에 자신을 사랑하는 사람이 단 한 명도 없다고 생각할 때입니다.
다른 말로 자신의 죽음을 슬퍼할 사람이 단 한 명도 없다고 생각할 때입니다.
단 한 사람이라도 자신에게 관심이 있다고 느낄 때는 대부분의 사람들이 그 한 사람 때문에 행동으로 옮기는 것을 주저하게 됩니다.
이런 이유로 한강다리 난간에는 자신의 존재를 아끼는 사람들, 자신의 죽음을 안타까워할 사람들을 다시 떠올릴 수 있게 하는 문구들이 적혀있습니다.
그리고 그런 문구를 보고도 아무도 떠오르지 않을 때 그 사람의 존재를 아끼고
관심 가져 주는 고리를 만들어 주기 위해 생명의 전화들이 설치되어 있는 것입니다. 그 전화기를 들고 상담원과 대화를 하는 순간,
그 사람에게는 자신에게 관심을 갖고 지금뿐만 아니라 내일도 다시 통화하기를 원하는 한 사람이 생기게 되고,
그 관계 때문에 그 사람은 이 땅에서의 생을 하루 더 연장하기로 생각을 바꾸게 되기도 합니다.

 

무엇보다도 뜨겁게 서로 사랑할지니 사랑은 허다한 죄를 덮느니라 벧전4:8

 

그래서 우리는 우리를 사랑하신 하나님의 사랑으로 서로를 사랑하여야 합니다.
나의 시선을 나에게서 돌려 내 주변의 지체들을 향하게 해야 합니다.
아직은 나를 묶고 있는 우울증으로부터 온전히 벗어나지 못했다고 하더라도,
내 안에 계신 성령님을 힘입어 내 주변의 누가 사랑이 없어 힘들어하는지, 누가 마귀의 속임에 눈이 멀어있는지,
누가 죽음의 권세 앞에 포로가 되어 죽음을 향해 끌려 들어가고 있는지 살펴야 합니다.
그렇게 할 때 우리 안에 계신 성령님께서 하나님의 일들을 우리를 통해 해 나가실 것입니다.
생명이 필요한 죽은 자들에게 하나님의 생명을, 사랑이 필요한 자들에게 하나님의 사랑을 부어주실 것입니다.

 

주의 성령이 내게 임하셨으니 이는 가난한 자에게 복음을 전하게 하시려고

내게 기름을 부으시고 나를 보내사 포로된 자에게 자유를,

눈먼 자에게 다시 보게 함을 전파하며 눌린 자를 자유케 하고

주의 은혜의 해를 전파하게 하려 하심이라 하였더라 눅4:18-19

 

무거운 짐 진 자들아

이 글을 쓰면서 자살로 생을 마감한 가족으로 인해 지금도 가슴아파하실 분들을 생각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런 아픔을 겪으신 분이 이 글을 읽고 계신다면, 어쩌면 자신이 내 가족에게 사랑을 주지 못했고
위로와 격려가 되어주지 못했다는 자괴감과 죄책감으로 인해 더 가슴이 아프실 수도 있습니다.
만약 그런 생각이 드신다면 그 마음을 예수님께 올려드리십시오.
정말 가슴이 찢어지도록 아프시든 아니면 가벼운 후회로 느껴지든 상관없습니다.
사실이 어떠하고 내가 겪는 고통이 어떠하든 예수님께서는 다 해결하실 수 있습니다.
그리고 내가 내 가족을 예수님의 말씀대로 사랑하며 살지 못했다는 생각이 드시면 그것에 대해 예수님께 회개하십시오.

그렇게 하시면 예수님께서 그 고통을 다 받으시고 가져가실 것입니다. 예수님께 다 드리십시오.
하나도 남겨놓지 마시고 다 드리십시오.
여러분이 먼저 떠난 가족을 기억하기 위해 반드시 슬픔과 죄책감과 자괴감을 함께 기억해야 하는 것은 아닙니다.
오히려 그것은 예수님께서 원하시는 일이 아닙니다.
그 무거운 짐 하나도 남기지 마시고 다 올려드리십시오.
그러면 그 무거운 짐을 예수님께서 지시고 예수님의 쉬운 멍에와 가벼운 짐을 여러분에게 주실 것입니다.
예수님의 위로를 받아들이십시오. 그리고 예수님께서 주시는 마음의 쉼을 누리십시오. 할렐루야! 예수님, 감사합니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그리하면 너희 마음이 쉼을 얻으리니 이는 내 멍에는 쉽고 내 짐은 가벼움이라 하시니라 마11:28-30

 

이제 그 일을 새롭게 바라보십시오.
그 일과 관련된 모든 책임은 자신이 사랑받지 못하고 있다고 여기게 만들고,
죽으면 지금과 같은 고통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다고 생각하도록 우리의 사랑하는 가족을 속인 사단마귀의 세력이 져야 합니다.
여러분에게도 책임이 일부 있다고 여겨지십니까? 그게 사실이라고 하더라도 여러분이 회개하실 때
이미 예수님께서 그 모든 책임을 다 사하셨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더 이상 그 일에 대해 책임지실 것이 없고,
그렇기 때문에 죄책감을 느끼실 필요가 없습니다. 할렐루야! 예수님, 감사합니다.

그러므로 이제 우리가 할 일은 명백해졌습니다. 이제는 더 이상 우리가 이 땅에서 하나님나라의 삶을 살아가는데
방해가 될 정도로 그 일로 인해 슬픔을 느끼거나 죄책감을 느끼지 말아야 합니다.
그런 생각이 들 때마다 사망권세를 이기시고 모든 죄를 사하여주신 예수님을 생각하십시오.
그리고 아직도 우는 사자와 같이 두루 다니며 삼킬 자를 찾는 우리의 대적에 대해 우리가 할 일을 기억하십시오.
사단마귀가 더 이상 그런 일에 성공할 수 없도록 항상 깨어 있어 우리와 우리의 주변을 살피십시오.
이 세상에서 그런 일을 가장 잘 막을 수 있는 분은 그런 일을 겪은 분들입니다.
우리가 우리의 시선을 예수님으로부터 떼지만 않는다면 우리가 겪은 모든 고통은 예수님 안에서 훈장이 됩니다.
예수님 안에서 고통이 훈장으로 바뀌는 은혜를 누리시고 그 훈장에 부여된 권능을 성령님과 함께 이 땅에서 마음껏 사용하십시오.

 

우리의 연약함

우리가 이 땅에서 육을 입고 살아가는 동안에는 우리는 숙명적으로 영·혼·육 사이의 상호작용의 영향을 받으면서 살아갈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한 상호작용은 명백한 사실이기 때문에 그것을 무시하거나 부인하게 되면 영혼과 육체가
서로 관련이 없다거나 배타적이라고 생각하게 되는 이분법적 사고에 빠지게 되고, 그런 생각으로 인해 우리의 혼과 육이 원활하게 작동하지 못하게 됩니다.
이러한 오류는 질병에 대한 태도에서 흔히 나타납니다.
예를 들어, 독감이 심하게 들었다고 생각해 보십시다. 이런 경우 대부분의 사람들은 육신의 기능이 약해졌다라고 생각합니다.
즉, 자신의 면역력이 약해졌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육신의 면역기능이 약해지는 이유 중 가장 흔한 원인이 혼의 문제라고는 생각하지 못합니다.
반대로, 우울증과 같은 정신질환의 경우에는 이 병은 육신과는 상관없이 마음에만 문제가 생긴 경우라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육신을 회복시키는 부분에 대해서는 고려를 하지 않습니다.
그러다보니 마음을 더 강하게 먹고 우울증을 이겨내야 한다고 권면하게 됩니다.
의사나 약의 도움은 필요 없다고 생각하고 오직 정신력이나 의지를 강하게 하는 방법으로 해결하려고 합니다.

그런데 앞서 말씀드린 바와 같이 우리의 혼과 육은 매우 밀접하게 상호작용하기 때문에
과도한 스트레스로 인한 우울한 기분 등 부정적인 사고와 정서에 오래 젖어있다 보면 우리의 정신뿐만 아니라
뇌기능 자체도 저하되어 우울증으로 진단받을 수 있는 증상들을 만들어냅니다. 이 때는 우리의 혼뿐만 아니라
육신의 기능에도 문제가 생겨 있는 것이고 그래서 육신의 기능 회복에도 초점을 맞추어야 합니다.
좀 더 정확히 말하자면, 문제가 생긴 육신에서는 정신이 올바로 작동하기가 어렵다는 것입니다.
아무리 기도하려고 애를 써도 문제가 생긴 뇌기능은 정상적인 혼의 작용을 만들어낼 수 없으며,
그래서 결국은 정상적인 영적 활동의 통로로 사용될 수가 없습니다.
이런 상황에서는 하나님의 영광의 임재 안으로 들어오더라도 혼과 육이 쳐놓고 있는 부정적인 장막으로 인해
그 영광이 우리의 혼과 육을 사로잡지 못하게 될 수도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육신의 기능이 회복되도록 노력하는 것도 우울증 치료에 있어서 반드시 필요한 것입니다.
주위에서 아무리 사랑을 주고 보살피려고 해도 이런 상태의 혼과 육은 오직 부정적인 것에만 안테나를 맞추고 받아들이고 믿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가족들이 아무리 잘 하더라도 일단 육신이 그것을 받아들이고 누릴 수 있는 상태를 넘어 부정적인 쪽으로 치우쳐버렸을 때는,
가족들의 사랑조차도 아무런 도움이 되지 못하기도 하는 것입니다.
약간의 어려움도 침소봉대하여 받아들이게 되고,
막연한 느낌을 사실로 받아들여 자신의 상황을 더욱 더 어렵게 만들어버리고는 그것을 그대로 믿어버리게 됩니다.

이런 상태에서 벗어나기 위해서는 당연히 육신을 회복시킬 수 있는 방법도 사용하여야 합니다.
우리가 질병에 대해서 얼마나 이상한 잣대를 갖다 대고 있는지를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만약 여러분이 넘어져서 발목뼈가 부러졌다고 생각해 보십시오.
그런 상황에서 부목을 사용하거나 기브스를 하거나 목발을 사용하는 것을 보고,
불필요한 일을 한다거나 믿음이 약하다고 말씀하십니까? 그렇게 안 하십니다.
왜냐하면 그런 상태에서 빨리 벗어나서 다시 주의 일에 힘쓰기 위해서는 그런 것이 필요하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기브스를 하여 움직일 때 발생할 수 있는 추가적인 손상과 고통을 줄이고 목발을 사용하여 교회도 가고 기도처를 찾아가기도 합니다.
그런데 유독 정신질환에 대해서만은 그런 도움을 인정하지 않으려고 합니다.
정신질환의 경우에도 추가적인 손상과 고통을 줄이고 교회도 가고 기도처도 찾아가서
그런 행동을 통해 부어주시는 성령님의 권능을 누리기 위해서는 육을 회복시켜 혼이 정상적으로 작동하도록 해 주는 것도 필수적입니다.

약은 우리가 우리의 문제를 예수님 앞으로 가지고 나가는 것을 방해하는 불안, 우울, 의심, 부정적인 생각 등으로부터 회복시킵니다.
그럴 때 우리는 더욱 쉽게 예수님을 향한 신뢰를 회복할 수 있게 되고 그분께 감사드릴 수 있게 되고 기뻐하며 기도할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의 혼과 육이 서로 상호작용하며 작동하는 것은 하나님께서 인간을 만드실 때 심어놓은 법칙입니다.
이것을 무시하여 우리의 혼과 육이 의의 병기로 제대로 작동하지 못하게 하는 어리석은 행동을 하지 않기를 바랍니다.
평소의 자신과 비교하였을 때 일상생활 또는 신앙생활에 상당한 지장이 있을 정도로
우울, 불안, 불면 등의 증상이 문제가 된다면, 의사와 약의 도움을 고려해 보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은 사랑이심이라 자살을 생각하는 사람이 자신의 생명을 지키기 위해그렇게 애타게 찾아다니는 것이 바로 사랑입니다.
하나님의 사랑 안에서 살도록 창조된 존재인 우리가타락함으로써 하나님의 영이 우리를 떠나버리게 된후,
우리는 그 사랑의 빈자리를 채우려고 몸부림을치며 살아갑니다.

그러다 지쳐버리면 우울증을 앓게 되고,
더 나아가 자살까지도 생각하게 됩니다.그런데 문제는 우리가 그렇게도 찾아 헤매는 사랑을 줄만한
사람이 주위에 있다고 하더라도 그 사랑은 명백한 한계를 가집니다.
그래서 우리를 더 목마르게 만들기도 합니다. 문제가 하나님의 영이 떠난것으로부터 시작되었으니
완벽한 해결은 하나님의영이 우리 안으로 다시 오시는 것이라는 것은 명백합니다.
그런데 우리에게는 어떤 일이 일어났나요?그렇습니다. 우리가 타락할 때 우리를 떠나셨던 하나님의 영이,
예수님의 십자가 공로로 인해 우리가다시 의인이 된 직후 다시 우리 안으로 오셨습니다.
그래서 우리의 영을 다시 회복시키셨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더 이상 그 빈자리 때문에 괴로워하지 않을 수 있게 되었습니다.
다시 하나님의 사랑을 마음껏 누릴 수 있게 되었습니다. 할렐루야! 예수님, 감사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울증을 앓게 되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그것은 우리의 겉사람에 남아있는 육신의사고체계와 부정적인 감정이 우리의 속사람으로부터 넘쳐흐르는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의 영·혼·육을 온전히 적시지 못하도록 방해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에게는 주님의 사랑이 부족한 것이 아니라 혼과 육이 그 사랑을 받아들이고 누리는 것이방해를 받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우울증을 이기기 위해서 해야 하는 일은 뭔가 부족한 것을채우기 위해 애쓰는 것이
아니라 이미 우리 안에서 넘치게 흐르는 하나님의 사랑을 더 많이 받아들이고인정하고 누리는 것입니다.
이미 우리의 영 안에 와 계신 하나님께서는 오늘도말씀하십니다.
사랑한다! 우울한 나의 자녀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