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ome 킹덤라이프 킹덤라이프 건강 사랑한다! 우울한 나의 자녀야. Ⅴ
사랑한다! 우울한 나의 자녀야. Ⅴ

사랑한다! 우울한 나의 자녀야. Ⅴ

235
0

KINGDOM LIFE &

건강
사랑한다! 우울한 나의 자녀야. Ⅴ

 

한양의대 교수 김석현

 

「킹덤라이프-건강」 섹션에서 지난 2월호부터 시작한 <사랑한다! 우울한 나의 자녀야.> 연재가 벌써 다섯 번째로 접어들었습니다.

그동안 우울증에 대한 정신의학적 지식에 대해서 이야기를 나누었고,또 우울증의 주 중상 9가지 중, “우울한 기분”과 “모든 것이 귀찮고”까지 살펴보았습니다.

이번 호에서는 “사는 재미가 없다고 느껴지고 예전에 좋아했던 것들도 싫어지는” 증상에 대해서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우울증의 주 증상 9가지

① 우울한 기분
② 모든 것이 귀찮고 사는 재미가 없다고 느낍니다. 예전
엔 좋아했던 것들도 싫어집니다.
③ 체중변화, 식욕변화
④ 불면 또는 수면과다
⑤ 초조 또는 지체
⑥ 피로감, 무기력
⑦ 무가치감, 죄책감
⑧ 집중력 저하, 결단력 저하
⑨ 죽음에 대한 생각, 자살
사는 재미가 없고 예전엔 좋아했던 것들도 싫어지십니까?
“사는 재미가 없다고 느껴지는” 것은 무엇 때문일까요? 왜 “예전엔 좋아했던 것들도 싫어지는” 것일까요?

가장 먼저 점검해 보아야 하는 것이 우리가 어디서 재미를 느끼느냐와 어떤 것들을 좋아했던 것인가 하는 문제입니다.

 

내가 주는 물을 마시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니 내가 주는물은 그 속에서 영생하도록

솟아나는 샘물이 되리라 여자가 이르되주여 그런 물을 내게 주사 목마르지도 않고 또 여기 물 길으러 오지도 않게 하옵소서 요4:14-15

 

앞서 인용한 요한복음 말씀에서 본 것처럼, 우리를 영원히 목마르지 않게 할 수 있는 것은 예수님께서 주시는 물 밖에 없습니다.
그 외에 어떤 것들도 우리를 목마르게 합니다. 처음에는 그것이 좋고 재미가 나서 최선을 다합니다.
그렇지만 그 어떤 것도 지속적으로 우리를 만족시키지는 못합니다.
부자도 아니고 별로 인생을 즐겨보지도 못한 제가 이런 이야기를 하는 것은 충분한 설득력을 가지지 못하겠지만,
솔로몬이 그렇게 말한 것에 대해서는 여러분들도 이의를 제기하지는 못하실 것입니다. (이참에 전 도서를 다시 한 번 읽어보시기 바랍니다.)

 

그 후에 내가 생각해 본즉 내 손으로 한 모든 일과 내가 수고한 모든것이 다 헛되어 바람을 잡는 것이며 해 아래에서 무익한 것이로다 전2:11

 

솔로몬은 그의 인생을 돌아보면서 자신이 한 모든일과 수고한 모든 것이 다 헛되어 바람을 잡는 것이며 무익한 것이라고 말합니다.
솔로몬이 그렇다면 틀림없이 그럴 것입니다. 그리고 그는 이렇게 결론을 맺습니다.

 

사람들이 사는 동안에 기뻐하며 선을 행하는 것보다 더 나은 것이없는 줄을 내가 알았고

사람마다 먹고 마시는 것과 수고함으로 낙을 누리는 그것이 하나님의 선물인 줄도 또한 알았도다 전3:12-13

 

잘 아시는 바와 같이 기뻐하는 것과 선을 행하는 것은 하나님께서 우리를 새 피조물로 만들어주셨기 때문에 가능한 일입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선물입니다. 다시 말해서 하나님과 관련되지 않은 어떤 걸 로는 낙을 누릴 수가 없습니다.
만약 내가 지금 사는 재미를 느끼지 못한다면, 더구나 예전엔 좋아했던 것들조차도 싫어진다면,
그것은 솔로몬이 말한것처럼 바람을 잡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제 해야 할 일은 하나님의 선물을 받아 누리는 것입니다.
하나님으로부터 오지 않은 그 어떤 것도 우리를 지속적으로 만족시키지 못합니다.
헛된 것 말고하나님의 선물을 찾아 그것으로 사는 재미를 삼으셔야 합니다.
하나님으로부터 오지 않은 즐거움을 우리는 “세상 낙”이라고 합니다.

여러분이 정말 “이전엔 세상 낙 기뻤어도 지금 내 기쁨은 오직 예수”인 상태인지를 점검하시고,
만약 그렇지 않다면 성령님께 내가 버려야 할 것을 보여주시고 그것으로부터 오는 기쁨이 아니라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기쁨을 누릴 수 있도록 도움을 청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점점 더 심해지는 목마름으로 인해 여러분의 심령은 우울해 질 수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무가치감…

다음으로 “무가치감”에 대해 생각해 보겠습니다. 우리가 내 자신에 대해서 가치가 있다 없다를 판단하는 기준은 대부분의 경우에 상대적입니다.
즉, 뭔가를 그럴 듯하게 해내고 있다거나 남들에 비해 좀 괜찮아 보인다고 생각될 때 자신을 가치 있게 여기게 된다는 뜻입니다.
반대로 뭔가 내가 하는 일이 다른 사람이 하는 일에 비해서 별반 뛰어나 보이지 않거나,
지금까지 내가 해 온 일이 다른 사람이 이루어놓은 것에 비해 하찮아 보일 때 금세 자신을 가치 없게 여기게 됩니다.
시험성적을 매기는 방식으로 이야기하자면, 절대평가를 하는 것이 아니라 상대평가를 하고 있는 것입니다.
절대평가란 평균이 얼마이든 만점이 몇 명이든 나온 성적 그대로를 나의 성적으로 인정해 주는 방식입니다.
상대평가란 내가 받은 점수가 다른 사람들의 성적에 따라 조정이 되고 그렇게 조정된 점수를 나의 성적으로 인정해 주는 방식입니다.

즉, 내가 90점을 받았지만 그보다 더 좋은 성적을 받은 사람들이 사전에 정해진 비율보다 높으면 성적이 하향조정되어 85점으로 변할 수도 있고,
반대로 85점을 받았지만 시험이 전체적으로 어려워 평균이 낮으면 성적을 상향조정하여 90점이 되어버리기도 하는 방식입니다.
예를 들어보겠습니다. ○○자매가 구원받은 후 교회를 섬기고 있었습니다.

특별히 유치부 아이들을 가르치는 역할을 맡아서 뛰어난 솜씨는 아니지만 교보재도 만들고
율동도 익혀 아이들에게 하나님의 사랑을 가르치는 일을 기쁨과 감사로 최선을 다해서 해나가고 있었습니다.
학생 시절 유치원에서 아이들을 돌보는 봉사활동을 해 보았던 것이 큰 도움이 된다는 생각이 들어
그 일을 미리 경험하게 하신 하나님께 감사도 드려가면서요. 그런데 어느 날 유아교육을 전공하고
유치원 교사 경력도 있는 △△자매가 이 교회를 다니게 되었고, △△자매도 유치부 봉사를 원하여 같은 팀으로 일하게 되었습니다.
유치원 교사 경력이 있는 △△자매와 함께 아이들을 돌보게 되니 자신이 혼자서 할 때보다 더 많은 것들을
준비할 수 있게 되어서 아이들과 부모님들 모두가 하나님께 감사를 드리며 주일을 더욱 기쁘게 보내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시간이 흐르면서 ○○자매 마음 안에서 그 이전의 기쁨과 감사가 조금씩 사라져가는 것이 느껴지기 시작했습니다.
무얼 하든지 자꾸 △△자매님의 눈치를 보게 되고 비교를 하게 되는 것이었습니다.
급기야는 유아교육을 전공하고 싶었지만 포기할 수밖에 없었던 가정형편까지 생각이 나면서 부모님에 대한 원망이 느껴지기도 했습니다.
아이들과 함께 보낼 주일을 기다리며 즐겁게 준비하던 것들이 이제는 짐스럽게 느껴지기도 합니다.
△△자매가 오기 전에는 ○○자매는 스스로에 대해 절대평가를 하고 있었습니다.

즉, 하나님 안에서의 자신을 생각하며 감사와 기쁨으로 하루하루를 지냈습니다.
그러다 △△자매가 온 이후부터는 자신에 대한 평가방법을 절대평가에서 상대평가로 바꾸어버렸습니다.
하나님 안에서의 자신을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자매와 비교되는 자신을 바라보기시작했던 것입니다.
그전에는 하나님 앞에서 충분히 사랑받는 자녀였는데, 이제는 사랑을 받기는 받지만 △△자매보다는 덜 사랑받는,
다시 말해 덜 사랑스러운 자신을 바라보기 시작했던 것입니다.

이렇게 생각하는 바탕에는 어떤 마음이 있는 것일까요?
두 가지 측면에서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첫째는 비교의식입니다.
위에서 예를 들었던 ○○자매처럼 지금까지는 있는 그대로의 자신, 현재의 처지에서의 자신을 바라보면서도 기뻐하고 감사할 수 있었던 사람이,
뭔가와 또는 누군가와 비교를 하게 되면서부터 지금의 모습이 부족하게 느껴져서 지금보다 더 나아야 하고 더 잘했어야 한다는 마음에 사로잡히게 됩니다.
만약 내 자신을 보기에 지금 이 모습 이대로는 크게 가치가 없다고 생각하고 있다면,
그것은 내가 지금보다 더 나을 수 있다는 것을 전제로 하는 것입니다.
지금의 내 모습이 내가 최선을 다한 모습이라고 생각한다면 아쉬움을 느낄 수는 있어도
누구도 그것으로 인해 낙담하거나 우울해 하지는 않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뭔가 더 나을 수 있는데 그렇지 못하기 때문에,
뭔가 더 잘 할 수 있는데 그렇지 못하기 때문에 자신이 무가치하게 느껴지는 것입니다. 정말 여러분은 지금보다 더 나을 수 있었습니까?
물론 지금보다 더 높은 지위나 재산을 가질 수도 있었겠지요. 그래서 내가 원하는 위치나 여건에 이미 가 있는 비교 대상을 바라보며,
나도 저 위치나 여건에 있다면 정말 나 자신에 대해서 만족하며 감사하며 살 텐데 라고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그 위치에 가면 정말 그렇게 생각할까요? 이에 대한 답변은 이미 앞에서 솔로몬 왕이 해 주었습니다.
비교의식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한은 어떤 위치나 여건에 있더라도 만족할 수 없습니다.
자 그렇다면 다시 한 번 질문합니다.

정말 여러분은 지금보다 더 나을 수 있었습니까?
이번에는 바람같이 부질없는 것들에 대한 생각은 다 걷어내고 정말 중요한 것을 두고 생각해 보십시오.
지금의 내 모습이 내가 최선을 다한 모습이라고 생각한다면 아쉬움을 느낄 수는 있어도
누구도 그것으로 인해 낙담하거나 우울해 하지는 않을 것이라고 말씀드렸습니다.
더 나아가 지금의 내 모습이 내가 열 번을 죽었다 깨어나도 될 수 없는 것이었다고 생각한다면 지금의 내 모습이 정말 좋아서 대만족을 하지 않겠습니까?
자기 자신을 너무나 존귀하게 여기지 않겠습니까? 이것이 자신이 어디에 있었다가 지금 어디에 와 있는지를 정확히 아는 사람들이 보이는 모습입니다.
절대로 얻을 수 없는 것, 절대로 될 수 없는 것을 얻는 사람들이 보이는 모습입니다. 그런 사람들은 말합니다.

모든 것이 은혜라고. 모든 것이 예수님으로 인한 것이라고. 그래서 감사하다고.
둘째는 교만입니다. 하나님은 여러분을 어떻게 보고 계십니까? 학벌과 실력과 스펙과 재산으로 여러분을 평가하십니까?
여러분의 능력에 등급을 매기시고 그것으로 여러분을 평가하십니까? 하나님께서 우리를 평가하시는 기준은 단 하나뿐입니다.
그것은 바로 예수님과의 관련성, 즉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로 죄사함을 받은 의인이냐 아니냐하는 것뿐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자녀인가 아닌가로만 우리를 바라보십니다.

거기에는 여러분이 얼마나 학벌이 좋은지 실력이 좋은지 많은 스펙을 쌓았는지 재산이 얼마나 많은지 등은 전혀 영향을 미치지 못합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자녀 위에는 더 이상 다른 등급이 없습니다. 의인 위에도 어떤 다른 등급도 없습니다.
이미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노력과 상관없이 우리를 가장 높은 등급인 하나님의 자녀, 의인의 위치에 올려다 놓으셨는데,
우리를 이 땅에서 사는 존재가 아니라 완전히 차원이 다른 하나님나라에서 사는 존재로 만들어 두셨는데,
우리가 그것이 부족하다고 느낀다면 이 얼마나 엄청난 교만입니까? 거기에 우리의 노력이 그 어떤 것을 더할 수가 있습니까?
그런데 왜 현재의 자신을 무가치하게 느낍니까? 왜 현재의 신분에 기뻐하고 감사하지 않습니까?

왜 현재 자신이 하고 있는 일을 소중하게 생각하지 않습니까? 왜 큰일이니 작은 일이니,
또는 중요한 일이니 별 거 아닌 일이니 하며 나누십니까? 그 이유는 하나님께서 예수님의 보혈로 우리에게 주신 신분이 우리의 안중에 없기 때문입니다.
그것이 얼마나 귀한 것인지를 알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알기는 알지만 거기에
나를 다른 사람과 구별해서 더 높여줄 무언가가 있어야 한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정말 잘못된 생각입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백날 외치면 무엇 합니까? 하나님의 은혜가 여전히 나에게는 다른 사람이 받은 은혜와 비교대상이 되고 있고,

그것이 부족하여 무언가를 추가해야 된다고 생각하고 있다면, 정말 그것을 은혜라고 생각하고 있다고 할 수 있습니까?

현재의 나의 위치가 나로서는 도저히 누릴 수 없는, 그야말로 은혜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이렇게 말할 수밖에 없습니다.

 

주의 궁정에서의 한 날이 다른 곳에서의 천 날보다

나은즉 악인의 장막에 사는 것보다 내 하나님의 성전 문지기로 있는 것이 좋사오니 시84:10

 

“나는 악인의 장막에서 살 수밖에 없는 자인데, 하나님의 은혜로 하나님의 성전 문지기로 있게 해 주시다니 이 얼마나 놀라운 은혜인지요?
다른 곳에서 아무리 부귀영화를 누리며 천 날을 살아간다고 한들 주의 궁정에서의 단 하루와 바꿀 수 없습니다.” 이렇게 고백할 수밖에 없습니다.
이렇게 고백하는 할 수 있는 사람은 결코 현재의 나의 모습과 위치에 구애받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 주신 은혜가 감사하여 지금 내가 어떻게 되는 그것이 별로 중요하지 않습니다.
그런데 그 은혜가 적당히 감사하기 때문에 자꾸 거기에 무언가를 더해야만 하고, 이대로는 부족하다고 생각하게 되고,
그러다보니 그것이 뜻대로 되지 않으면 스스로를 낮추어 무가치하게 여기게 되는 것입니다.

 

비교의식

얼마 전 오랜만에 <닉 부이지치>의 영상을 다시 볼 기회가 있었습니다. 그동안 얼굴은 더 밝아지고 기쁨은 더 넘치는 듯 보였습니다.
“무엇이 팔도 다리도 하나 성한 것이 없는 저 사람을 저렇게도 밝고 기쁘게 만들었을까?”라는 궁금증이 새삼스럽게 들었습니다.
그리고 “혹시 저 사람 ‘어차피 이렇게 된 거 그냥 괜찮은 척 하고 살자…’며 밝은 척 기쁜 척 하면서 살고 있는 것은 아닐까?”라는 의심도 들었습니다.
그러나 생각해 보니 만약 그가 거짓으로 그렇게 살았다면 이미 그 거짓이 드러나고도 남을 만큼 충분한 시간이 흘렀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물론 지금처럼 진심으로 기뻐하며 살다가 어떤 역경 앞에서 또 잠시 힘들어할 수도 있겠지만, 적어도 지금까지의 그의 삶이 진짜가 아니라고 하기에는 너무 많은 시간이 흘렀습니다.
장애가 익숙해져서 이제는 스스로 큰 불편을 못 느껴서 그런 것일 수도 없습니다.
그의 장애는 익숙해진다고 해결될 수 있는 수준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는 지금도 자신의 장애가 사라지기를 소망하고 있습니다.
지금도 팔다리가 정상적으로 생겨나는 것을 기도하고 있습니다. 지금 이 순간에도 그의 장애는 그에게 견디기 쉽지 않은 불편인 것입니다.
사람들에게 큰 관심을 받고 있기 때문에 그런 것일 수도 없습니다.
많은 스타들이 사람들의 폭발적인 관심을 받으면서 더욱 외로워하고
동시에 그 관심이 사라질까봐 두려워하느라 기쁘게 살지 못하는 것을 우리는 자주 봅니다.
그렇다면 적어도 지금까지의 그의 삶이 위장되고 포장된 것이라고 의심할만한 여지는 없어 보입니다.

이쯤에서 궁금증과 의심을 접고 다시 생각해 보았습니다.
“사람들은 왜 저 사람의 메시지를 듣고 감동하는 것일까?” 그래서 그 영상을 같이 보았던 사람들에게 어떤 부분이 감동적이었는지 물어보았습니다.
혹시 여러분들도 닉 부이지치가 누구인지 아신다면, 이 질문에 한번 답을 해 보시기 바랍니다.
만약 모르신다면 인터넷에서 한번 검색해 보시기 바랍니다. 아마 투자하신 시간이 아깝다고 느껴지지는 않을 것입니다.
사람들의 대답은 대개 다음 두 가지 중 하나였습니다.

첫째는 “저런 여건에서도 저렇게 살아가는 모습이 정말 감동적이다.”였고,
둘째는 “나에게 건강한 신체가 있다는 것이 참 감사하다. 나도 저 분만큼 열심히 살아야겠다.”였습니다.
여러분의 대답은 저와 이야기를 나누었던 사람들의 대답과 비슷한가요? 아니면 다른 대답인가요?
사람들에게 다시 질문했습니다. “그런 부분에서 감동을 받으셨군요. 질문을 한 가지 더 드리겠습니다.
여러분이 저 분과 같은 상태가 되었다고 생각해 보십시오.

여러분은 어떨 것 같습니까?” 이렇게 질문하자 “어쩔 수 없이 적응했겠죠?”라거나 “시간은 좀 걸릴지 몰라도 극복하지 않을까요?”라는 대답부터,
“아 저는 저렇게는 하루도 못 살 것 같아요.”, “너무 힘들 것 같아요.”, “그런 생각은 하고 싶지도 않아요.” 등의 상당히 절망적인 대답까지 들을 수 있었습니다.
이런 대답을 듣고 보니 닉 부이지치를 지금처럼 살 수 있도록 만든 것이 무엇인지 분명히 알 수 있었습니다.
그것은 바로 “비교의식으로부터의 해방”이었습니다. 그는 자신과 다른 사람을 비교하지 않고 살고 있는 것입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자신이 사람들 앞에서 메시지를 선포할 때 아무리 놀라운 반응을 받는다고 하더라도, 메시지를 선포하려고 강대상에
오르기 위해 다른 사람의 도움을 받아야 하고 또 내려올 때도 도움을 받아야 하는 것에 마음이 간다면,
그는 어쩌면 사람들 앞에 선다는 것을 점점 더 불편하게 여겼을 수도 있습니다.
집회에서 자신을 포옹하면서 눈물 흘리며 감동하는 사람들의 표정에서 연민이나 동정이 자꾸 읽힌다면,
그는 어쩌면 자신을 포옹하게 하는 그 일을 포기하였을지도 모릅니다.
그렇다면 그를 포옹한 사람들 중에 그런 표정을 진 사람들이 한 명도 없었기 때문에 그는 이 사역을 계속 할 수 있는 것일까요?

제 생각에는 그런 태도를 보이신 분들이 분명히 있었을 것이고, 그것도 적지 않은 숫자가 그렇게 하였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아니 어떻게 보면 지금까지 그의 인생에서 만난 대부분의 사람들이 그를 바라보는 시선은 연민이나 동정이었을 것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신기하게 바라보기도 했을 것이고, 어떤 사람은 무섭고 끔찍하다며 얼굴을 돌리기도 했을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가 지금까지 이렇게 살아올 수 있었던 것은 “비교의식으로부터 해방”되었기 때문이라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자기보다 조금 더 실력이 나은 듯 보이는 후배가 나타난 것만으로도 힘들어하는 스타들을 생각해 보십시오.

닉 부이지치에게는 그런 사람이 가끔 나타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이 만나는 모든 사람들이 자신과는 비교도 할 수 없는,
즉 자신에게는 하나도 없는 팔과 다리를 두 개씩이나 가지고 살아가는 대단한 사람들입니다.
그래서 자신의 육체와 다른 사람들의 육체를 비교하면서 살았다면, 그가 가야하는 길은 그 이전에 그가 갔었던 자살이라는 길 이외에는 없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그는 어떻게 그런 여건에서도 비교의식으로부터 해방될 수 있었을까요?

어떻게 정상인들과 만나면서도 자신의 처지를 비관하지 않을 수 있었을까요? 그가 찾아보기 힘든 낙관주의자라서 그럴까요? 아닙니다.
우리가 비교의식을 스스로 떨쳐낸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에 가까운 일입니다.
다 떨쳐낸 듯 보이다가도 그것이 바닥이 아니라는 것을 확인하는 상황에 봉착하면,
우리는 여전히 내가 남과 비교하며 나를 위로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자각하게 됩니다.
닉 부이지치가 그렇게 할 수 있었던 이유는 바로 자신의 장애보다 훨씬 큰 하나님의 사랑을 경험했기 때문입니다.
자신의 현재의 모습이 어떠하든 지금 이대로의 모습을 자신의 모든 것을 바쳐 사랑하시는 하나님의 그 큰 사랑을 경험했기 때문입니다.
그것이 바로 닉 부이지치가 지금 같은 상황에서도 자신이 가지고 있는 것만으로도 하나님의 일을 기쁘게 해 나갈 수 있는 이유입니다.

여러분도 나의 어떠함과 상관없이 지금 이대로의 나를 사랑하시는 하나님이라는 고백을 하시죠?
그때마다 하나님의 사랑에 젖어 모든 시름이 다 사라지나요?

아니면 그렇게 고백하면서도 여전히 ‘이렇게 해둔 것도 없고 잘 하는 것도 없고 가진 것도 없는 나를 하나님께서 과연 사랑하실까’라고 생각하며 우울해 하시나요?
여러분이 하나님의 조건 없는 사랑을 경험하는 것이 힘들다면 닉 부이지치에게는 그것이 얼마나 더 힘든 일이었을지 한번 상상을 해 보시기 바랍니다.
그에게는 우리가 간절히 기도할 때 아무렇지도 않게 사용하는 두 손과 팔도 없습니다.
그에게는 우리가 간절히 기도할 때 아무렇지도 않게 사용하는 두 무릎도 없습니다.
그런데 그런 그가 하나님께서 지금 이대로의 모습대로 자신을 사랑하신다는 것을 깨달았던 것입니다.
그리고 그 사랑에 겨워 남들에게는 있고 자신에게는 없는 것이 큰 문제가 되지 않았던 것입니다.
그리고 그 사랑에 겨워 지금 자신에게 있는 발가락으로 할 수 있는 일을 최선을 다해 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그 사랑에 겨워 한 순간 한 순간이 장애 때문에 괴로워도 그 괴로움에 감사와 기쁨을 빼앗기지 않게 되었던 것입니다.
그러니 여러분! 이제 더 이상 자신을 다른 사람과 비교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더 이상 스스로가 생각하는 좋은 자녀의 모습과 현실의 자신을 비교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더 이상 비교의식 때문에 우울해 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솔로몬이 헛되다고 하면 헛된 것처럼,
팔 다리 하나도 없는 닉 부이지치가 하나님께서는 지금 이대로의 우리를 목숨 바쳐 사랑하신다면 사랑하시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스스로를 무가치하다고 여기거나 또는 가치 있다고 여기는 것은 여러분의 본질에는 아무런 영향도 미치지 못합니다.
자신이 가치가 있나 없나 평가하고 비교하는 것은 정말 쓸데없고 우스운 일입니다.
왜냐하면 여러분의 본질은 여러분의 비교나 다른 사람들의 비교에 의해 평가되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의 본질은 내 안에 계신 예수 그리스도의 본질과 같습니다. 그리고 여러분은 이미 하나님의 큰 사랑 안에서 하나님께 가장 큰 가치로 매김 되어 있습니다.
여러분이 그것을 인정하고 기뻐하든, 아니면 그것을 거부하고 우울해 하든 여러분은 이미 하나님께 너무나 소중한 존재입니다.
더 이상 비교의식에 묶여 우울해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머리로는 알지만 벗어날 수가 없어서 더 우울하십니까?
그 마음을 들고 성령님 앞으로 나가셔서 도움을 구하십시오.

성령님께서는 여러분의 상한 심령이 회복되어 하나님을 다시 신뢰할 수 있기를 누구보다도 원하시는 분입니다.

 

하나님께서 구하시는 제사는 상한 심령이라 하나님이여 상하고 통회하는 마음을 주께서 멸시하지 아니하시리이다 시51:17

 

솔로몬이 발견한 하나님의 선물이 여러분의 것이 되기를,

그리고 닉 부이지치가 체험한 그 조건 없는 하나님의 사랑이 여러분의 것이 되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댓글을 남겨주세요

이메일은 공개되지 않습니다. 필수 입력창은 * 로 표시되어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