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ome 킹덤라이프 킹덤라이프 영화 그렇게 아버지가 된다
그렇게 아버지가 된다

그렇게 아버지가 된다

719
0

KINGDOM LIFE &

힐링시네마
그렇게 아버지가 된다

 

작가 이애경

 

좋은 아버지가 되는 길은 어렵다. 아니, 좋은 아버지는 고사하고 아버지가 되는 길조차도 쉽지 않다. 오죽하면 ‘아버지 학교’라는 것을 만들어 아버지가 되는 법을 훈련시켜야 했을까. 특히나 직장에서 일하느라 가족을 돌보지 못하는 한국, 일본의 가장들에게는 아버지라는 단어는 가족들에게 의무를 다하려 애쓰다가 정작 가족으로부터 소외되어버린 일그러진 자화상으로만 남는다. 그런 점에서 이 영화는 이 땅의 상처받은 아버지들이 한 번쯤은 꼭 봐야 할 영화다. 잘 몰랐기에 할 수 없었던, 쉽지만 잘 몰랐던 아버지가 되는 길을 알려주는 영화이기 때문이다.

 


 

지난 4월 이후, 대한민국의 화두는 누가 뭐래도 가족의 사랑이었다. 부모와 자식간의 사랑, 친구와 친구간의 사랑, 학생과 스승과의 사랑. 세월호의 비극이 할퀴고 지나간 상처에서 솟아나는 것은 누가 뭐래도 가족 간의 사랑이었다. 그 중에서도 가장 깊게 우리 모두를 흔들었던 건 바로 부모 자식 간의 사랑이다.

세상에는 다양한 형태의 부모가 존재하고, 또 다양한 자녀들이 존재하지만 부모와 자식은 ‘피’로 이어졌다는 공통분모를 가지고 있다. 피로 이어지지 않았다면 ‘인연’으로 이어져 함께 살을 맞대고 살아가게 된다.

부모와 자식의 인연을 단단하게 묶는 것은 그 무엇보다도 시간이다. 서로 함께 보내는 시간. 아이가 태어나게 되면서 눈을 떼지 않고 24시간을 쳐다보고 함께 보내는 시간. 아이가 자람에 따라 조금씩 변화는 있지만 함께 놀아주고 눈을 맞춰주며 보내는 시간이 아이를 성장시키는데 무엇보다도 중요하다. 그래서 낳은 정보다는 기른 정이라는 말이 있나보다. 부부가 시간을 보내며 닮아가듯, 피도 중요하지만 공유된 시간이 더욱 중요한 것이 부모자식간의 역학 관계다. 이 영화는 그 공유해야 할 시간을 잃어버린 한 가정의 이야기를 조심스럽게 세상에 내놓는다. 당신의 가정도, 이렇게 그 소중한 시간을 잊고 산 건 아니냐는 숨은 질문을 관객들에게 던지며 말이다.

태어나서 지금까지 한 번도 쉬지 않고 열심히 성공가도를 달려온 료타. 그 옆에는 일밖에 모르는 남편 료타를 내조하며 잔잔하게 살아온 사랑스러운 아내 미도리가 있다. 그리고 그 사이에는 어린 양처럼 크고 맑은 눈을 가지고 있는 귀엽고 성숙한 아들 케이타가 있다. 아빠의 사랑을 받아야할 나이이지만 오직 일에만 신경을 쓰는 아빠와 시간을 보내는 일은 거의 없다.

료타는 아무리 연습해도 늘지 않는 아들 케이타의 피아노 실력이 맘에 들지 않아 못마땅한 말들을 툭 던지는가 하면, 아들에게 경쟁심이 없다는 사실도 마뜩치 않아 한다. 엄마는 케이타를 보호하기 위해 아들에게 사랑을 쏟아부어주지만, 세 사람 사이의 공기는 무언가 덜그럭거리고 활기차지 않다.
그러던 어느 날 미도리는 케이타가 태어난 병원으로부터 전화를 받는다. 한 걸음에 달려간 병원에서 그들은 6년 전, 아이가 병원에서 바뀌었다는 사실을 통보받는다. 청천벽력 같은 소식을 듣자 료타와 미도리는 어쩔 줄을 몰라 한다. 미도리는 자기가 엄마이면서도 케이타가 친아들이 아닌 것을 알지 못했다는것 때문에 괴로워하고 료타는 친아들을 키우고 있는, 맞은편에 앉은 상대편 가족을 살펴보며 마땅치 않아 한다. 졸지에 친아들로 밝혀진 류세이의 아버지 유다이가 시골에서 전기 상점을 한다는 것도, 그 부부가 자꾸만 돈을 밝히는 이야기들을 하는 것도 료타의 마음에 들지 않았기 때문이다.

료타 부부와 유다이 부부는 아이들을 어떻게 할지를 놓고 고민을 시작한다. “낳은 정보다 기른 정”이라는 말과 “피는 물보다 진하다”는 말 사이의 갈등을 고스란히 겪어내며 두 부부는 아이들을 어떻게 할 것인지를 고민한다. 처음에는 가끔 만나 함께 시간을 보내고 노는 것으로 서로의 얼굴을 익힌다. 역시나 아이들은 쉽게 친해지고, 특히 맏이 류세이를 포함한 세 명의 아이들은 케이타와 어울려 금방 친구가 된다. 유다이는 아이들과 함께 뒹굴고 놀아주며 시간을 보내고, 케이타는 그렇게 자기와 함께 놀아주는 아저씨 유다이와 친해진다.

다음 단계는 아이를 바꿔서 집에서 재워보는 단계. 깔끔하고 세련된 고층 맨션에 사는 료타 부부는 자기 집에 놀러온 친아들 류세이에게 좋은 것을 해주려고 애를 쓴다. 그러나 아버지와 살을 비비며 살아온 류세이에게 료타라는 아저씨는 쉽게 다다갈 수 없는 존재로 여겨진다. 아이는 자꾸 시계만 보고 집에 가고 싶다고 천진난만하게 이야기한다. 케이타는 부유하지는 않지만 사랑이 넘치는 유다이네 시골집에서 동생들과 함께 신나는 하루를 보낸다. 아저씨는 목욕도 함께 하며 자기와 시간을 내어 놀아준다. 아버지의 사랑에 늘 목말라하던 케이타에게 아저씨는 기쁨을 주는 존재가 된다.

아이들을 원래대로 바꿔서 기를 것인지, 아니면 자신들이 기른 아이들을 그냥 기를 것인지에 대한 고민은 계속해서 깊어진다. 하지만 시간을 보내면 보낼수록 잘못된 것을 되돌려서 바로 잡아야한다는 쪽에 더욱 무게가 실어진다. 결국 두 부부는 아이를 바꾸기로 결정한다.

몇 번의 아이 교환을 통해 서로에게 익숙해진 아이들에게 이제는 오랫동안 집을 바꿔서 지낼 것이라고 말한다. 료타는 케이타에게 그 집에서 사는 것이 어른이 되는 미션이라고 얘기해주면서, 보고 싶어도 전화하지 말고 참으라고 지시한다. 케이타는 큰 눈을 껌뻑이며 아빠의 말을 따르겠다는 표정을 짓는다. 료타에게 보내진 친아들 류세이도 처음에는 이 상황을 저항 없이 받아들이지만, 시간이 갈수록 시골집을 그리워한다. 류세이에게 이 집은 편하지도, 즐겁지도 않다. 더구나 자신을 아빠라고 부르라는 료타의 말은 더욱 이해가 되지 않는다.새로운 가정에서 살기 시작한 아이들에게 시간은 흐르고, 류세이는 결국 가출해 자기 집으로 돌아간다. 행방불명된 아이를 찾던 료타 부부는 아이가 자기 집으로 돌아왔다는 전화를 받고 유다이 부부네 집으로 찾아간다. 오랜만에 찾아온 자기 아빠의 목소리를 들은 케이타는 벽장 구석으로 숨어버리고, 류세이는 료타 부부의 손에 이끌려 집으로 돌아간다.

친아들 류세이를 데리고 돌아온 료타는 아빠로서 역할을 열심히 해보려고 노력한다. 장난감도 고쳐주려고 애를 쓰고, 총싸움을 하며 아이와 몸으로 부딪히며 시간을 보내주려고 애를 쓴다. 연을 날리고 싶고 캠핑하고 싶다는 아이의 소원에 따라, 텐트를 사서 집안에다 텐트를 치고 야영놀이를 한다. 그렇게 료타는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한다.
그러던 중, 자기의 카메라 사진들을 체크해보던 료타는 우연히 아들 케이타가 옛날에 찍은 사진들을 보게 된다. 자기가 자는 모습, 무방비 상태로 노출된 침대 위의 자기 발, 자신의 뒷모습. 하염없이 아빠 바라기를 하고 있던 아들의 말없는 감정이 사진을 통해 전해지자, 료타는 가슴이 먹먹해진다. 그리고 유다이네 집으로 가족들을 끌고 떠난다.

 

아버지가 된다는 것은 ‘진행형 동사’이다

친부모의 집에 살게 된 류세이에게 이제부터는 아빠, 엄마라고 부르라고 요청을 하자 류세이는 “왜요?”라는 질문을 계속한다. 아이에게는 이해되지 않는 것이 당연하다. 어느 날 갑자기 나타난 사람에게 아빠라고 부르라니. 자기가 아는 ‘아빠’라는 단어에 혼동이 생기는 순간이다. 태어나면서부터 내 옆에 있던 남자 어른이 아빠가 아니던가. 나와 놀아주고 함께 목욕해주고 잔디밭에 누워 별을 바라보는 사람이, 장난감을 고쳐주고 나와 놀아주는 사람이 아빠인데. 감독은 대여섯 번 반복되는 아이의 “왜요?”라는 질문을 통해 아빠와 엄마란 무엇인가에 대해 관객들에게 묻는다. 과연, 아빠란 무엇일까.

재미있는 것은 결혼은 ‘하고’, 이성 친구는 ‘생기고’, 가족이 살 집은 ‘사고’ 등 일회의 행동으로 결과가 고정되는 완료형 동사이지만, 아빠는 ‘된다’는 진행형 동사를 쓴다. 아빠는 10개월 동안 ‘된다’는 의미를 가슴깊이 새겨 넣는 시간을 가진다.

‘된다’는 동사는 ‘다른 것으로 바뀌거나 변한다’, ‘어떤 상태에 이르다’는 뜻이다. ‘된다’는 단어는 선천적으로 진행의 의미를 갖고 있다. 무엇에서 무엇으로 변해간다는 뜻이고, 방향점이 있다. 그런 면에서 아빠가 된다는 것은 끊임없는 과정을 지나가야 하는 운명을 타고 났는지도 모른다.

영화의 초반에는 보잘 것 없고 부유하지도 않은 유다이네 가족보다는, 경제적으로 안정되고 모든 것을 다 갖춘 듯한 료타네 가족이 아이들을 잘 키울 같이 보인다. 하지만 영화가 계속되고 극명하게 대비되는 두 가정의 삶의 방식이 거침없이 드러나기 시작하면, 어느 한 쪽이 무언가 부족하고 균형이 잡히지 않았다는 것을 보게 된다.

감독은 아이들이 잘 따르는 아빠란 어떤 것인지, 아빠가 되는 것이란 무엇인지를 유다이 가족을 통해 료타에게, 또 우리들에게 넌지시 제시한다. 그 중 첫 번째는 바로 돈에 관한 개념이다. 영화는 가족들이 풍요롭게 쓸 정도로 아버지가 돈을 많이 버는 것이 중요한 게 아니라, 가장인 아버지가 가족을 책임져야한다는 경제적 관념을 갖고 있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을 알려준다.

그래서 유다이가 돈에 민감할 수밖에 없는 이유에 공감하게 된다. 그가 처음부터 이 사건에 대한 위자료를 얼마나 받을 것인지 운운하며 돈을 밝힌 것은, 돈에 대한 집착이라기보다는 세 아이의 가장으로서 충분히 나올 수 있는 반응. 케이타도 친아빠 유다이를 따르게 되고, 관객들도 유다이의 양육법에 설득당하고 만다.

그리고 돈에 대한 레슨이 끝나면, 시간에 대한 개념이 개입된다. 유다이는 료타에게 묻는다. 왜 아이와 목욕도 같이 하지 않냐고. 그리고 조언한다. 아이와 같이 있을 시간을 더 만들고 아이들을 귀찮아하지 말라고. 아이와 함께 하는 시간은 중요하다고. 아이들에게 가장 중요한 건 시간이라고.

성공하는 것이 중요하고 내가 꼭 해야만 하는 일이 있다는 료타에게 그는 “아버지가 되는 것은 당신이 아니면 다른 사람은 하지 못한다.”는 귀한 조언을 해 주지만, 료타는 그 말의 깊이를 잘 깨닫지 못한다. 아버지가 되거나, 혹은 되어가는 데는 분명하게 시간이 개입되어야 한다는 사실을 말이다.

 

피아노가 아버지에게 가르쳐주는 것들

영화에는 전반에 걸쳐 피아노 음악이 흐른다. 화려한 오케스트라 사운드도, 가사가 있는 대중음악도 삽입하지 않았다. 간결하고 단아한 피아노 선율만이 영화에 흐른다. 영화를 통해 흘러나오는 피아노 소리는 네 가지다. 케이타가 더듬더듬 연주하는 피아노 소리, 료타가 부모님 집에 놀러갔을 때 아버지가 “3년 동안 똑같은 노래만 친다.”고 진저리를 냈던 어설픈 피아노 소리, 그리고 케이타의 유치원에서 한 여자 아이가 들려준 능숙한 피아노 연주. 그리고 영화 전반에 깔린 전문가가 연주한 OST다.

감독은 아버지가 되는 길은 이렇게 피아노를 연주하는 것과 같은 것이라는 생각을 했는지도 모르겠다. 누구에게는 너무 쉬운 일이 다른 누군가에게는 너무도 어려운 일이고, 그것은 다양한 사람들이 다양한 수준으로 피아노를 치듯, 그렇게 표현되는 일인 것이다. 어떤 사람은 마음과 다르게 연습해도 잘 되지 않기도 하고, 어떤 사람은 다른 사람보다는 배우는 속도가 좀 빠르기도 하다.

아이러니하게도 아이 사랑의 표현에 서툰 료타의 아들 케이타의 피아노 연주도 서투르고, 아들 사랑을 잘 표현하지 못했던 료타의 아버지네 옆집에서 들려오는 피아노 연주도 서투르다. 아이를 사랑하는 방법에 서툰 어른들의 방식을 상징적으로 표현해 내듯, 감독은 서툰 피아노 연주를 숨은 그림 찾기 놀이처럼 깔아놓았다.

피아노는 한 곡을 완벽하게 연주할 수 있게 된 뒤 다음 곡으로 넘어가며 실력을 익히는 방법을 쓴다. 한 곡을 끝내지 못하면 다음 곡을 칠 수가 없다. 그 곡에서 배운 것들을 연주할 수 있어야만 그 다음 곡을 칠 수 있는 능력이 만들어지기 때문이다. 어쩌면 아버지가 되는 것도 그와 동일한 지도 모른다. 아주 기본적인 것부터, 쉬운 것부터 연습하고 그것이 몸에 배어야 한다. 멜로디를 머리로 익히고, 손가락 근육이 자동적으로 건반을 두드릴 수 있게 되어야 한 곡이 완성된다. 그리고 거기에 감정을 싣게 되는 순간, 아름다운 연주가 된다. 아버지의 역할이 어떤 것인지를 머리로 깨닫고, 그것이 몸으로, 근육으로 반사적으로 나올 때까지 연습하고, 거기에 사랑의 감정을 담으면 완성되는 것이다. 그리고 피아노 연주에는 ‘시간’을 할애해 연습하는 것이 필수적인 요소이듯, 아버지가 되는 것에도 시간을 할애하는 것이 절대적으로 필요하다.

 

주의하지 않으면, 쉽게 빠지게 되는 죄책감이라는 함정

아이가 바뀌었다는 이야기를 듣고 난 뒤 엄마인 미도리에게 처음으로 주어진 생각은 바로 “나는 왜 엄마인데 이것을 몰랐을까?”였다. 그것은 영화를 지켜보고 있는 관객들이 던질 질문을 알고 미리 자기에게 던진 질문 같기도 하다.

어떤 사건이 생기거나 자신에게 어떤 일이 닥치면 사람들에게는 두 가지 반응이 일어난다. 다른 사람을 탓하는 경우와 나 자신에게 그 화살을 돌리는 경우. 미도리의 경우에는 자기 자신에게 그 책임을 묻고자하는 생각이 강하게 있었다. 그것은 성공주의, 완벽주의를 추구하는 남편의 옆에서 내조를 하는 부인이 되면서 생겨난 습성일 수도 있다. 분노가 죄책감이 되어 자기 자신에게 향한 꼴이다.

미도리는 아이를 낳고 난 뒤 산후 출혈이 심해 얼마동안 계속 몽롱한 상태에 있었기 때문이라고 설명한다. 그러나 마음속에는 여전히 왜 자신이 그걸 알아채지 못했을까 하는 질문이 계속 맴돈다. 그녀는 자신의 부주의, 혹은 커다란 실수가 책망 받을 일이 될까봐 마음이 편치 않다. 그래서 그녀는 이 일에 대해 남편이 어떻게 생각하는지 묻고 또 묻는다. 남편은 괜찮다고 하지만, 그녀는 거짓말이라며 “내 탓으로 생각하잖아!”라고 단정한다. 남편의 생각을 지레 짐작해 칼날을 자기 안으로 겨눈다. 이후에 이 사건을 알게 된 남편의 회사 사람들이 자기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는지를 계속해서 묻는다. 이 대화를 통해 미도리 자신이 안정감이나 확신이 없는 인시큐리티(insecurity) 상태에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친아들도 몰라보다니 너는 엄마로서 자격이 없는 사람이야!”라는 거짓말이 미도리의 생각 속에 내려앉고 그것은 죄책감, 수치로 뿌리를 내려갔다. 그래서 미도리의 영화적 시선은 바뀐 아들 케이타, 진짜 아들 류세이와의 관계를 통하기보다는 계속해서 자기 자신을 향한다. 그렇다고 그녀가 이기적이라는 이야기는 아니다. 그녀는 엄마로서 케이타에게도 류세이에게도 최선을 다하고, 잘 양육한다. 단지, 이 사건을 통해 그녀가 집중하고 있는 것이 어떤 것인지가 조금 드러났다는 것뿐이다. 맨션 거실에서 캠핑을 하며 시간을 보내던 그녀가 밤중에 깨어나 흐느끼던 것도, 아들이 그리워서는 아니었다. ‘류세이가 사랑스러워진’ 자기 자신의 마음에 대한 원망이었고, 케이타를 배신하는 것 같아서 미안해진 자기 자신의 마음에 관한 이야기였다.

자신감이나 안정감, 자존감이 없는 사람들에게는 조그만 사건도 그들을 크게 흔들어놓는 태풍이 된다. 그녀가 내적으로 단단한 사람이었다면 이 과정을 통해 드러나는 모습은 달랐을 것이다. 우리들도 마찬가지다. 내적인 확신이 있거나 단단해지지 않으면 금방 거짓말에 속아 넘어가고, 그것은 죄책감과 수치로 이어져 내면에 깊은 상처를 내게 된다. 어떤 사건이 생겼을 때 반드시 해야 하는 일은, 내 머릿속으로 들어오는 생각들을 분별하는 일이다. 사단은 하나님의 자녀들을 훔치고, 죽이고, 멸망시키기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기 때문이다.

아이가 병원에서 바뀌는 사고를 경험한다는 것은 겪고 싶지 않은 아픈 사건이지만, 합력하여 선을 이룬다는 관점에서 보자면 이 사건은 료타 부부에게 아이에 대한 사랑을 깨닫고 또 그들을 자라나게 하는 결정적인 요소가 되었다.

세상은 료타를 진정한 아빠로 만들기 위해 다양한 미션들을 주었다. 멀쩡한 아이가 뒤바뀌게 된 사건은 가장 강하고 충격적인 미션이었다. 그리고나서 다른 아빠가 어떻게 자식을 기르는지를 가까이 지켜볼 수 있는 일이 주어졌고, 오직일만 추구하던 직장에서도 지방으로 발령 내버리는 등 브레이크를 걸어주었다. 료타에게는 시련의 연속이었지만, 아름다운 결과를 기대하는 우리들에게는 그가 정금이 되어 나올 수 있는 기회로 보여지는 것은 어쩔 수 없다.

그리고 그 모든 미션을 수행해나갈 즈음, 피아노 연주가 능숙하게 되어간다고 느껴질 때 즈음, 그 연주에 아름다운 감정을 싣게 만들어준다. 그리고 그 연주는 마음을 울린다. 그것은 아빠를 향한 케이타의 해바라기 같은 사랑, 아빠를 언제나 조용히 바라보고 사랑했던 아이의 순수한 햇빛 같은 사랑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