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ome 나는 킹덤빌더다 사랑가_사랑에 대한 미숙한 생각과 혼란의 정리과정을 공유합니다.
사랑가_사랑에 대한 미숙한 생각과 혼란의 정리과정을 공유합니다.

사랑가_사랑에 대한 미숙한 생각과 혼란의 정리과정을 공유합니다.

340
0

나는 킹덤빌더다

 

 

 

 

 강인애

  KBS 6기 수료

 

 


 

“사랑이란 무엇인가?”라는 물음에 대한 대답은 그렇게 쉽지 않습니다. 여러 매체나 관념을 통해 노출되는 수많은 노래의 가사나 글, 이미지 등에서 무한 반복되는 것들만 보아도 사랑은 그 어떤 개념보다도 사람들에게 강한 갈망이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에 대해 다시 생각해 보면 그 갈망에 비해 그 개념과 실체는 참 모호하기만 하였습니다. 그래서 사랑은 인간 역사의 시간만큼이나 끝없이 재해석되어 왔고, 사람들마다 각자 체득한 사랑의 모습이 제각각이라는 것을 다시 확인하게 됩니다. 그 다른 만큼 이해도 달랐기에 사랑은 많은 갈등과 모순으로 이해되기가 더 쉬웠지요.

매일의 평범한 나날들 속에서 각자의 사랑에 대한 생각과 경험이 우리를 바꾸어놓는다는 것은 이미 모두가 알고 있습니다. 유아기에서부터 경험한 사랑의 모습들이 우리를 형성하고, 그렇게 형성된
우리가 본능이 되어 결국 그 개념은 우리가 태어나서 죽을 때까지 의식 속에 가장 크게 잠재하여 갈등하게 하는 이유가 되어버립니다.

사랑에 대해 생각해 보면 이 달란트는 분명 하나님께서 우리를 지으실 때 함께 주신 선물이 분명한데, 왜 우리는 대체로 그것의 무게만 느끼며 살아가는 아이러니를 반복하는지 거듭 생각해 보아도 이상하기만 합니다.

하나님 사랑을 느낄 때 함께 부어주시는 깨달음을 일상에 적용하기까지 저를 가장 힘들게 한 사람들은 제일 가까워야할 가족들이었습니다. 가장 염려하고 사랑하면서도 서로 애쓰고 마음상하고 상처
받으며 많은 에너지를 소모하게 됩니다. 그러다보니 그 에너지를 인생의 다른 영역에서 쓴다면 좀 더 진보된 삶을 살겠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심지어 적당한 거리를 두고 살겠다고 결심한 시간들도
많이 있었습니다. 그럴 때마다 “이 세상에 완벽한 인생이 없듯이 모든 관계속의 사랑과 평화는 너무나 이상적이어서 그런 환상을 원함은 너를 더 효율적이지 못하고 상처투성이로 만드는 것이다. 그
러므로 사람들 사이에서 네 마음의 부족분을 채우려 하지 말고 네 스스로 진정한 독립적인 삶을 이뤄라”라는 생각을 얼마나 반복했는지 모릅니다. 그러나 그것을 완전히 실천하기엔 저는 마음이 무르고 가족과 마음의 단절을 실행할 만큼 독하지도 못했습니다.

오랜 해외생활 후 다시 부모님 집으로 들어간 서른이 넘은 이 딸은 혼자 이십대를 보낸 기간 동안 자신의 삶을 혼자 결정하고 감당했던 만큼이나 완고한 성격을 가족에게도 적용했습니다. 다 알고 이해하지만 너무나 달라져버린 마음이 마치 다른 문화처럼 되어버렸고, 객식구나 다름이 없을 정도의 벽을 치고 침해받지 않으려 애를 썼습니다. 가족 안에 있으면 제 상처받은 어린 아이 마음이 행복하지 않은 부모님을 바라보면서 또 상처받기를 반복하였습니다. 본격적인 노년기에 접어든 어른들에게는 점점 나약해져가는 육체가 정신을 이기고 반복하여 상처를 받는 다 큰 자녀의 마음을 들여다보면서도 그런 다 큰 자녀를 돌본다는 건 생각도 하기 힘든 일이었습니다. 오히려 나이든 부모의 마음과 몸을 돌보지 못하는 자식에 대한 서운함이 더 크셨으리라 생각합니다. 저보다 더 아프셨겠지요.

자녀를 회상할 때 습관처럼 어릴 적 모습을 그리워하시던 어머니께 저는 너무 서운하고 아픈 손가락이었습니다. 눈앞에 있는 변할 수 없는 현실의 딸보다 헤어진 시간 동안 그리워하던 상상 속의 딸을 더 그리워해야 하는 불운한 인생을 몸소 겪으며 어머니의 인간적인 상실감은 더 커졌습니다. 당연히 그 상실감은 병이 되었고 결국 서로 쌓아오던 불만과 분노가 매일 터져 나와 언어적, 물리적 폭력이 되었습니다. 절대로 만날 수 없는 평행선, 그것이 우리가 느끼는 가족의 실체였습니다.

저는 하나님을 의지함이 진심으로 이루어지기 전까지 사랑을 ‘Eternal sorrow’, 즉 ‘영원한 슬픔’이라고 불렀습니다. 가장 절실하게 원했지만 그것으로 마음 가득 채운 기억이 거의 없었고, 그것을 내
의지로 이루려고 할수록 내 손에서 멀고 어렵게만 느껴졌습니다. 그러니 정작 그것을 주신 하나님께 감사드리는 것은 생각할 수도 없는 일이었습니다. 사랑의 주체를 몰랐으니 그 사랑이 덧없고 쓰기만 했던 것은 어쩌면 당연한 것이었습니다.

어려움을 겪는 순간마다 알면서도 부족한 선택을 반복하고, 그것을 바라보는 제 자신은 고통을 느낄 때마다 스스로가 내린 그 부족한 결정의 원인에 대해 자주 물었습니다. “사랑은 선천적인가, 아니면 후천적으로 학습되는 것인가? 나의 성장과정은 내 일상에서 사랑이 발현되는 것과 얼마만큼 관련된 것일까? 사랑의 모습은 다른 걸까, 아니면 동일한 것인가? 사랑은 훈련과 연습을 통해서 나아질 수 있을까? 사랑이 실패하면 어떻게 되는가? 사랑과 결혼은 일치될 수 있는가, 아니면 별개인가? 심지어 사랑은 존재하는가?”같은 질문들이었습니다. 사람들 사이에서 좀 더 노련하고자 했고 사랑받고자 했던 마음의 고민은 현실의 나의 선택과 일상에는 전혀 변화를 주지 못했습니다. 말 그대로 근원적인 고민과 갈망으로 끝나고 말았습니다. 다양한 의문과 그 의문 사이에 점철된 나의 혹은 우리의 어찌할 바 모르는 상처들.

이처럼 하나님과의 교제 이전의 사랑에 대한 생각은, 대상과 방향이 각기 다르게 파생되었기 때문에 하나의 개념으로서 동일하게 의식될 수 없었습니다. 다시 말하면 어떤 큰 개념의 사랑을 저 생각들 속에서는 찾아낼 수 없었다는 것입니다. 저 생각들을 찬찬히 들여다보면 그 속의 주체는 사랑이 아니라 사랑받지 못할까 근심하는 나의 두려움이었습니다.

그 두려움은 모든 것을 잠식해버리고 더 큰 세상을 볼 수 없게 만들었습니다. 영·혼·육이 모두‘나’란 의식 속에 갇히는 것, 하나님을 ‘나’의 경험적인 존재로서만 바라보게 하는 것, 그래서 그분의 본질을 오해하고 거짓을 만들어내는 것, 그것이 두려움이 우리 모두에게 가장 손쉽게 적용되는 모습들이라고 저는 생각했습니다.

하나님과 관계함 속에서 생명과 사랑을 깨닫기까지, 그분과 관계된 삶을 실질적으로 살기까지 예수님을 통한 단절된 관계의 회복의 시간이 있었습니다. 그것으로 커다란 하나의 사랑의 개념의 깨달음의 시간이 왔었고, 그럼으로써 내 안에 그 두려움이 소멸되어가는 과정, 그러니까 치유가 있었습니다.

우리가 교회나 집회에서 말씀을 듣고 찬송을 하고 기도를 하며 하나님의 영광에 접속될 때에, 언어적으로 무엇이다 말할 수 없지만 우리 안에 있던 많은 의문들과 갈등들이 봄눈 녹듯 심플해지며, 마지막에는 하나님의 사랑으로 치유되는 것을 경험하곤 합니다. 기도하고 돌아서면 다시 원래의 나로 돌아와서 이 과정이 계속 반복될지라도 그분께 들어가기만 하면 다시 그리고 또 다시 우리의영혼이 확정되면서 하나님에 대한 믿음은 더욱 커졌습니다.

우리가 그분을 전적으로 신뢰하고 흠모하기 이전에도, 막연하게 주일이 되면 교회로 향하던 그 절실하고 외로운 발길 끝에 언제나 우리를 포기하지 않으시고 솜털까지 살피시는 하나님의 부르심
(calling)이 있으셨을 것입니다.

그 알 수 없던 오묘한 희망과 그리움들의 실체이신 그분을 우리가 잘 몰랐을 때에도, 그분은 언제나 우리를 예비하셨고 이끄셨습니다. 포기하지 않으시는 사랑인 그분은 우리의 근원에 대한 고민과
회한 가운데서도 우리의 결심과 실천의 때를 누구보다 간절히 기다리셨을 것이라 생각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영광에 접속만 되었고 깨달음이 왔음에도 현실을 나의 의지로 조금씩 개선해 나가는 실천을 두려워하며 그분의 사랑과 영광의 기억을 단순한 위로와 접속으로만 한정하진 않았는지 제
가 걸어온 과정을 돌이켜 생각해 봅니다.

“사랑을 할 수 있기 위한 첫 번째 조건은 사랑을 받는 것이다.”

그런 복잡한 얽힘과 불만족의 시간 가운데서 관념적이었던 하나님을 ‘피보다 진한 아버지 하나님’ 으로 가슴으로 느끼는 어떤 순간을 경험하고 그것이 항상 마음으로 믿기어지면서, 그 주시는 사랑
을 그대로 받는 연습의 시간들이 자연스럽게 찾아왔습니다. 현실이 무거워서 멍하게 자리 잡고 앉아 “어디 위로해 보십시오.”라는 태도에서, 어린짐승이 어미의 젖을 빨듯이 그분의 말씀의 양분을
흡수하면서 사랑과 충만함을 그대로 느끼는 시기였습니다. 상황이 어떻든 지금은 아버지가 주시는 위안과 사랑이 좋고 그리워서 그냥 마냥 있었습니다. 그 사랑을 받으며 제 심령이 그 부드러움의 근
원이 찾아드는 것을 느끼며 아버지를 찾았습니다.

사람들 사이에서의 경험을 근거로 하나님을 보아왔기 때문에 들어맞는 것이 별로 없어 그 주시는 사랑을 그냥 그대로 받는 것도 자연스럽게 되지 못했던 것이 지금 생각해 보니 슬프기까지 합니다. 그렇지만 다행히도 그분께 접속될 수 있음이 기뻤습니다.

그 이후 이토록 우리를 사랑하시는 그분 앞에서 마치 부모와의 정서적 관계가 불안정하여 혼란을 느끼고 내재된 불안이 울음으로 터져버려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아이와 같은 모습을 노출하는
일이 잦아졌습니다. 그리고는 버틸 힘도 없이 무너져버렸습니다. 그것이 나를 포기하는 처음이었던 것 같습니다. 그 후 나의 힘으로는 어떤 것도 완전히 할 수 없고 나의 잘못으로 그렇게 된 것이 아니라는 생각으로 스스로를 용서하는 순간이 왔습니다.

사랑 안에 두려움이 없고 온전한 사랑이 두려움을 내쫓나니 두려움에는 형벌이 있음이라 두려워하는 자는 사랑 안에서 온전히 이루지 못하였느니라 우리가 사랑함은 그가 먼저 우리를 사랑하셨음이라 요일4:18-19

그저 그분을 믿음으로 그 안에 뛰어들어 그 사랑을 경험하기만 하거나 그 사랑을 알기만 하면 시작될 많은 이야기들이 있을 텐데, 그 뛰어들 용기를 행동으로 실천하기가 왜 그렇게도 힘든 것인지. 나의 영혼을 만족하게 하시는 하나님과의 화목함을 알고, 그 기쁨으로 치유된 자가 영역을 넓혀가며 되돌려 줄 수 있는 많은 사랑을 상상할 수 있으면서도 도약하지 못하는 것이 미련하지만 아직 현실 속의 제 모습입니다. 그러나 이젠 주 안에서 자유하고 행복합니다.

미숙한 시도를 계속 이어오고, 조금 쉬었다 다시 하기를 반복하면서 서서히 가족들은 믿음의 수준과 상관없이 용서하는 것을 배워갔습니다. 미숙해도 상대방이 보인 성의와 진심만큼 관계의 진보가 일어났습니다. 이유 없이 보드랍게 건네는 마음을 누군가는 하나님의 은혜라고 했고, 제가 결심한 마음보다 더 크고 넓은 넉넉한 마음들로 받아들이는 일이 잦아졌습니다. 어느 날 아무런 생각 없이
가족을 바라보니 서로간의 잦은 감사를 표할 수 있게 됐고, 일상이 달라진 것이 없음에도 만족감을 나누는 일들도 일어났습니다. 어떤 큰 물질적인 기적보다 간절하게 원하던 ‘진정 소통할 수 있음’의 순간이 스민 것을 마음으로 보니, 앞으로의 은혜와 사랑은 이루어진 것이나 다름이 없었습니다.

강하신 하나님께서 저를 먼저 사랑하셨을 뿐만 아니라 절대 포기하지 않으셨고, 나의 근본적인 아픔을 치유하시어 하나님의 영광을 보게 하셨습니다. 심지어 하나님께서 우리 안에 거하심으로 우리의 삶과 사랑이 실패하지 않는 새로운 차원으로 들어가게 하셨다는 그 진리를 온전히 믿기까지, 허망한 생각들로 사랑을 두려워했던 제 자신을 회개합니다.

지나고 보니 저도 모르게 고민들이 소멸되었고 어지러웠던 내 안에 예수님의 생명과 평화가 있습니다. 나의 노력으로 극복된 것이 아니라 주신 사랑을 통한 회복이라는 점에서 이것은 완전히 자연에
서 온 것이고, 그 자연은 나의 천부되신 하나님이시기 때문에 이것은 온전히 아름답습니다.

우리는 삶에서 문제를 극복하는 많은 방법을 배웁니다. 세상에서 원하는 것을 얻기 위해서는 무언가를 극복해야만 얻을 수 있다는 것이 진리로 여겨지고, 우리는 그런 환경에서 자신을 무자비하게
판단하고 각성해야 한다는 압박감 속에 매일을 지냅니다. 그런 습관으로 인해서 자유함이 없었고 스스로에 대한 용서가 없었고 사랑이 없었습니다. 그러나 그분께서 저를 먼저 사랑하심으로 제 안의
두려움을 내쫓으시고 제 안에 사랑을 이루셨습니다.

제가 가지고 있던 사랑에 대한 많은 의문들은 소멸되었지만 사랑에 대한 분투는 이제 시작인 것 같습니다. 나에게 초점이 맞춰졌던 기도가 나에게서 자유로워지며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라는 성경 구절의 시작이 무엇인지 제 마음이 느끼고 기뻐합니다.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시는 주님에 대한 믿음이 떨림과 기대로 벅차오릅니다. 사랑이 하나님에게로부터 하나 되어 나와서 많은 회복과 희망이 되는 모습들이 “협력해서 선을 이루어요.”란 찬송의 가사를 다시 떠올리게 합니다. 느끼시나요, 제 미숙한 어린이의 고백 속에 있는 우리를 통해 이루실 하나님나라에 대한 기대감과 믿는 자들의 연합, 사랑, 나눔 그런 것들에 대한 또 다른 희망을.

하나님의 사랑이 더 귀한 것은, 느끼기만 하는 사랑이 아니라 알고 깨닫는 사랑이기 때문인 것 같습니다. 하나님은 사랑이시라는 말은 그분을 떠나서는 이러한 참 사랑이 없다는 말로도 해석 가능
하지 않을까 생각해 봅니다.

세상에서의 나는 사랑이란 단어는 어렵거나 진부한 개념이라고 생각했습니다만, 그분을 머금은 매일 내 입술의 고백에 그 두렵기만 했던 ‘사랑’이라는 단어가 몇 번이고 거듭되어 나오는 것을 보면
앞으로 그분과 함께할 날들은 온통 ‘사랑가’일 것 이 분명합니다. 오직 그분의 사랑만이 세상을 바꿀 수 있다고 믿습니다. 하나님의 자녀로서의 나의 삶은 하나님의 사랑을 나누며 여호와 하나님은
사랑의 하나님이심을 증거하는 것이라 생각해 봅니다.

많은 성공과 감동의 증거들 속에서 이런 사랑에 대한 미숙함이 묻어나는 제 혼란의 과정을 결론없이 이야기함은 그냥 부족한 고백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지금도 매순간 자신의 한계 속에서 하나님을 믿기에 분투하시며 이 글을 읽고 계시는, 같은 고민의 과정을 지나는 혹은 이미 지난 분들과 잠시나마 공감할 수 있다면 더 없이 큰 위안과 기쁨이 될 것 같습니다.

그분을 ‘아버지’라 부르고, 우리 서로가 ‘형제’, ‘자매’라 칭하며 사랑으로서 하나님의 뜻을 이뤄가는킹덤빌더들을 축복합니다. 우리 삶이 그분의 영광을 바라고 즐거워하므로 하나님은 우리를 그 영광
앞에 흠이 없이 기쁨으로 서게 하실 것을 믿습니다.

한국 개화기에 불렸다고 전해지는 하나님의 사랑을 주제로 한 ‘사랑가’의 가사로 글을 마무리 하며 순박한 사랑의 마음을 여러분과 나누고 싶습니다.

어화우리 벗님네야 사랑노래 불러보세
사랑없이 살수없고 사랑없이 지낼소냐
귀한것이 사랑일세 사랑이란 무엇이냐
이세상의 모든사람 내몸같이 사랑하고
내몸같이 보살피고 자기역량 다하여서
이사랑을 생각하니 천주님의 사랑으로
영원무궁 영광일세 영원무궁 영광일세

아버지! 우리에게 주신 이 아버지를 아는 삶 자체가 영원무궁 영광입니다. 아버지! 홀로 모든 존귀와 영광을 받으시옵소서. 영원히 사랑합니다. 아멘!

 

댓글을 남겨주세요

이메일은 공개되지 않습니다. 필수 입력창은 * 로 표시되어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