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곱 신부의 편지

야곱 신부의 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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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INGDOM LIFE &

힐링시네마
야곱 신부의 편지

 

작가 이애경

 

핀란드에서 만들어진 영화‘야곱 신부의 편지’. 러닝 타임 74분. 영화는 짧다. 주연배우도 단 세 명으로 단촐하다. 새벽처럼 쓸쓸한 피아노 사운드가 영화 속에서 흘러나와 영화 내내 적막하기 이를 데 없다. 그래서인지 이 세 명의 주연배우들의 눈빛과 호흡과 감정이 더욱 적나라하고 디테일하게 전달된다. 적막함 속에 세 명에게 집중하다보면 자연스럽게 자신을 세 캐릭터에 투영시키게 된다. 영화를 보다 눈물을 흘리게 되는 건 스토리가 주는 감동에서 비롯되기도 하지만, 그들에게서 우리들의 옛 모습, 혹은 현재의 내 모습이 드러나기 때문이기도 하다.

 


 

핀란드의 한 교도소. 시니컬한 표정의 무기징역수 레일라에게 간수가 편지를 읽어준다. 야곱이라는 신부가 개인 조수로쓸 사람을 구한다는 편지다. 그리고 간수는 그녀에게 사면되었으니 그곳으로 가서 조용하고 편하게 살라고 권유한다. 사면되었다는 이야기에도 표정 하나 변하지 않는 레일라. 12년간 감옥 생활을 한 그녀에게는 돌아갈 곳이 없기 때문이다. 그녀에게 사면은 자유와 해방이 아닌, 안식처로 삼아온 곳에서의 퇴출이자 막막해지는 삶을 의미했다.
자기 의지와는 상관없이 사면된 레일라는 어쩔 수 없이 야곱신부가 있는 시골의 한 동네로 찾아가 앞을 보지 못하는 야곱신부와 만난다. 레일라는 신부가 악수를 청하는 손을 무시하고마음을 닫은 채 그곳에 오래 머물러 있지는 않을 것이라고 생각하고 짐을 푼다. 그녀에게 주어진 일은 눈이 보이지 않는 야곱 신부에게 오는 편지들을 읽어주는 일. 그리고 야곱 신부가하는 말들을 받아 답장을 하는 일이다.
자전거를 타고와“야곱 신부님, 편지요!”라고 부르는 우체부의 외침으로 시작하는 그들의 하루. 손자의 취직과 인생을 걱정하는 할머니부터 대학 교수가 괴롭힌다는 호소, 가정의 크고 작은 문제들을 기도해달라고 적은 편지까지, 야곱 신부에게는 끊임없이 편지가 배달된다. 신부는 사람들의 인생의 짐을 적어놓은 편지들에 답장을 하고 그들을 위해 기도하는 것을 자신의사명으로 여기고 살아간다.
그러나 레일라에게는 이런 일들이 전혀 의미 있게 다가오지않는다. 그녀는 신부에게 온 편지들을 우물에 던져버리기도 하고 편지에 주소는 적혀있지 않다고 건성으로 읽고 넘겨버리기도 한다. 하지만 신부는 내용만 들어도 누구에게서 온 편지인지 알아챈다. 그리고 모든 편지의 내용을 들을 때마다 깊이 묵상하고 마음을 담아 기도한다.
어느 날 신부와 이야기를 나누던 레일라는 신부가 자신의 사면을 요청했다는 것을 알고 마음이 조금 누그러든다. 자신이어떤 사람인지, 무슨 죄목으로 감옥에 들어갔는지에 상관없이그저 주어진 은혜였기에 레일라의 마음이 신부에게 조금 열린 것이다. 신부는 이렇게 이야기한다. “저는 하나님이 은총을 베푸시게 하는 도구 일 뿐입니다.”라고.
그러다 돈을 훔치기 위해 신부의 집에숨어 들어온 우체부를 발견한 레일라가그를 끌고 나가서 혼을 낸 뒤부터 신부에게 편지가 배달되지 않는다. 우체부가신부와 레일라를 피해 다니는 것이다.어느 날부터 더 이상 편지가 오지 않자야곱 신부는 실의에 빠지기 시작한다.살아갈 힘을 잃고, 사람들이 자기를 더이상 필요로 하지 않게 됐다며 슬퍼하고힘을 잃는다. 그에게 매일 전달되던 희망이 사라져버린 것이다.
어느 날 자기를 피해 도망가는 우체부를 잡아 세운 레일라가 가방을 뒤지지만신부에게 오는 편지를 찾지 못한다. 신부에게 오는 편지들이 끊긴 것이었다.편지가 오지 않음으로 인해 신부가 실의에 빠지는 것을 두고 볼 수 없던 레일라는 우체부에게 거짓말로라도“편지가 왔다”고 소리를 지르라고 요구한다. 결국레일라는 배달되지도 않은 편지를 신부에게 읽어주며 희망을 주려는 시도를 한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마음속에 써놓았던 자신의 편지를 신부에게 말하기 시작한다.

 

배달된 편지들을 바라보는 기쁨과 고통의시각

야곱 신부는 눈이 보이지 않는다. 괘종시계 시침과 분침을 더듬어 시간을 알고, 빵을 더듬어 자르는 것이 능숙한 것으로 봐서 신부는 시력을 잃은 지가 오래된 듯해 보인다. 야곱 신부의 집을 처음 보여주는 장면에서 괘종시계의 유리에 비치는 신부의 모습이나, 유리 창문에 비치는 집의 모습이 보인다. 유리에비친 모습들을 강조한 신부의 집을 보고있자니 레일라에게 간수가 사면을 이야기할 때 그의 안경에 비친 레일라의 모습이 클로즈업된 장면이 오버랩 된다.어쩌면 이 두 사람이 보는 세상은 이렇게 실체가 아닌, 비쳐지거나 혹은 반사된 세상을 보고 있을 수도 있고, 혹은깨질 듯 위태한 무언가 불완전한 세상에살고 있는 것을 의미하는지도 모른다는생각이 든다.
고독한 외로움 속에서 오랫동안 견뎌온 신부에게 유일한 빛은 사람들에게서오는 편지였다. 사람들이 보내온 편지를읽고 그들을 위해 기도를 해줌으로써 자신이 무언가를 할 수 있다는 존재감을확인하며 살아왔다. 하지만 레일라에게편지는 아픈 상처를 계속해서 건드리는도구일 뿐이었다. 유일한 핏줄인 언니와연결될 수 있는 것은 편지였지만 그녀가감옥에 있는 동안 계속해서 그녀를 괴롭힌 것도 언니가 보내는 편지였다. 언니를 괴롭히는 남편을 살해한 레일라는 언니가 사랑하는 사람을 죽였다는 사실 때문에 언니에게 용서를 구할 수 없었고,그것은 언니가 보내온 편지를 돌려보내는 것으로 표출되었다. 그렇게 그녀는편지를 거부하는 것으로 스스로를 고립시켰다. 한 집안에 살게 된 야곱 신부와레일라와‘편지’라는 매개체는 기쁨인동시에 고통을 고스란히 드러내는 도구였다.

 

삶의 이유, 행함(Doing)인가 존재(Being)인가

야곱 신부에게 편지란 눈이 보이지 않아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어두운 삶의 적막함 속을 뚫고 들어오는 한 줄기 빛과도 같았고, 사람들에게 자신의 존재를드러낼 수 있는 수단이었다. 또한 하나님에게도 자신의 존재를 입증하고 인정받을 수 있는 좋은 수단이었다. 편지를읽고, 그들을 위해 기도해주고, 또 답장을 해주는 것으로 자신의 존재가치는 확고했다. 아침부터 반복되는, 사람들을 위해 기도하는 그의 일상은 은혜롭고 아름다운 것이지만 영화가 계속될수록 보게되는 모습은 집착하듯 편지를 기다리고그 일을 하는 것으로 자신의 존재의 의미를 부여하는 나이든 노인의 모습이다.그것은 존재함(being)으로 가치가 있는것이 아니라 행하는 것(doing)으로 가치를 인정받으려고 하는 안타까운 성자의소리 없는 아우성이었다.
결국 오지 않던 편지를 기다리던 어느날, 곧 만찬이 있을 것이라고 레일라에게 식탁 차리는 것을 도와달라고 하고는신부는 근처 성당으로 가서 결혼하기 위해 올 커플을 기다린다. 아무도 오지 않는텅빈성당안에서신부는혼자주례를 서며 고린도전서 13장을 암송해나간다. 아무도 올 사람이 없다는 것을 깨달은 신부에게서 마음속에 담아두었던 두려움의 고백이 나온다. “앞도 못보고 늙은 신부를 누가 필요로 하겠냐”는말이다. 신부는 자신이 아무것도 하지 못하는 사람이 되어버렸다는 것을 인식하자자기 존재의 가치를 잃어버린 것이다.우리는 타이틀을 달고 살아간다. 누구의아들, 딸, 회사의 부장, 영업 담당자, 교회 봉사팀, 찬양 사역자 등 직함과 직위안에서 사는 삶에 익숙하다. 내가 하는일로 나의 존재감을 입증하는 것이다.그래서 이런 타이틀이 없다면 우리의 삶은 무의미하다고 여기기 쉽다. 사역을내려놓고, 직장을 그만두고, 할 일이 사라지면 사람들은 절망에 빠진다. 나의존재가 쓸모없는 존재가 되어버렸다고믿기 때문이다. 하지만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은 존재하는 나이지 행하는 내가아니다. 그럼에도 우리들은 하나님 앞에서 기를 쓰고 무언가를 해내고, 입증하려고 한다. 결국, 편지를 읽으며 기도하는 일이하나님을 위해 하는 것이라고 생각했는데 자기 자신을 지탱하려던 하나님의 방법이었음을 깨달은 신부가 고백을 한다.그 순간 특히 사역에 치이고 하나님의 일을 하는데 치여 정작 하나님을 만나지못하는 신앙인들에게 날카로운 질문이던져진다. 하나님을 위해 일한다고 했던것들이 결국 나 자신을 위한, 나를 입증시키기 위한 일들은 아니었는지 말이다.

 

중재자로서의 삶

신부는 레일라에게“사람들을 굽어보는 어떤 존재가 있고, 이 세상의 아들딸 중 어떤 존재도 쓸모가 없거나 잊혀지지 않았음을 사람들이 알고 느끼는 것은 중요하다.”고 말한다. 그래서 편지 하나하나가 가치가 있는 것이라고. 비록고통과 어려움을 해결해달라고 쓴 편지들이지만 그들이 살아있음을 증명하는증거이기도 하다.
중재자는 하나님과 사람들의 사이에서중재하는 역할을 한다. 하나님의 뜻을사람들에게 알리고 선포하고, 또 사람들을 대신해서 기도하고 회개하며 그들이하나님께 가까이 나올 수 있도록 이끌어주는 역할을 하는 사람들이다.
사람들의 기도제목을 읽고 그들을 대신해 기도해주는 신부의 일은 제사장으로서의 우리들이 어떻게 살아가야하는지를 보여주는 한 예다. 하지만 사람들은 영화에서처럼 우리에게 손으로 편지를 쓰지는 않는다. 대신 다양한 방법으로 기도제목을 알려온다. 트위터로, 문자로, SNS로, 전화로 힘든 점을 내어놓고고민들을 풀어놓는다. 도움을 요청하는소리는‘기도해주세요’의 형태로 오지않을 때도 많다. 자기 트위터에 토하듯뱉어놓은 말, 블로그에 기분이 별로라고써놓은 글들. 짧게 보낸 문자 한통. 그러나 우리는 대부분 바쁘다는 이유로 흘려듣거나 무시해버리는 경우들이 많다. 테크놀로지 시대의 중재자로서의 삶을 살아가는 데는 조금 더 순발력이 필요하다. 사람들은 기도제목을 말하지는 않더라도, 아프다고 신음을 한다. 그 신음소리를 잘 알아듣는 안테나가 우리에게는필요하다. 그리고 그들의 아픔을 들고하나님 앞에 나아가주는 중재자가 되는 것이다.

 

죄를 짓더라도 아버지 앞에 가져와라

우체부가 돈을 훔치기 위해 야곱 신부에게 왔던 것이 드러나자 그는 신부에게오던 발걸음을 돌린다. 숨겨놓았던 죄가드러나자 숨어버린 것이다. 그것이‘죄’ 의 단계일 때까지는 여전히 신부에게 편지를 가져다주었지만 그것이 밖으로 드러나 버리고, ‘죄책감’의 단계에 접어들자 신부를 멀리하기 시작했다. 죄를 지은 것을 인식하게 된 아담과 하와가 하나님을 피해 숨은 것과 동일한 패턴으로그는 숨어버린다.
신부가 소명으로 여기고 삶의 희망으로 여겼던 편지 배달이 끊겨버린 것은우체부의 죄책감 때문이었다. 인간이 죄를 짓고, 그곳에 죄책감이 들어오면서하나님으로부터 멀어지고, 하나님께 가까이 갈 수 없다는 생각에 사로잡혀 피하게 되는 전형적인 패턴을 분명하게 볼수 있는 장면이다. 분명히 나를 기다리는 누군가가 있다는 것을 뻔히 알면서도그 길을 돌아가거나 피해가는 것이다.
신부의 기다림은 마치 집나간 둘째 아들을 기다리는 아버지의 심정처럼 조용히 끓어오른다. 보다 못한 레일라가“평소처럼 와서‘편지가 왔다’고 신부에게소리를 치라”고 우체부에게 이야기하는순간, 행동에 대해 자기 자신이 심판하고 죄책감을 가질 것이 아니라 먼저 그분에게 다가오라는, 그래서 그 분 앞에서 해결하라는 메시지가 느껴진다. 우리가 죄를 짓더라도 여전히 우리를 기다리시는 하나님이시기 때문이다. 지은 죄때문에, 죄책감 때문에 심판자이신 하나님을 두려워하고 멀리하는 것이 아니라그것을 하나님 앞에 가져와 풀기 원하시는 아버지의 마음이 겹쳐 보이는 장면이었다.

 

하나님의 완벽한 타이밍

신부를 성당에 버려두고 집으로 돌아온 레일라는 가방을 챙긴다. 집에서 나가야겠다고 결심한 레일라는 택시를 부르고, 택시에 오르지만 목적지를 묻는기사의 질문에 한참을 멍하니 침묵하며앉아 있는다. 그리고 짐을 들고 택시에서 다시 내리는 레일라. 자기에게 갈 곳이 없다는 비참한 상황을 인식한 그녀는자살을 하기로 결심하고 목을 맨다.
성당 바닥에 누워 죽음을 기다리던 신부의 얼굴에도 삶의 생기는 존재하지 않는다. 고요함과 고뇌가 가득찬텅빈성당 안. 죽음을 기다리고 있던 신부의얼굴에 빗방울이 떨어지자 신부는 겸연쩍은 듯 일어나 집으로 향한다. 신부가문을 여는 순간, 목을 맨 채 버둥거리고있던 그녀가 인기척을 느끼고 다시 탁자위로 발을 디딘다. 삶의 이유를 찾지 못한 두 명의 삶이 절망에서 빠져나오는순간이었다. 하나님의 손이 아니고서는들어맞을 수 없는 정확한 타이밍이었다.

 

모든 것을 포기할 때 이루신 하나님

레일라의 협박에 못 이겨 거짓말로 편지가 왔다고 소리지르는 우체부의 목소리를 듣고, 신부는 내복 바람에 맨발로나온다. 언제나 정갈한 신부의 복장으로편지를 읽고 기도를 하는 의식을 했던것과는 달리 신부는 벌거벗은 듯한 상태로 레일라 앞에 앉는다.
레일라는 우체부가 건네준 잡지를 들고 편지가 온 것처럼 지어서 기도제목을읽어준다. 하나의 편지 사연이 끝나고집으로 다시 들어가려던 신부에게 레일라는 편지가 하나 더 있다고 하면서 하나님과 용서에 대한 질문을 시작한다.그리고 형부를 살해한 여자의 이야기를 풀어놓는다.
사연을 다 들은 신부는 발신인이 레일라냐고 묻고, 그녀임을 안 신부는 레일라에게 보여줄 것이 있다며 단걸음으로달려간다. 그가 들고 온 것은 레일라의언니가 신부에게 기도제목을 담아 보내온 편지묶음이었다. 자기 언니가 끊임없이 편지를 보냈다는 것을 안 그녀의 마음이 무너지기 시작하고 레일라는 언니의 편지를 읽으며 눈물을 흘린다. 치유와 용서가 일어나는 순간이었다. 고귀한성직자의 옷을 벗고 모든 것을 내려놓은상태에서 레일라가, 그녀의 언니가, 또야곱 신부가 기다려왔던 치유와 구원이일어나게 된 것이다. 내가 무언가를 하겠다는 모든 욕망과 의지를 내려놓았을때 하나님이 그를 사용하신다는 최고의경험을 하게 해주신 것이다.
영화에는 세 가지 인간의 캐릭터가 나온다. 신부와 살인자, 그리고 보통의 평범한 사람. 하나님 앞에 가장 가까이 있는 듯한 신부도 고스란히 존재만으로 인정받는다는 것의 감사함을 깨닫지 못했다. 레일라는 자신이 용서받지 못할 것이라고 단정한 채 스스로를 용서하지 않고 사람들로부터 분리시켰다. 마치 유리에 비친 반영의 눈으로 세상을 보듯이,혹은 깨질 듯 위태로운 신부와 레일라의삶에는 있는 그대로를 사랑하시는 하나님이 필요했다.
죄책감에 빠져 도망갔던 우체부처럼죄를 짓고 죄책감에 빠져 하나님으로부터 도망가는 사람도 있다. 대부분 우리가볼수있는평범한사람의모습이다.야곱 신부의 편지는 어쩌면 하나님이 우리들에게 보내시는 편지일지도 모른다. Doing이 아니라 Being으로 우리를 사랑하신다고, 애쓰는 것을 다 내려놓은그 모습 그대로를 가장 귀하게 여기신다고, 스스로 쌓은 벽에서 빠져나오라고,도망가지 말고 모든 것을 아버지 앞으로들고 나오라는 하나님의 초청장 같은, 그런 편지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