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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하는 HTM 가족 여러분 (2014년 8월)

사랑하는 HTM 가족 여러분 (2014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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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표인사 – 사랑하는 HTM 가족 여러분

2015_대표인사

손기철 대표


 

무더운 여름! 마당에 살피상을 펴고 함께 앉아 밤하늘의 별들을 바라보며 도란도란 복음을 나누고 싶습니다.
가끔씩 불어오는 시원한 바람에 가슴을 닦아내고 달콤한 수박으로 목도 축이면서 말입니다.

 

 

 

지난 7월호에서는 작금의 기독교의 현실과 사회상에 대해서 말씀드린 적이 있습니다.
그것이 저에게는 제 부족함을 보며 다시 한 번 새로운 마음을 가지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지금도 제 마음 속에는 이러한 문제의 본질에 대해서 더 알리고 함께 새롭게 되고 싶은 마음이 간절합니다.
왜냐하면 지금 한국의 기독교는 핍박이 아니라 비난을 받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 이유가 무엇일까요?

 

16세기 종교개혁은 로마 가톨릭 교회의 타락과 부패에 저항하는 개혁운동으로 일어나게 되었습니다.
이러한 개혁운동의 신학적 원리는, 인간의 완전한 타락에 대한 고백과 오직 하나님의 은혜에 대한 신뢰였습니다.
그것으로 말미암아 오직 말씀, 오직 믿음, 이신칭의(以信稱義)의 교리가 나오게 된 것입니다.
이 과정에서 개혁운동가들은 인간의 도덕적 능력과 행위에 대한 로마 교회의 모든 교리를 거부하였습니다.
가톨릭이 구원의 조건으로 선행(善行)을 주장한 것을 비판하면서,
선행을 하지 않을지라도 믿는 자를 의롭다 하시는 하나님을 믿는 자에게, 하나님은 구원을 주신다는 점을 강조하게 되었습니다.

 

일을 아니할지라도 경건하지 아니한 자를 의롭다 하시는 이를 믿는 자에게는 그의 믿음을 의로 여기시나니 롬4:5

 

반면에 행동 없는 믿음은 죽은 믿음이라고 강조한 야고보서는 개혁자 루터에게는 지푸라기 서신서처럼 보였습니다.
결론적으로 종교개혁의 신학 속에는 인간의 구원에 있어 선행은 결코 본질적인 것이 아니었으며,
구원받은 후에 우리의 육신을 주의 말씀에 복종시키는 수단 정도로만 보았습니다.
또한 구원 후의 거룩한 삶을 위한 율법적 행위와 훈련의 중요성을 강조하였습니다.

 

하나님께서 죄를 죄 되게 하시기 위해서 율법을 주셨고, 어떤 선한 행위로라도 그 율법을 온전히 지킬 수 없으며,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믿음을 통해서만 구원을 받게 된다는 구원 교리에 있어, 선행(인간의 행위와 윤리)이 끼어들거나 논의될 틈은 없습니다.
결국 로마 가톨릭과의 싸움 속에서 형성된 개혁주의 복음은, 그 당시 가톨릭의 선행과 거룩한 삶을 반대적으로 거부하거나 부정하게 되었습니다.

 

종교개혁자들의 신학에 뿌리를 둔 한국의 개혁복음주의적 개신교는,
구원 복음과 죽고 난 뒤에 가는 천국 복음에 대해서는 확신을 주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현실의 삶에 있어서 선행(행위와 윤리)에 대한 올바른 답을 주지 못했습니다.
실제로 교회 안팎의 실제적인 삶과 윤리에 있어 한국 교회가 취약한 것은, 종교개혁으로부터 형성된 교리적이고
구조적인 문제에 그 뿌리를 두고 있습니다. 결국 선행의 이름으로 주어졌던 면죄부가 지금은 믿음의 이름으로 주어지고 있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 한국 교회가 윤리에 취약한 까닭은 종교개혁 신학의 특징 때문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구원 복음에 있어 가장 중요한 것은 회개와 죄사함의 교리였습니다. 이것을 강조하다 보니까 죄를 짓지 않고 거룩한 삶을 사는 교리가 취약하게 된 것입니다.

 

그러나 이것 이외에도 흔히 간과되는, 그러나 더욱 본질적인 문제가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하나님나라의 복음입니다.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것은 이 땅에 도래한 하나님나라의 복음입니다.
그런데 기독교는 하나님나라의 삶에 대한 것은 잃어버리고, 이 땅에서 믿음으로 죄사함을 받고 구원을 얻는 구원 복음으로
온전한 하나님나라의 복음을 축소시켜 버렸습니다.

 

그렇게 될 수밖에 없는 이유는 바로 삼위일체 하나님은 믿지만, 성령님의 현재적 임재와 역사에 대한 부정적인 태도 때문입니다.
성령님의 임재와 역사 없이는 하나님나라의 복음이 성립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성경이 완성됨에 따라 하나님을 알기 위해서 주어진 성경이, 하나님 없이도 신앙생활 할 수 있는 도구로 변질되기 시작했습니다.
성령님을 통해서 성경의 말씀을 조명받기보다는, 인간의 이성으로 성경의 말씀을 공부함으로서 하나님을 이해하려고 노력한 것입니다.
그 결과로 성령님을 부인하는 신학들도 생겨나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성령님을 통한 현재적 영적 통치가 없는 하나님나라는 있을 수 없습니다.

 

우리 인간이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이 땅에서 죄사함을 받고 구원을 얻은 후에 열심히 신앙생활 하다가 천국 가는 것이 복음이 아니라,
죄로 말미암아 죽을 수밖에 없는 인간이 예수 그리스도의 죽으심과 부활에 동참함으로,
이 땅이 아니라 이 땅에 도래한 하나님나라에서 더 이상 자신의 삶을 사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삶을 사는 것이 복음입니다.

 

그리스도인에게 있어서는 이 땅에서 행하는 선행과 윤리가 결코 삶의 기준이 될 수는 없습니다.
다른 말로 로마 가톨릭이 주장하는 선행이나 윤리의 의미도 아니고,
개혁운동가들이 주장하는 “오직 믿음”만으로도 전부가될 수는 없다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의 삶의 목적은 단순히 구원받는 것이 아니라,
구원을 이루어가서 완성시키는 것입니다. 구원을 이루어가는 것은 하나님의 뜻(말씀)을 이루는 것입니다.
그것은 하나님나라가 이 땅에 임했기 때문에 뜻이 하늘에서 이미 이루어진 것을 이 땅에 이루는 것이고,
하나님 아버지의 아름다운 덕을 이 땅에 선전하는 것입니다.

 

다른 말로, 이 땅의 기준에 의해서 윤리를 지키고 선행을 행하느냐 행하지 않느냐가 아니라,
이 땅에 도래한 하나님의 통치에 의해서 이루어지는 말씀의 실체를 나타내고, 그분의 영광을 선전하는 것이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함으로써 불신자들은 우리를 두려워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 안에 계신 하나님을 두려워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신칭의는 구원을 얻기 위해서 하나님나라로 들어가기 위해서 필요한 것입니다.
이 땅에 도래한 하나님나라에서의 삶은, 구원받은 자가 성경의 말씀을 지키는 율법적인 행위나 윤리를 지키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나라의 삶은 나의 삶이 아니라, 내 안에 계신 그리스도가 나타나는 삶인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의 삶의 주체는 결코 내가 될 수는 없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나는 이미 십자가에 못 박혀 죽었기 때문입니다.
내 안에 계신 그리스도께서 내 육신을 통하여 나타나는 삶이 그리스도인의 삶인 것입니다.
그분의 성품이 드러나는 것이 이 땅의 관점에서의 윤리이고, 그분께서 그분의 일을 행하시는 것이 바로 이 땅의 관점에서의 선한 행위인 것입니다.

 

오늘날 기독교는 바로 이 삶을 보여 주지 못하기 때문에, 핍박이 아니라 선행과 윤리의 취약성으로 인해 비난을 받고 있는 것입니다.
이제 우리는 다시 새로운 피조물로서, 그의 나라와 의를 구해야 하며, 주의 말씀의 실체인 성품과 능력을 이 땅에 나타내야 합니다.
그러한 삶을 사는 자를 “킹덤빌더”라고 합니다. “헤븐리터치 운동”(Heavenly Touch Movement)이 번져 나가길 간절히 소망합니다.

 

저희는 이번 7-8월에 미국, 뉴질랜드, 호주 집회를 다녀옵니다. 사랑하는 파트너 여러분, 중보기도 부탁드립니다. 샬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