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II장. 킹덤빌더의 실제적인 삶
III장. 킹덤빌더의 실제적인 삶
5. 킹덤빌더의 삶의 요소 – 일(직업)
일(작업)
1. 일
1) 일의 본질적 의미와 변질
일의 성경적 의미
타락후 일의 의미
2) 그리스도인의 이원론적 사고
3) 일과 의식주
4) 일과 문화
5) 일과 능력
6) 일과 소명
7) 일과 교회
8) 일과 안식
9) 우리는 어떻게 일해야 하는가?
1) 일의 본질적 의미, 그리고 변질된 의미
(1) 일의 성경적 의미
삼위일체 하나님께서는 태초에 사랑과 상호의존과 창조적 권능을 일이라는 수단을 통해서 이 땅에 나타내셨다. 하나님께서는 그가 지으신 이 땅에 당신의 통치를 나타내기 위해서 자녀를 그분의 형상과 모양대로 지으시고 생명을 불어 넣으시고, 우리로 하여금 일을통하여 그분의 성품과 권능을 나타내기를 원하셨다.
하나님이 가라사대 우리의 형상을 따라 우리의 모양대로 우리가 사람을 만들고 그로 바다의 고기와 공중의 새와 육축과 온 땅과 땅에 기는 모든 것을 다스리게 하자 하시고 하나님이 자기 형상 곧 하나님의 형상대로 사람을 창조하시되 남자와 여자를 창조하시고 하나님이 그들에게 복을 주시며 그들에게 이르시되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 땅을 정복하라, 바다의 고기와 공중의 새와 땅에 움직이는 모든 생물을 다스리라 하시니라 창1:26-28
일은 하나님의 소유인 이 피조세계에 대한 사랑과 그분의 창조적 권능을 나타내는 수단, 즉 통로이며, 일을 통해서 이 땅을 다스리도록 하셨다. 일은 타락한 후에 인간에게 주어진 저주의 결과물이 아니라, 창조 후에 하나님의 정원에 존재했던 가장 큰 축복이었다.
여호와 하나님이 그 사람을 이끌어 에덴동산에 두어 그것을 경작하며 지키게 하시고 창2:15
따라서 우리는 살기 위해서 일하는 것이 아니라 일하기 위해서 살아야 한다. 왜냐하면 일은 우리가 추구해야 할 목적이 아니라 하나님의 영광을 이 땅에 드러내는 수단이기 때문이다.
(2) 타락한 후의 일에 대한 정의
타락 전 아담과 이브는 일을 통해서 하나님을 나타내고자 하는 인간의 본능적 갈망을 충족시켰으며, 일을 통해서 나타나신 하나님의 성품과 권능으로 인해 하나님의 즐거움과 기쁨에 참예하는 삶을 살았다. 그러나 마귀의 유혹에 의해서 하나님처럼 되고자 했던 인간은 죄를 짓게 되었고, 그 결과 하나님과의 생명적 관계가 끊어지게 되었다. 창조주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존재에서, 피조물인 마귀의 성품과 능력을 나타내는 존재로 전락해 버린 것이다. 그 결과 자신의 노력과 행위로 살아가는 자존자적 존재가 된 것이다.
오늘날 우리가 온전한 삶(지속적으로 불안하거나 두렵지 않고 자유와 기쁨을 누리는 삶)을 유지하고자 하는 마음은 바로 타락 전 하나님의 자녀로서 누렸던 모든 것들에 대한 추구이기도 하다. 그러나 일은 더 이상 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내는 수단이 아니라 우리가 잃어버린 타락 전 삶의 상태를 회복하기 위한 수단이 되어 버린 것이다. 다른 말로 하나님의 본질로서 우리에게 위임되었던 것들을 잃어버린 후 스스로 채우고자 하는 마음(바로 탐욕)을 충족시키기 위한 수단으로 전락한 것이다. 그 탐욕은 하나님의 주권인 소유, 통치, 공급을 포함하고 있다. 일이 고통이 된 것은 인간의 타락 이후 땅이 저주를 받았고 인간의 죄에 대한 심판을 받았기 때문이지, 본래 일 자체가 저주이거나 고통스러운 것이 아니다. 일로 인한 고통은 죄의 결과로 인한 것이다.
아담에게 이르시되 네가 네 아내의 말을 듣고 내가 네게 먹지 말라 한 나무의 열매를 먹었은즉 땅은 너로 말미암아 저주를 받고 너는 네 평생에 수고하여야 그 소산을 먹으리라 땅이 네게 가시덤불과 엉겅퀴를 낼 것이라 네가 먹을 것은 밭의 채소인즉 네가 흙으로 돌아갈 때까지 얼굴에 땀을 흘려야 먹을 것을 먹으리니 네가 그것에서 취함을 입었음이라 너는 흙이니 흙으로 돌아갈 것이니라 하시니라 창3:17-19
마귀는 일에만 매진하도록 하거나 혹은 일하기 싫어하는 마음을 우리에게 준다. 둘 다 하나님의 섭리를 깨닫지 못하게 하는 사단의 전략이다. 일을 내가 해내어야 하는 것이라고 규정할 때, 우리는 자신의 행위와 노력으로 그 일을 이루어야 한다는 부담감을 가지게 되고 또 이루지 못하면 어떡하나 염려하고 걱정하게 된다. 마귀는 바로 그 틈을 통하여 우리를 장악한다.
마귀는 우리에게 “일하지 않으면 너는 이 세상에서 버림받을 수밖에 없어. 무가치한 존재가 되는 거야. 아무에게도 용납 받지 못하고 인정받지 못하는 존재가 되는 거야. 원하는 것을 아무것도 얻을 수 없는 존재가 되는 거야. 일하지 못하면 당장 오늘 하루도 보장받을 수 없어.” 라고 속인다. 우리가 그 말에 속을 수밖에 없는 이유는 바로 일에 대한 정의가 변질되었기 때문이다.
결국 인간에게 있어 일은 저주로 주어진 것이며 악한 것이라는 생각을 가지게 되었고, 다른 사람을 부리는 일은 가치가 높은 반면 섬기는 일은 가치가 낮은 것으로 생각하게 되었고, 지위가 낮거나 수입이 적은 일은 자신의 존엄성을 해친다고 생각하게 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일을 해야 하는 이유를 일을 해야 돈을 벌 수 있기 때문에(경제적인 만족을 누리기 위해서), 일을 해야 먹고 살 수 있기 때문에(재정적으로는 생계를 유지하고 가족을 부양하기 위해서), 현재의 일을 열심히 해야 차후 내가 원하는 일을 할 수 있기 때문에(개인적으로는 자신이 원하는 것을 추구하고 만족을 얻기 위해서), 사회적으로는 다른 사람들에게 짐이 되는 것을 피하고 사회에 기여하기 위해서, 관계적으로는 다른 사람들과 잘 지내고 돕기 위해서라고 생각하며 살아가고 있다.
2) 그리스도인의 이원론적 사고
이렇게 일의 의미가 변질됨으로 인하여 심지어는 믿는 그리스도인조차도 일에 대한 올바른 성경적 개념을 가지지 못하고 아래와 같은 이원론적 사고방식을 가지게 되었다.
(1) 이원론적 사고 1 – 일은 타락으로 인하여 우리가 받아야 하는 형벌이라는 생각
우리는 일을 에덴동산에서 아담과 하와가 불순종했기 때문에 그 결과로 우리가 어쩔 수 없이 감당해야 할 벌이라고 생각한다. 이러한 생각은 매우 비성경적이다. 인간이 타락하기 전인 창세기 2장까지를 다시 보라. 하나님께서 인간을 창조하시고 제일 먼저 맡기신 임무가 바로 하나님 나라에서 일하라는 것이다. 일은 죄의 결과가 아니라 본래 하나님을 나타내는 축복의 수단이었다.
지금 우리는 새 언약 아래 있으며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다. 그 말은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로 인하여 모든 형벌로부터 자유함을 얻었으며, 하나님의 상속자로서 이 땅에서 그분의 유업을 이어가야 한다는 뜻이다.
(2) 이원론적 사고 2 – 신앙은 영적인 것이고 일은 세상적인 것이라는 생각
일은 월급, 이윤, 주식가치, 순가치, 부가가치, 현금의 흐름, 산출 이익, 조직에 대한 기여도 등으로 정의되는 반면, 신앙은 영혼의 구원, 하나님과의 관계, 교회에 대한 헌신과 충성, 구제와 봉사, 말씀공부, 성도간의 교제, 하나님 나라의 이익 등으로 정의되고 있다. 따라서 일반적으로 일은 우리가 가치 있다고 생각하는 것들을 행하는데 방해되는 부정적인 것으로 본다. 우리는 지금 가치(價値)와 가격(價格)을 혼돈하고 있다. 일은 가치에 해당하고, 그 가치의 정도를 매기는 것이 가격이며, 그 수단이 돈이다. 우리는 지금 가치 대신에 가격을 추구하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이원론적인 개념은 우리로 하여금 더 훌륭한 그리스도인이 되기 위해서 육신적인 삶에서 영적인 삶으로 변화시키고자 하는데 자신의 모든 생각과 행위를 집중시키게 한다. 그 결과 우리가 다양한 영적 체험을 함에도 불구하고 세상을 변화시킬 수 없게 된다. 우리가 일에 대한 이러한 이원론적 사고방식에서 벗어날 때 영적으로 국한된 삶만을 추구하는 것이 아니라, 비로소 하나님의 통치가 우리를 통하여 삶의 모든 영역과 창조세계 전체에 실제적으로 나타나게 할 수 있다.
우리는 흔히 일과 영성을 어떻게 조화시키거나 균형 잡을 수 있는가에 대해서 질문하지만, 일과 영성을 따로 분리해서 생각하는 그 자체가 이 질문의 답을 얻지 못하게 하는 이원론적인 사고방식이다. 일과 영성(내 삶에서 하나님께서 얼마나 나타나시는가)은 분리되어 설명될 수 없으며, 일은 영성을 통해서 영성은 일을 통해서 나타난다. 우리는 일과 신앙이라는 대상과 목적에 대한 차이점을 말하고 있지만, 실제 문제는 일과 신앙의 대상과 목적에 있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대하는 우리 마음의 태도에 달려 있다. 즉, 신앙은 영적인 것이고 하나님과 관계된 것인 반면 일은 육체적이고 세상적인 것과 관계되어 있다고 생각하는 내 믿음의 문제인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그리스도인만의 주가 아니라 모든 인간의 주님 되시며, 하나님께서는 신앙과 관련된 것만을 창조하시고 다스리시는 것이 아니라 모든 피조세계를 창조하시고 다스리신다. 바로 우리의 잘못된 믿음이 하나님을 제한하고 있는 것이다. 우리는 모든 것에서 하나님의 뜻을 발견해야 하며, 그곳에 하나님께서 나타나시도록 하기 위해서 부름을 받은 존재이다. 그곳이 교회이든 일터이든 가정이든 말이다. 예수님께서는 세상과 단절된 새로운 형태의 영적 생활을 우리에게 가르쳐 주시러 오신 것이 아니다.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셔서 아버지를 나타내신 것은 바로 일을 통해서였다.
예수께서 그들에게 이르시되 내 아버지께서 이제까지 일하시니 나도 일한다 하시매 요5:17
우리의 일터가 바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허락하신(우리가 이루어야 할) 그의 나라임을 생각해 본적이 있는가? 지난 세기를 되돌아보면, 교회는 수많은 영혼을 구원하는데 성공했지만 사회에 영향력을 미치는 데는 실패했다. 왜냐하면 성도의 일터 중심이 아닌 교회 중심적인 구제봉사를 해왔고, 그것도 사회변혁이 아니라 단지 영혼구원의 차원으로만 해 왔기 때문이다. 이제는 교회(예배당)에서 세상을 변화시키기 위해서 훈련받은 성도들이 일터 중심적 신앙생활을 전략적으로 시도해야 한다. 이것은 단지 일터에서 전도해서 교회로 데려오는 개념이 아니라, 자신이 교회(하나님의 백성)가 되어 일터에 교회를 가지고 가는 것이다(왕 같은 제사장).
그들은 오래 황폐하였던 곳을 다시 쌓을 것이며 옛부터 무너진 곳을 다시 일으킬 것이며 황폐한 성읍 곧 대대로 무너져 있던 것들을 중수할 것이며 외인은 서서 너희 양 떼를 칠 것이요 이방 사람은 너희 농부와 포도원지기가 될 것이나 오직 너희는 여호와의 제사장이라 일컬음을 받을 것이라 사람들이 너희를 우리 하나님의 봉사자라 할 것이며 너희가 이방 나라들의 재물을 먹으며 그들의 영광을 얻어 자랑할 것이니라 사61:4-6
(3) 이원론적 사고 3 – 열심히 일하는 것과 예배드리는 것은 다른 것이라고 생각한다.
일하는 것과 예배드리는 것은 형식은 다르지만, 하나님을 경배하고 그분의 뜻을 알고 그분을 기쁘시게 하는 본질에서는 차이가 없다. 이것은 일의 히브리적 어원이 예배(avodah)와 동일하다는데서 알 수 있다. 우리는 궁극적으로 일하는 것과 예배하는 것이 동일한 의미임을 알아야 한다. 왜냐하면 일도 예배도 모두 하나님을 나타내고 경배하는 다른 방식일 뿐이기 때문이다. 일은 자신을 위한 것이고, 예배는 하나님을 위한 것이 아니다. 우리가 일의 의미에 대해서 혼란을 가지는 것은 일 그 자체에 있는 것이 아니라 그 일을 행하는 인간의 잘못된 사고방식에 있다.
우리는 모든 것을 이원론적으로 분리해서 생각하지만(예를 들어, 교회는 거룩한 곳이고 자신의 일터는 추한 곳으로) 그러한 곳은 없으며, 둘 중 어느 곳에도 죄가 영향을 미칠 수 있고 반대로 하나님을 영화롭게 할 수도 있다. 또한 믿음, 소망, 사랑과 같은 순수한 미덕만이 최고의 가치를 지니고 있다고 생각하지만, 사실은 그 덕목 자체로가 아니라 그것이 수행된 현실의 일로 나타날 때 비로소 최고가 된다.
(4) 이원론적 사고 4 –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기 위해서는 성공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우리는 일을 할 때 어떤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서 하나님의 도우심을 구하기 위해 기도하고 또한 주의 말씀의 가르침을 그 일에 적용한다. 그러나 그것은 인과법칙에 기초한 율법의 행위로 신앙 생활하는 것이다. 우리는 우리가 달성해야 할 성공을 위해서 일하는 것이 아니라 상황과 결과에 상관없이 하나님을 나타내기 위해서 일해야 한다.
우리는 타락 후(예수 그리스도 밖에 있는 삶)의 상황과 삶을 구속 후(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삶)의 그것들과 구별할 줄 알아야 한다. 그런데 우리는 타락 후의 상황과 삶이 마치 당연한 진리인 것처럼 받아들이고 있다. 지금 우리는 현재적 하나님 나라에서 자녀의 삶을 살고 있기 때문에, 뜻이 하늘에서 이루어진 것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도록 하는 삶을 살아야 한다. 그 일을 위해서는 킹덤 멘탈리티를 가지고 하나님 나라의 법을 제대로 알고 이 땅에 도래한 하나님 나라에서 그 법을 적용할 줄 알아야 한다.
3) 일과 의식주
일이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수단이 아니라 자신을 지키고 자신을 먹여 살리고 재물을 모으는 수단이 될 때부터 고통이 시작되는 것이다. 왜냐하면 일을 하지 않으면 자신을 지키지 못하고 먹고 살 수 없으며, 재물이 없으면 권세와 능력을 누릴 수 없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결국 일이 적게는 자신의 의식주를 해결하는 수단으로, 크게는 자신의 탐욕을 채우는 수단으로 변질되어 버린다.
인간의 탐욕은 끝이 없고 아무리 애써도 만족이 없다. 왜냐하면 그 탐욕은 오직 끊어진 하나님의 생명과 연결될 때 끝나기 때문이다. 그러나 인간은 그것 대신에 자신의 혼과 육으로 최선을 다하는 삶을 살게 되었다. 그 결과 일은 노동이 되었고, 수고하지만 고통스럽고 끝없는 무거운 짐이 된 것이다.
아담에게 이르시되 네가 네 아내의 말을 듣고 내가 너더러 먹지말라 한 나무 실과를 먹었은즉 땅은 너로 인하여 저주를 받고 너는 종신토록 수고하여야 그 소산을 먹으리라 창3:17
본래는 우리는 수고하여야 그 소산을 먹는 존재가 아니었다. 그러나 우리가 죄로 인하여 땅이 저주를 받았기 때문에 우리는 종신토록 수고해야만 그 소산을 먹을 수 있게 되었다. 인간은 오랫동안 땅의 저주 아래 살아 왔기 때문에 자신이 구원받은 것 외에는 구원의 역사가 무엇인지를 제대로 알지 못하고, 여전히 저주 아래 행해졌던 대로 생각하고 저주 아래 놓여 있는 그것들이 당연하다고 믿고 있다. 타락 후에는 종신토록 수고하여야 그 소산을 먹게 된다. 즉, 일의 대가로 먹고 살 수 있게 된다는 것이다. 따라서 일은 일종의 저주이며, 먹고 살기 위해서 행해야 하는 것으로 인식하고 있다.
그러나 타락 전에는 결코 그렇지 않았다. 일이란 하나님의 영광을 이 땅에 드러내는 수단이었으며, 오직 하나님의 자녀에게만 주어진 특권이었던 것이다. 일을 통해서 하나님의 지혜와 권능이 풀어지기 때문이다. 일을 통해서만이 내가 누구인지(하나님의 자녀로서의 정체성)를 알게 되고 하나님께서 나에게 주신 은사와 능력을 알게 되기 때문이다.
예수님께서는 바로 이런 저주의 삶이 회복되는 하나님 나라의 좋은 소식을 가지고 인자로서 이 땅에 오셨고, 당신의 죽으심과 부활을 통하여 인간의 죄에 대한 심판을 대속하시고 저주 받은 땅을
회복시키시고자 하셨다. 이것이 바로 복음인 것이다. “뜻이 하늘에서 이루어진 것 같이 땅에서 이루어지이다”라는 말씀을 생각해 보라.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서 그의 은혜의 풍성함을 따라 그의 피로 말미암아 속량 곧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 이는 그가 모든 지혜와 총명을 우리에게 넘치게 하사 그 뜻의 비밀을 우리에게 알리신 것이요 그의 기뻐하심을 따라 그리스도 안에서 때가 찬 경륜을 위하여 예정하신 것이니 하늘에 있는 것이나 땅에 있는 것이 다 그리스도 안에서 통일되게 하려 하심이라 엡1:7-10
우리를 구속하시고(심판으로부터 해방시키시고),땅의 저주를 파쇄하시고, 주의 일을 새롭게 하게하심으로(일의 의미를 회복시키심으로써) 하나님의 통치가 이루어지도록 하신다(창3:17, 마6:10,
엡1:10을 생각해 보라).
예수 그리스도의 죽으심과 부활에 동참함으로 승천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영이 임한 그리스도인에게 있어서 일은 더 이상 속되고 인간적이고 세상적인 것이 아니라, 그 일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소명이며,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수단이라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 실제적으로 하나님의 영광의 나타남은 바로 우리의 일을 통해서이다. 예수님께서 가르치신 말씀을 생각해 보라. 우리는 의식주를 위해서 일하지 말아야 하며, 하늘에 계신 아버지께서는 우리에게 필요한 것이 무엇인 줄 알고 계시며, 우리에게 채워 주신다고 말씀하신다.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목숨을 위하여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몸을 위하여 무엇을 입을까 염려하지 말라 목숨이 음식보다 중하지 아니하며 몸이 의복보다 중하지 아니하냐 공중의 새를 보라 심지도 않고 거두지도 않고 창고에 모아 들이지도 아니하되 너희 천부께서 기르시나니 너희는 이것들보다 귀하지 아니하냐 너희 중에 누가 염려함으로 그 키를 한 자나 더 할 수 있느냐 또 너희가 어찌 의복을 위하여 염려하느냐 들의 백합화가 어떻게 자라는가 생각하여 보라 수고도 아니하고 길쌈도 아니하느니라 그러나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솔로몬의 모든 영광으로도 입은 것이 이 꽃 하나만 같지 못하였느니라 오늘 있다가 내일 아궁이에 던지우는 들풀도 하나님이 이렇게 입히시거든 하물며 너희일까보냐 믿음이 적은 자들아 그러므로 염려하여 이르기를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입을까 하지 말라이는 다 이방인들이 구하는 것이라 너희 천부께서 이 모든 것이 너희에게 있어야 할 줄을 아시느니라 마6:25-32
그리고 우리의 인생은 먹고 마시고 입는 것을 위해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그의 나라와 의를 구하기 위해서 존재하는 것이라고 말씀하셨다. 한글 성경에서는 마치 “그의 나라와 의를 구하면”이 조건절처럼 되어 있지만, 실제는 그렇지 않다. 우리가 그의 나라와 의를 구하며 살 때 하나님의 섭리로 “모든 것”이 우리에게 더하여진다는 것이다. 한글성경에 “그리하면”의 헬라어는 “카이(Kahee)”로서, 영어로 and(그리고, 역시, 마찬가지로)의 뜻을 지니고 있지, if(… 하면)의 뜻을 지니고 있지않다.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 마6:33
문제는 우리가 일하지 않으면 먹고 살 수 없다는 믿음에 강하게 사로잡혀 있어, “오늘 있다가 내일 아궁이에 던지우는 들풀도 하나님이 이렇게 입히시거든 하물며 너희일까보냐 믿음이 적은 자들아”라는 말씀을 믿지 못하는데 있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로 인하여 구원받은 하나님의 자녀이다. 우리는 의식주의 해결을 위해서 일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나라와 의를 구함으로서 주의 뜻을 이루는 존재이며, 본래의 임무를 감당할 때 하나님께서 우리의 의식주를 해결해 주신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일을 해야 먹고 살 수 있다는 개념 안에는, 일은 우리의 자유를 구속하고 싫어도 해야 한다는 의미가 내포되어 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모든 것을 은혜로 누릴 수 있는 그리스도인에게 있어서 일은 하나님을 나타내고 다른 사람을 사랑하고 섬길 수 있는 기회인 것이다. 이것은 의식주의 해결로부터 해방된 자유이며 부르심에 대한 순종이다.
킹덤빌더의 실제적인 삶
I장. 킹덤빌더의 일상 삶
II장. 킹덤빌더의 일상 삶
III장. 킹덤빌더의 일상 삶
1. 삶의 성경적 이해
2. 기독교 신자의 삶에 대한 성경적 이해
3. 킹덤빌더의 삶에 대한 성경적 이해
4. 삶의 요소의 재정립
5. 킹덤빌더의 삶의 요소 – 일(작업)
2014년 3월호부터 2년 6개월에 걸쳐 「HTM 지상세미나」 섹션에 연재하였던 <알고 싶어요 하나님의 치유> 시리즈가 2016년 8월호를 마지막으로 30회 그 대단원의 막을 내렸습니다. 이번 호부터는 하나님의 자녀가 이 땅에서 하나님의 뜻을 이루어가는 삶을 실제적으로 살아갈 수 있도록, 일상에서 맞이하는 다섯 가지 삶의 요소(일, 만남, 시간, 물질, 건강)를 하나님나라의 사고방식으로 새롭게 조명해보는 <킹덤빌더의 실제적인 삶> 시리즈를 시작합니다. 매일의 삶이 하나님의 뜻을 이루어가는 삶이 되기를 원하는 모든 킹덤빌더들의 열독을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