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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상의 음악을 전해준 바흐의 삶과 음악 1

천상의 음악을 전해준 바흐의 삶과 음악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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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INGDOM LIFE &
음악
천상의 음악을 전해준 바흐의 삶과 음악 1

미국 인디애나 음악대학원 졸업 / 서울대, 건국대, 총신대, 장신대 강사 및 겸임교수 김애엽


 

 

2013-15

 

 

요한 세바스챤 바흐(Johann Sebastian Bach, 1685년 3월 21일~1750년 7월 28일)는‘음악의 아버지’라 불린다. 바흐는 바로크 음악(대략 1600년부터 1750년까지의 서양음악의 양식)을 집대성한 작곡가로 그때까지의 모 든 음악형식과 작곡기법을 최상의 상태로 완성시켜 후대 음악의 근원을 마련해 주었다고 평가 받고 있다. 실제로 바흐는 지금까지 수많은 작곡가나 연주가들에게 창조적인 영향을 미치며 모든 음악가 들에게 음악의 아버지로서의 역할을 하는 등 최고의 경의와 찬사를 받고 있다. 바흐는 하나님의 감동으로 음악을 창조하던 작곡가였다. 그는 언제나 악보의 첫머리에 J. J. (Jesu Juva, 예수님 도와주소서)라고 글씨를 쓴 뒤 작곡을 시작했으며, 악보의 마지막에는 S.D.G(Soli Deo Gloria, 오직 하나님께 영광을)라고 적으며 작곡을 마치는 것으로 유명했다. 바흐는 성경의 기 자들이 성령의 감동으로 성경을 써 내려가듯 모든 곡을 작곡할 때마다 예수님의 도움을 간절히 구하 며 성령의 감동으로 초인적인 작곡들을 할 수 있었으며, 그의 마르지 않는 독창성과 영감의 근원은 음악을 우리에게 선물로 주신 하나님으로부터 직접 흘러온 것이었다.

 

그것을 깨달은 작곡가 로시니는‘바흐는 바로 신의 기적’이라고 고백했고, 바흐는 오직 하나님께만 영광이 돌려지기를 간절히 원하며 작곡을 했다. 그가 자신을 낮추고 이 땅에서 하늘에 속한 사람의 삶을 살았을 때 하나님은 영원히 그를 영화롭게 하셨으며, 그래서 몇 백 년이 지난 지금도 바흐의 음 악을 듣는 사람들은 그의 음악을 통해 하나님의 능력을, 하나님의 사랑을, 하나님의 음성을 그리고 천상의 음악을 들을 수 있게 된것이다.
18세기 중엽 신(神) 중심의 세계관에서 인간의 이성과 자연스런 감정의 표현을 주창하는 계몽주의 사상이 지배하게 되면서 바흐의 음악은 젊은 작곡가들로부터 구식 음악이라고 불리며 비 판을 받기 시작했다. 바흐는 새 로운 음악을 요구하는 교회 당 국자들과도 끊임없이 마찰을 빚으며 대위법의 전통과 교회 의 질서를 수호하고자 부단히 애썼지만, 그의 음악은 그의 죽 음과 함께 낡은 음악으로 치부 되어 한 동안 묻혀버리기도 했 다. 바흐가 1750년 서거하면서 바로크양식의 서양음악은 서서 히 기울어져 가고 고전주의 양 식이 유럽에서 새롭게 나타나 기 시작하며 바흐의 존재도 과거 속으로 사라지는 듯 했다. 그러나 바흐가 죽은 지 79년 이 지난 후 바흐의 마태 수난곡 의 악보가 멘델스죤에 의해 발 견됐다. 그리고 멘델스죤은 그 곡이 초연된 지 정확히 100년 후인 1829년 3월 11일 베를린 의 징 아카데미(Singakademie)에 서 마태 수난곡을 지휘하기에 이른다. 연주가 끝난 후 장엄하 고 숭고하며 은혜로운 예수님 의 수난음악에 모든 청중들이 큰 감동을 받아 눈물을 흘리며 그 자리를 떠나지 못했다는 일 화도 있다. 멘델스죤의 마태 수난곡 연주는 바흐의 음악을 부활시키는 기폭제가 되었으며, 그 후 19세 기와 20세기를 거치며 수많은 바흐의 음악들이 재평가되고 바흐 음악의 부흥이 일어나게 되었다. 이탈리아, 프랑스, 독일 각 나라의 양식들을 잘 융합 하여 정교한 기법으로 표현하 였고, 당대에 쓰였던 모든 기교 와 형식들을 사용하여 가장 극 도로 완성된 천재적인 바로크 음악의 절정을 보여준 바흐의 음악이 마침내 시대와 공간을 초월하여 모든 사람들에게 사 랑을 받게 되었던 것이다.

 

그의 음악은 바흐의 뒤를 이어 활약한 고전주의 작곡가 하 이든, 모짜르트, 베에토벤 뿐 아니라 후대의 다양한 양식의 모든 작곡가들에게 지대한 영 향을 미쳤으며, 많은 천재적인 위대한 작곡가들도 바흐 앞에 서는 고개를 숙이고 그들이 할 수 있는 최대의 경의를 표했다. 베에토벤은 바흐에 대해“당신 은 작은 시냇물이 아니라 드넓 은 대양입니다.”라고 했고(Bach는 독일어로 작은 시냇물을 뜻한다), 바그너는“바흐의 음악은 음악 사에서 가장 엄청난 기적”이라 고 칭했으며, 첼리스트 파블로 카잘스는“바흐는 영원하다. 그 누구도 바흐의 위대성, 그의 깊 이, 다양성에서 그에게 미치지 못한다.”라고 말하며 매일 바흐 로 하루를 시작한다고 했다. 그러나 바흐와 그의 음악을 가장 정확하게 알려 준 사람은 바흐가 숨질 때까지 가장 가까 이에서 함께 생활하며 눈이 나 쁜 바흐 대신 악보를 필사해 준 소프라노 가수이자 그의 아내 안나 막달레나(Anna Magdalena Wilcke)라고 생각된다. “바흐는 하늘에서 부르는 대로 받아 적 었다.”라는 그녀의 표현에 덧붙 이자면 바흐의 경이로운 음악 은 그가 그토록 사랑했던 하나 님의 선물이었으며, 그의 엄청 난 양의 창작의 작업들은 고되 고 힘들기도 했겠지만 동시에 바흐는 그 작업을 통해 그에게 음악을 불러주시는 하나님과 끊임없이 교통하며 무한한 희 열을 맛보았을 것이다.

 

살아생전의 바흐는 동시대의 작곡가 비발디나 텔레만처럼 유럽전역에 이름을 떨치는 유 명한 작곡가도 아니었으며, 평 생 교회를 벗어나지 않고 마치 성직자처럼 교회음악에 몰두하며 너무나도 많은 일들을 성실하고 묵묵하게 수행했을 뿐이었다. 조용히 그러나 끊임없이 흐르는 시냇물처럼 말이다. 그 런 바흐는 어떻게 음악을 시작 하게 되었을까. 바흐는 1685년 3월 21일 독 일 튀링겐 지방의 작은 도시 아 이제나흐(Eisenach)에서 그 마을 의 음악감독이자 바이올린 연 주자인 아버지 요한 암브로지 우스 바흐(Johann Ambrosius Bach)의 여덟 번째 막내아들로 태어났다. 바흐의 가문은 200년에 걸쳐 50명 이상의 음악가 를 배출한 가문으로 음악사적 으로뿐만 아니라 유전학적으로도 주목을 받는 이름난 음악가 가문이었다. 음악적으로는 훌륭한 유산을 물려받았지만 어 린 시절이 그리 유복한 환경은 아니었고, 바흐는 아버지로부 터 바이올린, 하프시코드와 음 악 기초이론을, 사촌 큰아버지 로부터는 오르간을 사사받으며 자라다가 아홉 살 때 어머니와 아버지가 잇따라 돌아가시며 고아가 된다. 하는 수 없이 큰 형인 요한 크리스토프 바흐의 집이 있는 오르두르프(Ohrdurf) 로 이사가 형 집에 얹혀살며 형으로부터 작곡의 기초를 배 우기에 이르렀다. 형은 많은 악보의 사본을 소장하고 있었 는데 그 시절 바흐는 형 몰래 밤마다 달빛아래에서 대가들의 악보를 보고 손으로 직접 옮겨 적는 작업을 통해 작곡을 공부하다가 결국 시력이 매우 나빠 져 일생 동안 눈병으로 고생을 많이 하게 된다.

 

15세가 되면서 바흐는 경제적 독립을 위해 북부 독일의 뤼 네부르크(Luneburg) 고등학교에 장학생으로 들어가 유명한 작 곡가 겸 오르가니스트인 게오 르그 뵘(Georg Bohm, 1661-1733) 을 알게 되어 큰 영향을 받았 고, 이 학교에서 라틴어와 정통 루터교의 신앙교육도 함께 받게 되어 바흐의 신앙의 초석을 다지게 된다.
18세에 학교를 졸업한 후 바흐는 1703년 4월 바이마르 궁 정에 바이올린 주자로 취직을 했다가 곧바로 8월에 아른슈타트(Arnstadt)의 교회 오르간 주 자로 채용되어 일을 하게 된다. 이 시절 바흐는 400킬로미터를 걸어가서 북 독일의 뤼벡 (Lubeck)에서 있었던 북스테후데(Buxtehude, 1637~1707)의 연주 를 감상하고 큰 감명을 받아 그 의 영향을 받은 오르간 음악과 코랄 전주곡들을 작곡했다는 일화도 있다. 그 뒤 바흐는 이전에 바이올린 주자로 일했던 바이마르 (Weimar) 궁정에 1708년부터 1717년까지 다시 취직했다. 이 시기에 궁정 오르가니스트 겸 악장(concertmaster)으로 일하며 현존하는 오르간 곡의 반 이상 을 작곡했기 때문에, 흔히 이 시대를 바흐의 오르간 시대라 고 일컫는다.  칸타타를 한 달에 한 곡씩 연주해야 하는 궁정에서 이탈리아 작곡가 비발디 (Antonio Vivaldi,1678~1741)의 영 향을 많이 받았다. 이때가 바흐에게는 정신적, 물질적으로 비 교적 풍요로운 시기였고 밝고 즐거운 표현의 많은 기악곡들 이 탄생되는 시기였다. 1717년부터 1723년까지는 쾨텐(Kothen) 궁정으로 옮겨 감독 (kapellmeister)으로 일하게 되는 데 영주 레오폴드가 캘빈파 개 신교도라 의전용 교회음악을 탐탁지 않게 여기는 바람에 바 흐는 이 시기에 많은 기악 걸작 들을 작곡하게 된다.

 

1723년에는 라이프찌히(Leipzig)에 있는 토마스교회의 합창장(cantor)으로 선출되어 1750년에 세상을 떠날 때까지 27년 동안 교회의 최고 음악감 독으로 정열적인 활동을 하기 에 이른다. 이 시기에는 마태수 난곡, 나단조 미사, 크리스마스 오라토리오, 160곡 이상의 교 회 칸타타와 교회 성악곡들을 작곡했다. 1724년부터는 특히 기악곡을 많이 작곡했다. 1748 년부터 최후의 대작 <푸가기법 (The Art of Fugue)>을 시작했으 나 마지막 곡을 완성하지 못한 채 1750년 두 차례의 눈 수술이 실패하여 끝내 시력을 잃고 수 술로 복용한 약들이 몸을 쇠약 하게 만들어 7월 28일에 뇌일 혈로 사망했다.
바흐는 오페라를 제외한 모든 장르의 작품을 다 작곡했으며, 200여 개의 교회 칸타타, 20개 의 세속 칸타타, 마태, 요한수 난곡(마태, 요한), 240개의 오 르간곡, 다수의 코랄편곡, 2개 의 오라토리오, 5개의 미사곡, 한 개의 마니피카트, 220개의 클라비어곡, 23개의 기악 협주 곡, 40개의 실내악곡 등 실로 상상을 초월하는 방대한 양(발 견되지 않은 곡들이 더 많다고 학자들은 추정하고 있다)을 작곡하였는데도, 한 곡 한 곡 그 깊이의 심오함과 음악적 완벽 함에 후대 사람들은 놀라움을 금치 못하고 있다. 바흐 당시에는 오페라가 흥행에 성공을 했 기 때문에 많은 작곡가들이 부 와 명예를 줄 수 있는 오페라를 작곡했으나, 바흐는 충분히 작 곡할 수 있는 능력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단 한 곡의 오페라도 작곡하지 않았고, 단지 특별 행 사나 라이프찌히의 대학생 연 주 단체인 콜레기움 무지쿰 (Collegium Musicum)을 위하여 세속 칸타타들을 작곡하는데 그쳤다. 바흐가 얼마나 마음 깊이 주님을 사랑했으며 그의 음 악이 얼마나 은혜롭고 경건하 며 고상하고 아름다운지 알 수 있는 대목이다. 다음호부터는 바흐의 주옥같은 곡들을 조금 더 구체적으로 하나하나 음미 하며 살펴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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