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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고 싶어요 하나님의 치유 6

알고 싶어요 하나님의 치유 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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Ⅱ장. 신유사역에 대한 성경·신학적 견해

 
치유사역에 대한 다양한 의견들을 종합해 볼 때, 성경·신학적 이해는 다음 다섯 가지의 범주에서 생각해 볼 수 있을 것이다. 첫째, 치유대상이 되는 질병은 직간접적인 죄의 결과인가, 아니면 하나님의 거룩한 뜻을 가지고 있는 것인가? 둘째, 성경은 치유를 포함한 기사와 표적이 단지 초대교회 때만 일어났다고 말하는가, 아니면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과 하나님나라의 도래에 따른 징표로서 예수님께서 재림하실 때까지 계속적으로 일어난다고 말하고 있는가? 셋째, 치유사역은 하나님나라 복음의 선포 및 그 실재와 어떤 관계를 가지고 있는가? 넷째, 기사와 표적은 사도들의 징표이고 그들을 통해서만 나타날 수 있는 것인가? 다섯째, 오직 믿음만으로 치유함을 받을 수 있는가?

이 섹션의 여러 장에 걸쳐서 이 문제에 대한 답을 알아보고자 한다. 우리가 이러한 질문에 대하여 성경·신학적으로 올바르게 이해하고, 그에 따른 믿음을 가질 때 우리의 삶은 과거와 분명히 달라질 것이다.

1. 신유에 대한 부정적 견해

 

1) 복음주의 개혁신학

복음주의 개혁신학은 기본적으로 성령의 은사와 신유에 대해서 기적종식론(cessationism)의 입장을 취하고 있다. 모든 기독교 신학은 루터와 칼뱅으로부터 시작되었다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이 두 사람 모두 치유는 이전 시대를 위한 하나님의 경륜이라는 생각을 가졌으며, 치유에 대한 이러한 관점은 후대의 복음주의 개혁신학 노선으로 확고히 자리 잡게 되었다.

사도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하는 일과 그것들을 기록하는 일을 완수하였으며, 그들이 쓴 것 외에 어떤 것도 더 이상 계시되어야 할 것이 남아 있지 않고, 새롭고 특별한 계시나 기적은 더 이상 필요하지 않기 때문이다. -Luther 전집 중 요한복음에 대한 설교: MT 켈시, 치유와 기독교

치유의 은사는 다른 기적의 능력들과 함께 사라졌다. 그 능력들은 주님께서 복음의 새로운 선포를 가능케 하기 위해 잠시 동안 주시기를 기뻐하셨던 것이다. 그러므로 도유가 사도들의 손에 의해서 그 당시 행해져 그러한 능력들이 나타나게 한 성례전이었다고 하더라도, 우리가 도유를 행할 때 그 능력이 나타나는 것은 아니다. 우리들에게는 그러한 능력이 주어지지 않기 때문이다. -J. Calvin의 기독교 강요 : MT 켈시, 치유와 기독교

오늘날 교회는 기적적인 치유사역을 정규적으로 행할 권세가 없다. -John Stott: 1966년 세계복음주의대회

신약시대의 은사, 기사, 이적, 신유 등이 현재에도 나타난다는 것은 누구도 확신할 수 없고, 또 그런 것 같지도 않다. -J. I. Packer

 

2) 세대주의 신학

John N. Darby에 의해서 대중화된 현재 신학적 운동의 하나인 세대주의(Dispensationalism)가 가지고 있는 성경의 주제는 왕국(Kingdom: 하나님께서 다스리시는 신정통치의 왕국)이다. 이 왕국은 하나님께서 태초 이래로 꾸준하게 관심을 갖고 계시던 것으로, 사탄의 끊임없는 방해에도 불구하고 결국에는 그 계획하신 왕국을 이룩하실 것이다. 이러한 과정 속에서 하나님께서는 인간들에게 각 시대마다 다양한 방법으로 구원하기도 하시고 벌하기도 하시며 하나님의 섭리적 계획을 나타내신다. 이것이 성경의 전체적인 흐름이라고 보는 것이다.

M.R. DeHaan, Benjamin Warfield(『Miracles Yesterday and Today, Real and Counterfeit』, 1965), Merrill F. Unger(『Demons in the World Today』, 1972) 등은 치유와 신령한 은사들은 사도시대에 속한 것이며, 이러한 능력은 마지막 사도의 죽음과 함께 끝났다고 믿는다. 그리고 Benjamin Warfield(구 프린스톤 신학자)의 이러한 은사중단설(cessationism)은 정통 장로교회와 개혁교회의 교리가 되었다.

사도시대의 교회는 특징적으로 기적을 행하는 교회였다. 그렇다면 이런 형태는 언제까지 지속되었을까? 그것은 특별히 사도시대의 교회를 구별하는 특징이었고, 따라서 철저히 사도시대에 속했다. 그러므로 이와 같은 기능은 그 은사들을 분명히 사도들의 교회에 한정시켰으며, 당연히 사도들의 교회와 함께 사라졌다 -Benjamin Warfield: 『Miracles Yesterday and Today, Real and Counterfeit』, 1965

 

3) 스코필드 성경 (Scofield Bible)

세대주의 신학으로 성경 전체를 주석하고 있는 ‘스코필드 주석 성경’은 영어를 사용하고 있는 수백만의 근본주의자들과 복음주의자들 가운데 표적과 기사의 중단이론을 일반화시켜 놓았다(Wimber and Springer, 『능력전도』).

 

4) 다양한 세계관들

현대주의(modernism)나 자유주의(liberalism)를 중심으로 복음서의 기적들을 하나의 ‘신화’로 간주하는 진보적인 전통이 계승되고 있다. 이러한 이론에 따르면, 하나님은 인간과 관계하시고 매일 세상에 역사하시는 인격적인 존재라기보다는 추상적인 개념, 일반적인 원리로 이해된다. 따라서 하나님의 역사도 어떤 초자연적인 현상이기보다는 인과율에 따른 자연적 현상으로 이해한다. 이들은 초월적, 초자연적 세계를 부정하는 세계관으로 합리적인 세계관이라고 할 수 있으며, 반대로 기적을 사실로 받아들이는 사람들의 세계관에 대해 비합리적인 세계관, 초합리적인 세계관이라는 입장을 취한다.

 

5) 종교적 결정론

하나님께서는 만사를 주관하고 계시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질병을 이미 결정하셨다면 치유를 위한 많은 기도는 무익한 것이 될 것이며, 반면에 하나님께서 치유를 결정하셨다면 기도와 상관없이 치유가 될 것이므로 기도할 필요가 없다는 생각이다. 이런 경향은 주로 칼뱅주의자에 의해서 나타나며, 치유기도를 한다 하더라도 대부분의 기도는 ‘하나님의 뜻이라면 혹은 당신의 뜻대로’ 로 시작될 것이다. 그래서 만약 사랑하는 사람이 치유가 되지 않으면, 어떤 형태로든지 하나님에 대한 적대감을 가지게 될 것이다. 병이 났을 때 지체 없이 의사에게 데려가는 것은 주저하지 않으면서, 기도할 때는 하나님의 뜻인지 아닌지에 대해서 고민한다는 것이 너무나 아이러니하지 않은가?

 

6) 질병은 유익을 주기 위한 하나님의 섭리

역사적으로 볼 때 그리스도인들(특히, 가톨릭 신자들)은 병에 걸렸을 때, 하나님께 적극적으로 치유를 간구하기보다는 자신에게 유익을 주기 위한 하나님의 섭리로 이해해 왔다. 지금도 ‘질병을 통하여 거룩하게 된다’는 주장이 교회에 깊이 정착되어 있다. 또한 우리의 상처나 질병에 대해서 하나님께서 특별한 뜻을 가지고 있으며, 그것을 이루기 위해서 우리에게 주신 것이기 때문에 치유하는 것은 하나님의 뜻이 아니며, 또한 그것을 이루기까지는 하나님께서 치유하지 않으실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재미있는 사실은 (1) 어떤 사람은 치유받기를 거부한다. 만일 어떤 사람이 자기 자녀에게 그렇게 했다면 당장 아동학대죄로 잡혀 갈 것이다. (2) 고난 속에 담겨져 있는 하나님의 뜻을 찾고, 이를 통해 자신에게 주는 영적 유익을 찾으려고 노력함과 동시에 대부분은 의술을 통해서 질병을 치료한다는 것이다.

성경 어디에도 질병이 하나님의 축복의 일부로 나열되어 있지는 않다. 치유되지 않은 것에 대한 정당성을 부여하기 위해서 흔히 질병과 장애를 축복으로 가르치곤 한다. 이러한 견해는 로마의 주교였던 그레고리우스 대제(Gregory I, 590-604)의 신학적 영향으로부터 온 것이다. 그는 질병을 하나님이 사랑하시는 자녀를 징벌하는 한 가지 수단으로 생각했다. 그렇게 함으로써 자신의 죄를 깨닫고, 더 깊이 하나님께 나아갈 수 있다는 것이다.

 

여러 계시를 받은 것이 지극히 크므로 너무 자고하지 않게 하시려고 내 육체에 가시 곧 사단의 사자를 주셨으니
이는 나를 쳐서 너무 자고하지 않게하려 하심이니라 이것이 내게서 떠나기 위하여 내가 세번 주께 간구하였더니
내게 이르시기를 내 은혜가 네게 족하도다 이는 내 능력이 약한데서 온전하여짐이라 하신지라
이러므로 도리어 크게 기뻐함으로 나의 여러 약한 것들에 대하여 자랑하리니
이는 그리스도의 능력으로 내게 머물게 하려함이라 고후12:7-9

 

 

자신의 질병을 성숙을 위한 하나님의 연단 도구로 생각한다면, 사도 바울처럼 (1) 적극적으로 하나님께 치유를 구해야 하며, (2) 최소한 세 번 이상은 하나님의 음성을 들어야 하지 않겠는가? 고난에 하나님의 깊은 뜻이 있다고 생각하는 것은, 적어도 그가 하나님과 깊고 친밀한 교제를 하지 않는 한(적어도 하나님의 음성을 들어야 함), 겸손한 태도가 아니라 오히려 하나님의 뜻을 무시하는 교만한 태도임을 알아야 한다.

구약에 있어 욥의 경우는 하나님의 거룩한 뜻으로 질병을 갖게 되었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잘 살펴보면, 마귀가 욥에게 질병을 주었고, 하나님이 욥을 치유하신 것을 볼 수 있다. 흔히들 어떤 사람이 계속적으로 병을 앓고 있을 때 그 설명으로 욥의 이야기를 예로 든다. 그러나 욥은 지속적으로 병들지 않았다. 하나님이 그를 치유하셨다. 성경전체를 볼 때 하나님의 본질(여호와 라파)은 우리를 온전케 하시고 치유하시는 분이시지, 우리에게 고통을 주시는 분이 아니라는 사실을 기억해야 한다.

수많은 성경의 사실들을 살펴볼 때 질병은 개인, 가족 혹은 관련자들의 죄와 직간접적으로 연관되어 있으며, 그들이 속해 있는 환경, 사회의 죄악으로 인한 하나님의 심판의 결과로 일어난 것이다. 따라서 질병을 죄의 직간접적인 영향으로 보지 않고, 자신의 성숙을 위한 하나님의 연단의 도구로 생각하거나, 악한 영의 시험으로 생각하는 것은 성경의 전체적인 내용을 극단화시키는 것이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대하신 태도와 행동, 또 제자들에게 주신 가르침과 명령 어디에서도 질병을 축복으로 간주하신 경우는 발견되지 않는다. 예수님은 당신 앞으로 오는 병든 자들을 두고 하나님의 거룩한 목적에 대한 고려로 치유를 주저하신 적이 없으시다. 누구든지 즉각적으로 치유하셨다. 이러한 사실만 보더라도 질병은 어떤 거룩한 목적도 가지고 있지 않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실제로 신약에서 예수님이나 그 제자들은 마귀를 대했던 것처럼 질병을 대하셨다. 그들은 질병을 악한 적으로 취급했지, 친구로 취급한 적이 없다.

예수님은 율법의 저주와 질병을 포함한 모세의 법 안에 있는 모든 저주로부터 우리를 속량하셨다. 우리의 감정은 이 사실에 대해서 크게 놀라움을 느끼지는 못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것은 진리인 것이다. 예수님은 끊임없이 우리에게 아버지는 모든 사람이 구원 받고, 치유 받고, 해방 받기를 원하신다고 말씀하셨다.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저주를 받은바 되사 율법의 저주에서 우리를 속량하셨으니
기록된바 나무에 달린 자마다 저주 아래 있는 자라 하였음이라 갈3:13

 

 

 

7) 질병을 죄의 형벌이라고 생각함

이러한 생각은 우리가 아담과 하와의 자손이기 때문에 멸망할 수밖에 없고, 하나님이 관용을 베풀어 주시지 않는 한, 우리가 하나님께 무엇을 요구할 수 없다는 입장을 견지하는 것이다. 오늘날에도 자신이 너무나 가치가 없기 때문에 하나님께 자신의 병을 고쳐달라고 요청할 자격이 없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는 크리스천들이 적지 않다.

 

예수께서 들으시고 저희에게 이르시되 건강한 자에게는 의원이 쓸데 없고 병든 자에게라야
쓸 데 있느니라 내가 의원을 부르러 온것이 아니요 죄인을 부르러 왔노라 하시니라 막2:17

 

 

 

7) 질병을 죄의 형벌이라고 생각함

한편, 자신의 질병을 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내기 위한 섭리로 생각하기도 한다. 물론 하나님은 인간을 사랑하시지만 특별한 경우에 그들을 위하여 고통과 연단을 허락하시는 분이다. 그러나 그것을 하나님의 본질에 기초한 하나님의 섭리로 일반화시킨다면, 성경의 말씀을 왜곡하는 것이 된다. 이러한 불균형적인 믿음에 대한 최대의 피해자는 바로 병든 그리스도인이다.

 

제자들이 물어 가로되 랍비여 이 사람이 소경으로 난 것이 뉘 죄로 인함이오니이까 자기오니이까
그 부모오니이까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이 사람이나 그 부모가 죄를 범한 것이 아니라
그에게서 하나님의 하시는 일을 나타내고자 하심이니라 때가 아직 낮이매 나를 보내신 이의 일을 우리가 하여야 하리라
밤이 오리니 그때는 아무도 일할 수 없느니라 내가 세상에 있는 동안에는 세상의 빛이로라 요9:2-5

 

 

이에 그 누이들이 예수께 사람을 보내어 가로되 주여 보시옵소서 사랑하시는 자가 병들었나이다 하니
예수께서 들으시고 가라사대 이 병은 죽을 병이 아니라 하나님의 영광을 위함이요
하나님의 아들로 이를 인하여 영광을 얻게 하려함이라 하시더라 요11:3-4

 

 

예수님에 의해서 질병이 치유됨으로써 그분이 바로 메시야이며 그분을 통하여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것이지, 질병을 가지고 있는 그 자체가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것은 아니다. 결국 이러한 사건이 주는 메시지는 질병이나 죽음이 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내는 섭리에 맞추어져 있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이 누구이시며 어떤 일을 하셨는가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다는 것이다. 이러한 성경의 내용은 인간의 측면에서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가를 보는 관점이 아니라 “뜻이 하늘에서 이루어진 것과 같이 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이다”라는 측면에서, 즉 하늘이 땅을 침노하는 관점에서 보아야 한다. 더욱이 하나님이 하시는 일을 보지 않고는 아무것도 하시지 않으셨던 예수님께서(요5:19) 한 번도 질병을 병자의 유익을 위한 것이라고 말씀하신 적도 없고, 그분 앞에 나아오는 자를 치유하시지 않고 물리치신 적도 없다는 것을 기억하여야 한다.

 

9) 잘못된 성경해석

성경에 나타난 치유와 관련된 구절을 지나치게 영적으로 해석하는 경우도 있는데, 이러한 해석의 밑바탕에는 기적종식론과 헬라적 사고방식이 깔려 있다. 즉, 자신이 경험하지 못한 것은 믿으려 하지 않는 것이다. 5세기 초 제롬이 헬라어 성경을 라틴어 벌게이트 성경으로 번역을 하면서, 구원, 치유, 해방, 회복 등의 폭넓은 의미를 지닌 헬라어 sozo(save 구원하다)와 soteria(salvation 구원)을 “위험과 영원한 파멸로부터의 구원”, 즉 육신적인 치유의 의미를 배제한 좁은 뜻으로 한정시켰다.

 


Ⅰ장. 신유사역에 대한 일반적인 고찰
Ⅱ장. 신유사역에 대한 성경·신학적 견해

1. 신유에 대한 부정적 견해

2. 신유에 대한 기적종식론과 은사중지론에 대한 이해
3. 신유의 성경적 근거
4. 구속사적 관점에서의 신유
5. 신유에 대한 번영복음과 하나님나라 복음
6. 하나님나라의 관점에서의 신유
7. 치유사역과 하나님의 역사만을 좇는 것이 옳은 일일까

Ⅲ장. 신유와 치유
Ⅳ장. 성경적 신유사역
Ⅴ장. 신유사역의 분석
Ⅵ장. 하나님 자녀 관점에서의 치유
Ⅶ장. 신유사역의 실제
2014년 3월호부터 연재되고 있는 「HTM 지상세미나」 섹션에서는 손기철 장로의 저서 『기름부으심이 넘치는 치유와 권능』(두란노)에
소개된 치유관련 내용뿐만 아니라, 그동안 「월요말씀치유집회」, 「치유사역자 스쿨」, 「치유세미나」, HTM 뉴스레터 『헤븐리터치』의 「신
유」 섹션 등을 통해 듣고 보고 배웠던 신유와 관련된 방대한 내용들이 총망라될 것입니다. 신유를 통해 하나님의 나라가 이 땅에 임
했음을 증거하는 은혜의 통로가 되기를 원하시는 모든 독자들의 열독을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