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세처럼 죽기 1

모세처럼 죽기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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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INGDOM LIFE &

건강
모세처럼 죽기 1

 

한양의대 교수 김석현


“9988234!” 비밀번호가 아닙니다. 누구나 한번쯤은 나도 그랬으면 좋겠다고 생각해 봤을 만한 희망사항을 숫자로 나타낸 것입니다. 그 뜻인즉슨, 바로 “99세까지 88하게 살다 2-3일 앓고 4망하자!”입니다.

죽음을 피할 수 없는 연약한 인간이, 살아가면서 필연적으로 겪을 수밖에 없는 노화와 질병, 그로 인한 불편과 고통, 그리고 이별 등의 문제를 최소한의 어려움만으로 넘어갈 수 있는 최선의 방편을 축약한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다시 말해 “99세까지 노화나 질병으로 인해 고통 받지 않고 88하게 지내다가, 딱 2-3일만 병상에 누운 채 가족, 지인들 다 만나서 작별인사를 나눈 후, 적당한 아쉬움을 남긴 채 천국으로 떠난다. 그러고 나서 가족들이 3일장을 치르면 일주일 안에 모든 장례절차도 깔끔하게 끝이 난다.”라는 누구나 소망할만한 쿨한(?) 죽음의 모습이라고 아니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모든 사람이 바라기는 해도 실제로 이런 복을 누리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은 것 같습니다.

 

모세가 죽을 때 나이 백이십 세였으나 그의 눈이 흐리지 아니하였고 기력이 쇠하지 아니하였더라 신34:7

 

 

성경의 등장인물 중에 가장 고통스러운 죽음을 맞이하신 분이 예수님이시라면, 그 마지막이 적어도 육신적으로는 “9988234”에 합당한 죽음을 맞이한 사람은 모세라고 할 수 있습니다. 물론 죽음이라는 관문을 통과하지 않고 천국으로 직행한 에녹과 엘리야는 제외하고, 죽음이라는 보편적인 과정을 거친 등장인물들 중에서 그렇다고 할 수 있습니다. 모세는 장수하였음에도 불구하고 죽기 직전까지 시력저하, 근력저하 등의 신체적 노화조차도 겪지 않았으니 정말 쿨한(?) 죽음을 맞이했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고 보면 나이가 들었다고 해서 반드시 노화나 질병으로 고통 받아야 하는 것만은 아닌 것 같습니다. 그런데 제 경우를 돌아보니 작은 글씨가 잘 안 보이기 시작한 때부터 나이가 들어 노안이 오는 것을 자연스럽다고만 생각했지, 그것을 겪지 않아도 되는데 제가 겪고 있는 불편이라고는 단 한 번도 생각해 본적이 없는 것 같습니다. 장례식장에 조문을 갈 때도 늘 고인이 어떤 병으로 돌아가셨을까, 오래 고생하지는 않으셨을까 라고만 궁금해 했지, “9988234” 하셨겠지 라는 기대는 거의 해 본적이 없는 것 같습니다. 심지어 고인이 아주 믿음이 좋으셨던 분이라고 하더라도 말입니다. 왜 그렇게만 생각했을까 돌아보니, 실제로 그렇게 돌아가신 크리스천의 이야기를 자주 듣지를 못했기때문인 것도 한 가지 이유인 것 같습니다.

분명히 모세는 120까지 88하게 살다가 23도 하지 않고 4했다고 되어있는데도 불구하고, 저는 왜 노화현상이나 고통스러운 죽음에 대해 그렇게도 자연스럽게 받아들였을까요? 그런 생각을 하며 주위를 둘러보니, 제 주위 분들도 노화와 질병에 대해서 대부분 저와 비슷한 생각을 하고 계신 것 같았습니다. 그래서 탄식조로 하시는 이야기가 “늙으면 죽어야지…”가 아닐까 싶습니다.

그렇다면 왜 성경에는 분명히 있는 현상이 현실에서는 그렇게도 찾아보기가 쉽지가 않을까요?

이러한 현상 역시 우리의 믿음에 그 책임이 있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우리가 성령님을 인정하지 않고 “기적종식론”이나 “은사중단론” 등으로 성령님의 역사를 부인할 때, 기적이나 은사를 좀처럼 찾아보기가 어려운 것처럼, 우리는 성경에 기록된 역사적 사실 중 하나를 우리가 보고 듣고 이해할 수 있는 수준으로 축소하여 믿고 있기 때문은 아닐까요? 늘 주위에서 보고 듣는 것에만 초점을 맞추고 성경에 있는 사실은 성경 또는 그 시대에서만 가능한 일이지 오늘날의 현실에서는 있을 수 없는 이야기라고 단정해 버리고는, 전혀 바라지도 않고 믿지도 않아서 그런 것은 아닐까요? 우리는 나이가 들면 병을 앓게 되는 것은 부득이하다고 믿어버리고, 그래서 질병의 발생 자체에 대해서는 이렇다 할 대비를 하지 않고 있다가, 어떤 질병이 발생한 이후에야 치유의 기적을 바라며 살아가고 있기 때문은 아닐까요?

그렇다면 우리가 성령님을 인정하고 “기적”이나 “은사”가 종식되거나 중단되지 않았음을 깨닫고 믿음으로 그 일이 이 땅에서도 이루어짐을 선포할 때 그 일을 경험할 수 있는 것처럼, 지금까지의 노화와 질병에 대한 생각을 거부하고 반대로 “모세의 죽음”이 이 땅에서 이루어짐을 선포하고 믿고 바란다면, 그런 일들을 더 많이 보게 될 수 있는 것은 아닐까요? 만약 “모세의 죽음”을 사실이라고 받아들인다면, 우리도 전혀 병들지 않고 건강하게 살면서 마지막 호흡이 다하도록 주님의 일을 힘써 행하다가 죽음의 관문을 통과하는 것으로까지 우리의 믿음의 수준을 확장하여야 하는 것은 아닐까요?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 때문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 때문이라
그가 징계를 받으므로 우리는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으므로 우리는 나음을 받았도다 사53:5

 

 

예수님께서 그 고통스러운 죽음을 감내하시며 우리에게 주신 것들을 상기해 보면, 우리가 모세처럼 죽을 수도 있지 않을까요? 아니 그뿐만이 아니라 이것이 바로 아버지 하나님께서 구원받은 하나님의 자녀들이 모두 거치기를 원하는 죽음이라는 통과의례의 형태는 아닐까요? 하나님께서 우리가 질병으로 고통 받기를 원치 않으신다는 것은 너무나 명백한 사실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직간접적인죄의 영향 아래에서 질병의 문제로 신음하는 하나님의 자녀들을 구원하시기 위해, 예수님이 이미 우리의 모든 연약함과 질병의 문제를 해결하신 것입니다. 그렇게 해 주시고는 모든 하나님의 자녀들이 본향으로 돌아갈 때까지 흠 없이 영·혼·육을 보전하기를 원하시고 계십니다.

 

평강의 하나님이 친히 너희를 온전히 거룩하게 하시고 또 너희의 온 영과 혼과 몸이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강림하실 때에 흠 없게 보전되기를 원하노라 살전5:23

 

 

하나님은 우리의 영·혼·육 모두를 동등하게 여기십니다. 또한 인간은 전인적이며 통전적 존재이기 때문에, 영·혼·육이 서로 연관되어 있으며 서로 영향을 주고받고 있다는 것도 현대 과학이 분명하게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과연 그렇게 생각하고 살고 있는지요? 전인적 인간으로서의 강건함을 회복하고 유지하기 위한 전략적 접근 방법에는 당연히 영혼의 치유(영혼구원, 구원 후 병든 영혼의 회복), 내적치유(상한 마음과 감정의 치유), 질병치유(육체적, 정신적 질병의 치유), 축사 혹은 축귀(deliverance: 악한 영으로부터의 자유에 관련된 치유) 뿐만 아니라, 질병이 생기지 않도록 강건함을 잘 유지해 나가는 전략도 포함되어야 하지 않을까요?

그런데 실제로 우리는 신앙생활을 해 나가며, 영혼의 강건함에 대해서는 열심을 내고 갈망하기도 하지만, 의외로 육신의 강건함에 대해서는 소홀한 경우가 적지 않습니다. 영혼의 강건함을 위해서는 새벽기도, 말씀묵상, 말씀암송 등은 빼먹지 않고 하려고 많은 노력을 기울이면서도, 육신의 강건함을 유지하는데 반드시 필요한 규칙적인 운동이나 충분한 수면, 좋은 먹거리 선택 등에는 소홀해지는 경향 같은 것을 예로 들 수 있습니다. 그리고 어떤 경우에는 육신에 관심을 갖는 것을 별로 거룩하지 않게 여기는 경향도 종종 볼 수 있습니다. 제 경우에도 이런 경향이 있어서 신앙서적이나 CD 등을 구입하는 데는 전혀 망설임이 없지만,건강한 음식이나 건강보조식품 등에는 관심을 가지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그런 것에 신경을 쓰는 것은 낭비라는 생각을 하기도 했었습니다. 육신의 강건함이란 그냥 영혼이 건강하면 저절로 따라오는 것이니 그리 신경을 쓸 대상이 아니라고도 생각했었습니다.

그런데 생각해 보니 이런 생각을 갖게 된 배경에도 이원론적 사고방식이 교묘하게 숨어있음을 깨닫게 됩니다. 즉, 영혼은 거룩하고 육신은 세속적이라는 생각으로 바라보기 때문에 그렇게 생각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는 앞서 말한 바와 같이 하나님은 우리의 영·혼·육 모두를 동등하게 여기신다는 것과, 인간은 전인적이며 통전적 존재이기 때문에, 영·혼·육이 서로 연관되어 있다는 것을 알지 못하기 때문에 하게 되는 생각입니다. 이런 잘못된 생각을 바탕으로 마귀는 우리를 미혹합니다. 이런 미혹에 넘어가게 되면 육신을 소홀히 여기게 되고, 육신이 강건함을 잃게 되면 자연스럽게 영과 혼도 정상적으로 작동이 어려워지는 상태가 되는 것이며, 그럴 때 우리의 영·혼·육은 정상적으로 기능할 수 없게 됩니다.

여러분은 예수님 안에서 여러분 자신을 무어라고 규정하고 계십니까? 하나님의 자녀, 의인, 제자 등 참 많은 표현이 가능할 것입니다. 언젠가 청년들을 대상으로 예수님 안에서의 자신의 모습을 그림으로 그려보라고 한 적이 있었습니다. 참으로 다양한 모습으로 자신들을 표현하였는데, 가장 많이 나온 그림이 사랑받는 자녀의 모습이었습니다.드물게 예수님의 신부로 자신을 표현한 경우도 있었습니다. 그런데 반드시 기억해야 할 정체성임에도 불구하고, 단 한 명도 그리지 않은 모습이 있었는데, 그것은 바로 군사의 모습이었습니다.

 

네가 그리스도 예수의 좋은 군사로 나와 함께 고난을 받을찌니 군사로 다니는 자는
자기 생활에 얽매이는 자가 하나도 없나니 이는 군사로 모집한 자를 기쁘게 하려 함이라 딤후2:3-4

 

 

그러나 에바브로디도를 너희에게 보내는 것이 필요한 줄로 생각하노니 그는 나의 형제요
함께 수고하고 함께 군사 된 자요 너희 사자로 내가 쓸 것을 돕는 자라 빌2:25

 

 

우리가 아무리 스스로를 군사로 규정하고 싶지 않아도, 그래서 전쟁에 끼어들지 않으려고 무기를 들지 않아도 우리는 이미 전쟁 상황 하에 있습니다. 내가 아무리 군사가 아니라고 주장해도 적들은 이미 내가 예수님 군대의 군사라는 것을 알고 있을 뿐만 아니라, 나에게서 틈이 보이면 그것을 놓치지 않고 바로 공격해 옵니다. 그리고는 그냥 전투를 못 할 정도로 부상을 입혀서 나를 무기력하게 만들고 끝나는 것이 아니라, 아예 파멸을 시키려고 달려듭니다. 더 난감한 것은 내가 원하든 아니든 상관없이 성경은 우리가 이미 군사인 것을 분명하게 말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냥 진리만을 좇는 학자의 모습은 오히려 등이 굽고 병약해 보이는 것이 자연스러울 수도 있습니다. 제사장은 거룩하게 보이면 그걸로 충분하다고 느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군사의 경우는 어때야 합니까? 군사는 그야말로 안팎으로 용맹해야 합니다. 신체 조건부터 달라야 합니다. 무기를 잘 다룰 수 있을 만큼의 굵은 팔뚝과, 산을 몇 개씩 오르내릴 수 있는 굵은 허벅지가 기본입니다.

군사는 전투가 없을 때에도 전투에 대비해 자신을 혹독하게 훈련해서 단련시킵니다. 그래야 전투에서 제대로 싸울 수 있기 때문입니다. “건강한 육체에 건강한 정신이 깃든다”는 표어가 있습니다. 이것은 결코 과장이나 거짓이 아닙니다. 오히려 인간의 통전적 특성에 대해서 정확하게 이야기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어떤 군사가 육체 단련은 전혀 하지 않고 책만 열심히 보고 있다면, 여러분은 무어라 하시겠습니까? 그렇습니다. 그것은 바로 직무유기입니다. 근무태만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지금 성실하게 자신의 직책에 맞는 준비를 하고 있습니까? 적어도 저는 직무유기를 하고 있었고, 근무를 태만히 하고 있는 사람이었습니다. 육체를 단련시키지 않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육신의 건강을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뿐만 아니라 매일 먹고 마시는 것, 즉 내 육신을 유지하는데 필수적인 음식물에 대해서 거의 관심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렇다고 음식을 잘 먹지 않았다는 뜻은 아닙니다. 오히려 그 반대입니다. 너무 많이 먹었습니다. 그저 눈에 보이는 대로 손에 잡히는 대로 마음이 가는대로 먹고 마셨습니다.

또 어떤 군사가 훈련은 나름대로 열심히 하는데, 몸을 상하게 하는 독을 계속 마시고 있다면, 여러분은 무어라 하시겠습니까? 당장 그것을 먹지 말라고 하실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것 역시 군사로서 옳지 않은 행동이기 때문입니다. 군사는 전투에서 최상의 전투력을 발휘할 수 있도록 늘 자신을 최상의 상태로 유지하여야 하는데, 독을 마셔서 자신을 해치고 있다면 그것은 군사로서는 결코 용납될 수 없는 행동이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이제 우리의 삶을 돌아보십시다, 우리는 예수님 군대의 군사로서 합당한 삶을 살고 있습니까? 군사로서의 최상의 컨디션을 유지하기 위해 정신적으로도 무장하고, 육체적으로도 최상의 컨디션을 유지하고 있습니까? 적어도 제 경우에는 전혀 그렇지 않았습니다. 정신적으로는 소위 말하는 말씀생활, 기도생활을 나름대로 규칙적으로 해 오고 있었지만, 육체적으로 좋은 컨디션을 유지하는 것에 대해서는 전혀 그렇지 못했습니다. 뭔가를 해야 하는 것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 때마다 떠오른 구절이 있었습니다.

 

살리는 것은 영이니 육은 무익하니라 내가 너희에게 이른 말은 영이요 생명이라 요6:63

 

 

육체의 연단은 약간의 유익이 있으나 경건은 범사에 유익하니 금생과 내생에 약속이 있느니라 딤전4:8

 

 

이 말씀들을 근거(?)로 육신에 신경 쓰는 것은 무익하거나, 유익하더라도 약간 그럴 뿐이라고 생각하며, 육신을 단련하는 일을 소홀히 하고 있었습니다. 이 말씀을 나의 게으름을 합리화하는 근거로 사용하려는 잘못된 생각을 내려놓고 보면, 이 말씀 어디에도 육신을 단련하지 않아도 된다는 뜻은 찾을 수 없음을 알게 됩니다.

 

너희는 너희가 하나님의 성전인 것과 하나님의 성령이 너희 안에 계시는 것을 알지 못하느냐
누구든지 하나님의 성전을 더럽히면 하나님이 그 사람을 멸하시리라 하나님의 성전은 거룩하니 너희도 그러하니라 고전3:16-17

 

 

육신을 단련하는 것이 유익하냐 그렇지 않느냐의 문제보다 훨씬 더 명확하게 하신 말씀이 있으니, 그것은 바로 우리가 하나님의 성전이며, 하나님의 성령이 우리 안에 계시다는 것, 그러므로 우리가 하나님의 성전인 우리를 더럽히지 말아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우리는 흔히 이 말씀을 금연, 금주 등 건강에 좋지 않은 것들을 금지하는 근거로 활용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 말씀 역시 지나치게 형이상학적으로만 이해하려고 하면 문제가 생깁니다. 예를 들어, 좋지 않은 것을 보고 듣고 생각하고 느끼는 것으로만 더러운 것을 한정하게 되면, 앞서 이야기한 것처럼 이원론적 오류에 빠지게 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영·혼·육으로 구분하여 보시지 않으신다면, 하나님의 성전이라는 개념에는 당연히 우리의 육신도 포함되는 것입니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우리를 사용하실 때, 우리의 영에 임하셔서 우리의 혼을 통치하시며 육을 움직여 이 땅에서 일하신다는 당연한 사실만 보더라도 분명히 그러합니다.

그런데 우리에게는 우리의 육신에 대해서는 자신도 모르게 홀대하는 경향이 있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것은 결코 성경적이지 않습니다. 강건하지 못한 육신으로는 제대로 하나님의 뜻을 이 땅에 펼칠 수 없습니다. 물론 하나님은 우리의 약함을 사용하시고, 육신적으로 온전하지 못하더라도 얼마든지 선한 일을 우리를 통해서 하실 수 있으십니다.

 

예수께서 길을 가실 때에 날 때부터 맹인 된 사람을 보신지라 제자들이 물어 이르되 랍비여 이 사람이 맹인으로 난 것이 누구의 죄로 인함이니이까
자기니이까 그의 부모니이까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이 사람이나 그 부모의 죄로 인한 것이 아니라
그에게서 하나님이 하시는 일을 나타내고자 하심이라 요9:1-3

 

 

그렇다면 이 말씀 속의 맹인은 이미 자신이 맹인이므로 자신의 육신을 아무렇게나 쓰면서 살아도 되는 것일까요? 결코 그렇지 않다는 것은 누구나 동의하실 것입니다. 지금의 형편대로 기쁨과 감사로 하나님이 하시는 일을 나타내기 위해 자신을 하나님께 드리고 더욱 거룩하고 경건하고 강건하게 살아야 하는 것입니다. 아니, 그렇게 노력을 해야 하는 것이 아니고, 우리 안에 성령님께서 거하시면 저절로 그렇게 될 수밖에 없습니다. 왜냐하면 그것이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거룩한 뜻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우리가 우리의 육신을 하나님의 성전이라는 시각에서 바라보지 않고, 내 물건 내가 마음대로 쓰는데 무슨 상관이냐, 내 옷 내가 자주 빨아서 입든, 더러운 대로 대충 입고 다니든 무슨 상관이냐 하고 지낸다면 이것은 무엇인가 크게 잘못 된 것입니다. 제가 이런 생각으로 살아왔던 이유 중 한 가지가 바로 앞서 말씀드린 이원론적 사고방식 때문이었습니다. 그런데 알고 보니 그것보다도 훨씬 더 강력한 묶임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것은 다름 아닌 중독이었습니다. 그런데 이 중독이 정말로 심각한 중독이었던 이유는 한 번도 그것을 중독이라고 생각해 본적도 없고, 그것이 중독이라고 말하지도 않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러므로 땅에 있는 지체를 죽이라 곧 음란과 부정과 사욕과 악한 정욕과 탐심이니 탐심은 우상 숭배니라
이것들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진노가 임하느니라 너희도 전에 그 가운데 살 때에는 그 가운데서 행하였으나
이제는 너희가 이 모든 것을 벗어 버리라 곧 분함과 노여움과 악의와 비방과 너희 입의 부끄러운 말이라
너희가 서로 거짓말을 하지 말라 옛 사람과 그 행위를 벗어 버리고 새 사람을 입었으니
이는 자기를 창조하신 이의 형상을 따라 지식에까지 새롭게 하심을 입은 자니라 골3:5-10

 

 

저는 식탐이 많은 사람입니다. 그래서 음식을 남기지 못합니다. 어떨 때는 다른 사람들이 남긴 것까지도 당겨 와서 먹기도 합니다. 소화력이 왕성하던 때는 그렇게 해도 별 문제가 되지 않았지만, 소화력이 그 때만 못해진 다음에는 과식으로 배탈이 나는 경우도 종종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런 저를 보고 뭐라 하는 사람들은 거의 없었습니다. 어릴 때는 음식 안 남기고 주는 대로 잘 먹는다고 칭찬을 받았고, 지금도 맛있게 다 잘 먹는 것을 보고 흐뭇한 눈길로 바라보는 분들이 대부분입니다. 그걸로 저를 비난하는 사람은 없었습니다. 그런데 그렇게 살다보니 몸무게가 불어나는 것을 막을 수가 없었고, 점차 아저씨의 형상을 충실히 갖추어가고 있었습니다. 그렇게 몸무게가 생애최고 기록을 매일 갱신해 나가던 어느 날, 문득 이렇게 살다가는 곧 성인병이 생길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래서 그 동안의 생각을 고쳐서 식습관에 대해서 좀 더 진지하게 고민을 해 보게 되었습니다. 그러다가 제가 니코틴 중독, 알코올 중독은 다 해결했지만, 그것보다 훨씬 더 은밀하고 심각한 중독에 묶여있다는 것을 발견하게 되었습니다. 조금 더 조사를 해 보니 그 중독에 대해서도 꽤 오래전부터 이야기가 되고는 있었으나, 그리 큰 관심을 끌지는 못했고 정신의학에서도 아직은 전혀 중독이라고 다루지 않는 중독, 바로 “탄수화물 중독” 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더 공부를 해 보니 제게서 나타나고 있는 여러 가지 식습관들이 탄수화물 중독이라는 관점에서 설명이 되는, 중독의 증상이었다는 것도 깨닫게 되었습니다. 제가 왜 설탕, 크림 등을 넣지 않은 커피보다는 설탕이 듬뿍 든 커피믹스(사실은 커피맛 설탕물이라고 하는 것이 정확한 이름이다. 왜냐하면 통상적으로 커피믹스의 배합비율은 설탕:크림:커피=50:30:20으로 설탕이 가장 많이 들었고, 커피가 가장 적게 들어있기 때문이다)를 그렇게 좋아하는지를, 라면과 자장면은 어째서 언제나 먹어도 그렇게 맛있는지를, 햇반은 스팸과 함께가 아니더라도 왜 그렇게 맛이 있어서 인류 최고의 발명품 중 하나라고까지 감탄을 하며 먹게 되는지, 왜 배가 고파지면 참지를 못하고 한밤중이라도 배를 채우고야 마는지를 깨닫게 되었습니다.

그 뿐 아니라 그런 잘못된 중독증상으로 인해 내 몸이 얼마나 축나고 있었는지에 대해서도 알게 되었습니다. 결국 제가 제 자신을 하나님이 거하시는 성전으로 여기고 이를 잘 보전하는 것을 못하도록 하는 것에 탄수화물 중독이라는 무서운 중독이 지대한 공헌을 하고 있었다는 것을, 그리고 그중독이 시간이 지나면서 점점 더 제 몸을 망가뜨려 나가서 결국 “모세의 죽음”을 누릴 수 없도록 한다는 것을, 경우에 따라서는 더 일찍 한창 피곤한 줄 모르고 하나님의 일을 이 땅에 이루어나가야 할 때부터 그런 일을 하지 못하도록 만들 수도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좀 더 조사를 해보니 다행스럽게도 이 탄수화물 중독에 대해서는 이미 많은 지식이 축적되어 있고, 이 중독으로부터 벗어났을 때 우리가 얻게 되는 유익에 대해서도 과학적 연구결과들이 나와 있을 뿐만 아니라, 이로부터 벗어날 수 있는 방법들도 여러 가지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앞으로 몇 번에 걸쳐 이 부분에 대해서 여러분들과 나누기를 원합니다. 자세한 이야기를 나누기 전에 먼저 여러분들께 권합니다. 아래 탄수화물 중독 자가진단 테스트를 해 보시고 여러분도 탄수화물 중독에 해당된다고 생각되시면, 9월호 『킹덤빌더』 매거진을 받으실 때까지 기다리지 마시고 오늘부터 당장 아래 몇 가지를 실천해 보십시오.

1. 단맛이 나는 음식물(음료, 간식 포함), 특히 커피믹스, 사탕, 청량음료 등을 끊는다.
2. 흰 쌀밥 대신 현미, 그것이 힘들면 최소한 잡곡으로라도 주식을 바꾸어서 흰 쌀밥의 섭취를 줄인다.
3. 밀가루 음식(빵, 국수 등)을 끊는다.

제가 이와 관련해서 장담할 수 있는 몇 가지가 있습니다. 첫째, 여러분들이 아래 테스트에서 탄수화물 중독이라고 판정이 되어도, 분명히 여러분들은 그 결과를 무시하며 여러 가지 이유를 들어가며, 심지어는 성경말씀을 인용해가며 그렇게까지 할 필요가 없다는 것을 스스로에게 이야기할 것입니다. 제가 이렇게까지 장담할 수 있는 것은 어떤 행위를 중단하지 않기 위해 온갖 방법을 동원하여 그 행위를 유지하려고 하는 것이 바로 중독의 증상이기 때문입니다. 둘째, 만약 여러분이 자신이 탄수화물 중독자임을 인정하고 그로부터 벗어나기로 결단하여 위에 제시한 3가지 원칙만 지킨다면, 9월호 『킹덤빌더』 매거진을 받아보시기 전에 여러분의 체중은 최소 3㎏ 줄어 있을 겁니다. 왜냐하면 탄수화물이 비만의 가장 큰 원인이기 때문입니다. 운동을 적게 하기 때문에 여러분이 뚱뚱한 것이 아니라, 탄수화물을 너무 많이 먹기 때문에 뚱뚱한 것입니다.

우리 모두가 앞으로 진행될 논의를 통해 살전5:23에서 말씀하신 것처럼, 우리의 온 영과 혼과 몸이 예수님께서 강림하실 때까지 흠 없게 보전되어, 예수님의 군사로서의 역할을 충실하게 해내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기를 기도하며 이 글을 마칩니다.

 

 


탄수화물 중독 자가진단 테스트 (고대안산병원 제공)

1. 아침 먹은 날 오히려 배고프다.
2. 단맛 나는 후식을 즐긴다.
3. 스트레스를 받으면 먹고 싶다.
4. 식사 후 졸리고 나른하다.
5. 주 3회 이상 밀가루 음식을 먹는다.
6. 잡곡밥보다는 흰 쌀밥이 좋다.
7. 작은 일에도 짜증이 난다.
8. 가족 중에 비만인 사람이 있다.
9. 습관적으로 야식을 먹는다.
10. 배불리 먹어도 금방 배고프다.

8개 이상에 해당하면 중독, 5~7개는 중독 위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