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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강
강박성 인격장애(Obsessive-compulsive personality disorder) 그리고 완벽주의(Perfectionism) II
한양의대 교수 김석현
지난 한 달 동안‘지나치게 양심적이거나 가치관 혹은 도덕적 기준에 대한 융통성이 결여되어 있다’ 는 표현에 대해 생각해 보셨지요? 이와 관련한 논의의 핵심을 한 단어로 표현한다면 어떤 단어가 가장 적절할까요? 제 생각에는“기준”이라는 말이 가장 적절한 것 같습니다.
예수님을 영접하고 성령님이 내주하시기 시작하면 대부분의 사람들이 처음으로 겪게 되는 변화가바로 이“기준”에 대한 것인 것 같습니다. 제 경우를 보아도 그렇습니다. 구원받기 전에 저는 제가 어떤 사안을 판단할 수 있는 기준을 가지고 있다고 생각하였습니다. 그런데 구원받고 나서 보는 눈이열리자, 제게는 아주 하찮은 것에 대한 판단을 내릴 수 있는 기준조차도 없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그동안 제가 기준이라고“착각”하고 있었던 것은 기준이 아니라 제 취향 또는 경향이었다는 것,제 경험에서 만들어진, 그것도 상황에 따라 늘 변하는 그런 상대적이고도 주관적인 잣대였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다시 말해 분명한 경계를 가져야 하는 어떤 명제에 대해, 제 자신은 분명한 경계를 가지고 있다고 생각하였으나, 그것이 구분 가능한 경계로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구분이 불가능한 중간지대를 포함하는 영역을 그렇게 생각했던 것이라는 것을 알게 된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이런 문제는 저 뿐만아니라 하나님의 시각을 갖지 못한 채 세상 신에게 미혹되어 사는 사람들에게 공통적으로 나타나는 현상인 것 같습니다. 그리고 세상은 그런 명확한 기준을 갖는 것에 대해 못마땅해 합니다. 이런 현상은 포스트모더니즘 시대로 접어들면서 더욱 강화되는 경향을 보이고 있습니다.
이런 세상에서 살면서 기준과 관련하여 많이 듣게 되는 이야기들이 “흑백논리”, “이분법적 사고”, “경직성”, “폐쇄성”, “독선”등의 용어들입니다. 그래서 어떤 사람이 타협할 수 없는 분명한 기준을 가지고 살아가면 그 사람을 보고 융통성이 없다거나 보수적이라거나 다양성을 인정하지 않는다는 등의 평가를 내립니다. 그러다보니 크리스천들도 폐쇄적이고 독선적이라는 비판에 움찔하게 되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러나 조금만 생각해 보면 그런 주장들이 유연성이나 포용성 등을 이야기하는 것 같지만 본질적으로는 어떤 경계를 무너뜨리는 것 이외에는아무것도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예를 들어, “선정적”이라는 단어를 생각해 보십시다. 어떤 사람이 어떤 노래를 듣고 가사가“선정적”이라고 이야기할 때 그 사람은 그 가사가 어떻다는의미로 그런 말을 한 것일까요? 좋다는 뜻입니까? 나쁘다는 뜻입니까? 미성년자가 들어도 된다는 뜻입니까? 들으면 안 된다는 뜻입니까? 성년이 된 사람들에게도 문제가 된다는 뜻입니까? 어른들에게는 아무 문제가 되지 않는다는 뜻입니까? 여기에“지나치게”라는 부사가 붙게 되면 그의미는 더욱 모호해집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그것이 일종의 기준이 된다고 받아들이게 되는 것입니다.
크리스천은 하나님의 말씀을 진리로 믿는 사람들입니다. 하나님의 기준이 절대불변의 기준이라고 믿는 사람들입니다. 하나님의 기준은 상대적이지 않습니다. 그리고 애매모호하지 않습니다. 분명합니다. 1+1은 2일뿐, 1+1이 2 또는 3, 심지어는 1.999라거나 2.001도 될 수 없습니다. 마찬가지로 ‘거의 믿는다’거나‘약간 안 믿는다’, ‘의인이 거의 다 되었다’거나‘아직은 약간 죄인이다’라는 말은 있을 수 없습니다. ‘지나치게 악하다’거나‘약간 선하다’등의 표현은 말이 안 됩니다. ‘거의 순종’할 수도 없고‘약간 불순종’할수도 없습니다. 그래서 크리스천의 삶은 늘 분명한 기준 속에서 진행되는 것입니다.
세상은 분명한 경계를 싫어합니다. 회색지대를 만들어서 빛도 아니고 어둠도 아닌 곳에서 지내기를 부추깁니다. 소수자라는 표현을 흔히 듣게됩니다. 어떤 특정한 면을 가진 사람들이 전체 인구에 비해 매우 적을 때는 그 적은 숫자로 인해보호를 받아야 한다는 의미입니다. 그러나 전체인구의 어느 비율 이하로 존재할 때 소수자인지,어느 정도 비율 이상으로 늘어나면 소수자로 인정할 수 없는지에 대해서는 답을 하지 못합니다. 그런데 세상은 그것이 기준이 된다고 믿도록 만들고, 보는 눈이 없는 사람들은 그것에 동의할 수밖에 없습니다.
이런 경향은 오늘 우리가 이야기하려는 강박성 인격장애의 진단 기준에서도 드러납니다. ‘지나치게 양심적’이라는 말은‘적당히 양심적’이라는 기준이 존재한다는 것을 전제로 합니다. 즉‘지나치게 양심적’이지 않다는 것에 대한 정의가 가능하다는 뜻입니다. 그런데 아무리 생각해도‘적당히 양심적’이라는 것이 어떤 상태를 이르는 말인지 알 수가 없습니다. ‘적당히 양심적’이라는 기준을 제시할 수 없다면 그것은‘지나치게 양심적’이라는 기준도 제시할 수 없다는 말이 됩니다. 마찬가지로‘가치관 혹은 도덕적 기준에 대한 융통성’또한 그것이 어떤 것인지 분명히 정의하기가 어렵습니다. 기준이란 움직이지 않을때만 기준으로서의 기능을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기준이 융통성을 갖게 된다면 그것은 이미 기준이 아닐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저는 이 글에서 정신의학 무용론을 이야기하거나 정신과 진단의 오류를 말하고자 하는 것이 아닙니다. 오해 없으시기 바랍니다. 정신의학도 의학의 한 분야로서 분명히 사람들의 건강에 기여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위에서 지적한 문제를 안고 있는 기준이지만, 그것만으로도 복잡하게 얽힌 타락한 인간의 심리적 문제를 어느 정도 정리해 주는 역할은 분명히 할 수 있습니다. 이 글에서 이야기하고 싶은 것은 진리를 모르거나 진리를 인정하려 하지 않는 사람들 안에서 일어나는현상과, 이것이 크리스천의 삶에서 어떻게 제대로 정리되어야 하는지에 대한 것입니다. 좀 더 논의를 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가치관 혹은 도덕적 기준’이 융통성을 갖는다는 것은 이미 그 기준이 진리 위에 기반을 둔 기준이 아니라는 것을 전제로 하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1+1이 2가 되는 것에는 어떤 융통성도 발휘될 여지가 없기 때문입니다. 그렇기 때문에‘기준에 대한 융통성’이 가능하다고 생각하는 것은첫째, 그 기준이 진리가 아니라는 것을, 상황이나 대상에 따라서 변화가 가능하다는 것을 전제로 하고 있거나, 둘째, 원래 기준이라는 것이 융통성을 발휘할 수도 있는 명제라고 생각하는 것중 한 가지의 태도를 취하기 때문인 것 같습니다.그러니 엄밀하게 따지면 이미 이렇게 생각하는사람들은 절대불변의‘진리’라는 것에 대해 별로흥미가 없다고도 표현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융통성이 건강하다고 생각할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강박성 인격장애 환자로 진단을 받을수 있는 사람들은 왜 자신이 지나치게 집착하는 특징을 가지고 있다고 생각하지 않을까요? 왜 다른 사람들이 완벽함을 고집해서 일이 진행이 잘안 된다고 해도 완벽함에 집착할까요? 전반적으로 인색하고 매달리는 경향이 있다고 지적을 받아도 그렇게 사는 것이 인생을 성실하게 사는 것아니냐고 항변할까요? 그 이유는 마찬가지로 이분들도 자신만의 상대적이고 주관적인 기준을 가지고 자신을 평가하기 때문입니다. 다른 사람들의 기준이 실제로 도달해야 하는 수준에 미달한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 분들도 어느 정도 되어야 일이 완벽하게 되었다고 할 수 있느냐 라든가, 어느 정도가 집착이 아니라 건강한 성실함이냐에 대해서 답을 가지고 있지 못하기는 마찬가지입니다.
그래서 강박성 인격장애 환자를 보고 지나치다고 말하는 사람이나, 자신을 보고 지나치다고 말하는 사람들을 불성실하다고 생각하는 강박성 인격장애 환자들이나 똑같은 오류를 범하고 있는것입니다. 이런 일이 우리 삶에서 얼마나 자주 일어나고 있는지 한번 돌아봅시다. 진리 또는 본질이라고 이야기할 수 있는 것들을 우리가 가지고 있는지요? 어떤 사람은 인간이 선한 본질을 가지고 있다고 하고, 어떤 사람은 인간이 악한 본질을 가지고 있다고 합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둘 다를 기억해 두었다가 상황에 따라서 “역시 인간은 악해!”라기도 하고“역시 인간은 선해!”라고 말하기도 합니다. 그래서 어떤 사람의 죄에 대해서는 관대하고 포용적으로 바라보고, 어떤 사람의 죄에 대해서는 모질고 비판적으로 바라보게 됩니다. 똑같이 받아서는 안 되는 돈을 받아도 어느정도 금액이 되면 그냥 넘어갈 수 있고, 어느 정도 금액이 되면 죄가 되기도 합니다. 그리고 그금액은 사안에 따라서 또 다 달라집니다.
이런 상대적이고 가변적인 기준에 젖어 살다보니 크리스천들도 큰 죄가 있고 작은 죄가 있다고 생각하기 쉽습니다. 하나님께서 주신 계명을 거의 지킬 수는 없습니다. 다 지키거나 아니면 못지킨 것 둘 중의 한 경우만이 있을 뿐입니다. 받으면 안 되는 돈을 받으면 받은 것이고 안 받으면안 받은 것입니다. 그런데 그렇게 생각하기 때문에 예수님께서 용서해 주실 수 있는 죄가 있고,용서하시기 에는 너무나 큰 죄가 있다고 자기도모르는 사이에 생각하게 됩니다. 죄는 죄일 뿐입니다. 예수님께서 우리 죄를 사하셨으면 죄는 다 사해진 것입니다.
이러한 기준은 우리가 우리 자신을 바라보는 관점에까지 파고들어 있습니다. 그러다보니 “당신은 죄인입니까? 아니면 의인입니까?”라고 물으면 많은 크리스천들이 “아직은 죄인이지만 의인이 되어가고 있는 사람”이라든가 “많이 의로워진죄인”이라고 답합니다. 죄인은 죄인이고 의인은 의인입니다. 죄인이면서 동시에 의인일 수는 없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우리 스스로를“죄의 유혹에 넘어질 수 있는 의인”이라고 분명하게 정의하는 것이 너무나 중요한 것입니다. 죄인이냐 의인이냐는 칼로 벤 것 같이 분명한 경계로 나누어지는 것이지, 죄인이기도 하고 의인이기도 한 어중간한 중간지대를 가지고 있는 명제가 아닙니다. 진리는 결코 상대적이거나 가변적일 수 없습니다. 만약 내가 진리라고 알고 있는 것을 상대적이고 가변적으로 적용하고 있다면 다시 한 번진리인 하나님의 말씀 위에 굳건히 서도록 성령님의 계시와 지혜를 구해야 합니다.
다시 한 번 말씀드리지만 세상은 명확한 경계를 싫어합니다. 그런 경계를 갖지 못하도록 최선을 다해 방해합니다. 왜냐하면 모호한 경계를 가진자는 어디로 가야할 바를 알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크리스천은 절대불변의 진리 위에서 분명한푯대를 향해 나아가는 자들입니다. 그런데 그 길에 푯대만 보이면 그 길이 어렵지 않겠지만, 그푯대를 놓쳐버리도록 가리거나 또는 다른 것을푯대라고 하여 잘못 길을 가도록 만드는 것들이 얼마나 많은지는 우리가 너무나 잘 알고 있습니다. 이런 길에서 방향을 잃지 않는 것은 푯대를향한 올바른 방향에 대한 정확한 기준을 가지고있을 때만 가능합니다.
또한 모호한 경계를 가진 자는 무엇을 해야 할바를 알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어떤 법을 만들면 그 법으로 이익을 얻는 것처럼 보이는 사람과그 법으로 인해 손해를 보게 되는 것처럼 보이는사람들의 각각의 입장이 있습니다. 양쪽 이야기를 자세히 들어보십시오. 들으면 들을수록 어느쪽의 손을 들어주어야 할지 알 수 없습니다. 그러나 진리인 하나님의 말씀 위에 굳건히 서서 바라보면 그 모든 미혹과 혼돈 속에서 무엇이 옳은지 볼 수 있게 되고, 그 일이 그 방향으로 일어나도록 집중력을 발휘할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너희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도록 하라 롬12:2
다음 호에서는 완벽주의에 대해서 이야기를 나누어보도록 하겠습니다. 이번 한 달 동안 나는내 삶에 대해 어느 정도의 완벽을 기하고 있는가? 나는 왜 그 정도의 완벽을 기하고 있는가?그것이 하나님 안에서 나를 어떻게 규정하고 있는가에 대해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