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INGDOM LIFE &
힐링시네마
스핏파이어 그릴
작가 이애경
작은 산골 베들레헴의 초라한 말구유에서 태어나 고향 사람들에게 조롱과 배척을 받으신 예수님은 예정대로 십자가에서 죽음을 택하셨다. 예수님의 죽음 이후에야 우리는 그분이 진정 하나님의 아들이었으며 우리를 구원하기 위해 오신 구세주라는것을 깨달았다. 인생을 살다보면 사람이든 상황이든 그것을 잃은 후에야 내게 보내진 귀한 선물이었다는 것을 깨닫는 순간이 온다. 영화 <스핏파이어 그릴>은 아는 척 하지만 사실 아무것도 알지 못하는 인간의 무지함, 그 속에서 파생되는 실수,그것을 덮어주는 놀라운 은혜, 그리고 그 과정에서 일어나는 아름다운 치유를 잘 표현해낸 영화다.
미국 메인 주의 아름다운 자연과 숲을 환상적으로 묘사하며이곳으로 여행을 오라고 설명하는 앳되고 예쁜 여성 텔레마케터. 그러나 그녀는 정작 그곳에 한 번도 가본 적이 없다.현재 감옥에 수감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녀가 설명하던 장소들은 모두 벽에 붙어있는 사진 속 풍경이다. 거짓말로 사람을그만 좀 유혹하라는 동료 여죄수의 농담 섞인 말에‘때로는거짓말이 삶에서 필요하다’고 되받아치는 여주인공 퍼시(엘리슨 엘리오트)는 5년 뒤 가석방된다.
퍼시가 출소 후 발걸음을 옮긴 곳은 길리아드라는 작은 마을이다. 그녀는 감옥 보호관에게 소개받은 보안관 게리를 찾아가고 그는 그녀가 일하면서 지낼 수 있는 곳으로 데려다준다.그곳은 스핏파이어 그릴이라고 불리는 마을 레스토랑. 스핏파이어는 전투기의 이름에서 따온 이름으로 한나(엘렌 버스틴)라는 미망인이 운영하고 있다. 퍼시가 도착한 날부터 동네는‘새로운 인물’의 등장에 수군거리기 시작한다. 너무도 작은 마을이라 동네 주민들은 거의 서로의 일거수일투족을 알정도로 가깝기 때문에 새로운 인물의 등장은 그들에게는 빅뉴스일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모든 것이 의혹투성이인 그녀에 대한 곱지 못한 시선은 그녀의 주변을 맴돌기 시작한다.
스핏파이어 그릴의 주인 한나에게는 부동산 중개업자로 일하고 있는 나훔(윌 패튼)이라는 조카가 있다. 그는 퍼시가 온날부터 의심의 눈초리를 던지며 그녀를 못마땅해 한다. 한나가 사고로 다리를 다치자 그는 퍼시를 의심하는 등 그녀에게 대립각을 세운다. 결국 레스토랑 일을 할 수 없게 된 한나를 대신해 자기 부인 셀비(마르시아 게이 하든)를 보내 그곳에서 일하라고 강요하며 퍼시 곁에 둔다.
그러나 한나는 조카의 말을 듣지 않고 퍼시에게 레스토랑을 맡긴다. 하지만 그녀의 요리 실력은 형편없어 동네 사람들을 곤경에 빠뜨린다. 결국 레스토랑에 오게 된 셀비와 퍼시는 처음에는 데면데면 하지만 요리 때문에 어쩔 줄 몰라 하던 퍼시를 셀비가 돕기 시작하면서 서로 마음을 열기 시작한다. 이둘의 환상적인 조합으로 레스토랑은 이내 안정을 되찾는다. 그러던 중 퍼시는 한나가 레스토랑을 팔려고 내놓은 지 10년이 되었지만 아직 팔지 못했다는 이야기를 전해 듣는다. 그녀는 감옥에 있을 당시 에세이 테스트를 열어 모텔을 팔았던 경험을 이야기하며, 1등에 당첨되는 사람에게 레스토랑을 넘겨준다는 조건을 걸고 에세이 콘테스트를 해볼 것을 권유한다. 100달러의 신청비를 받는 에세이 콘테스트 신청자들에게 들어온 돈을 모아 주인인 한나가 갖고 당선자에게 레스토랑을 넘겨주는 획기적인 아이디어였다. 아이디어는 전국을 떠들썩하게 하고 신청자는 몰려든다. 콘테스트를 기획했던 퍼시와 셀비, 그리고 한나는 기쁨의 탄성을 지른다. 그러나 에세이 콘테스트가 마무리 될 무렵 금고에 모아두었던 수십만 달러의 돈과 퍼시가 함께 사라지고 사람들은 모두 퍼시를 의심하기 시작한다.
우리들의 모습이 투영된 상처받은 사람들의 이야기
이 영화에 등장하는 주인공들은 모두상처받은 사람들이다. 마치 현실 속에서 상처받은 채 살아가는 우리들의 모습을 적나라하게 드러내는 것처럼 말이다. 퍼시가 교도소에서 복역을 한 죄목은 살인죄이다. 퍼시가 살인을 했다는것을 알게 된 나훔은 더욱더 퍼시가 이마을에 온 이유를 의심하며 마을에서 내쫓으려고 한다. 나중에 밝혀지지만 퍼시는 양아버지에게 강간을 당해 임신을 하고 그 상태에서도 계속해서 폭행을 당했던 가여운 여자다. 그 과정에서 양아버지를 살해했다. 이 가슴 아픈 이야기는 그녀의 단짝 친구가 된 셀비만이 듣게 된다.
셀비 또한 남편인 나훔에게 언어적인폭력으로 시달리며 안타까운 삶을 살아가는 여성이다. 그녀는 남편으로부터 ‘셔츠를 왜 빨아놓지 않았느냐’는 호통에서 부터‘멍청하다’는 표현을 듣는 등 인격적인 모독을 받고 가슴앓이를 하며 살아간다. 스핏파이어 그릴의 주인 한나는 베트남전으로 아들을 잃은 상처를 갖고 있다.그녀의 아들 일라이는 동네의 영웅이었고, 자원해서 베트남으로 떠났지만 전쟁이 끝나고 그가 돌아왔는지를 아는사람은 아무도 없다. 동네 사람들 모두가 서로에게 묻지도 못하고 그저 막연하게 실종되거나 죽었다고 에둘러 생각하고 말 따름이다. 그 누구도 그녀의상처를 건드리고 싶지도, 죽음을 못 박고 싶지도 않았기 때문이다. 그녀 또한 마음을 쉽게 열지 않고 쉽지 않은 사람으로 지낸다. ‘성마른 여자’를 뜻하는 스핏파이어(spitfire)가 괜히 레스토랑의 이름이 된 건 아니다.
넷의 관계 속에서 언제나 긴장을 조성하는 한나의 조카 나훔도 예외는 아니다. 그는 어렸을 때부터 일라이와 비교를 당하며 살아온 아픔을 갖고 있다. 나훔의 성격이 독선적이고 이기적으로 변한 데는 일라이와의 관계에서 얻은 열등감도 한 몫을 했다. 키도 훤칠하고 모든 것에 뛰어나던 일라이가 동네의 영웅이었기 때문에 반대로 그는 소외되고 열등한 사람이라고 느끼며 자라난 불운한 인생이다.
상처를 안고 사는 이 네 명의 인물들이한 조그마한 동네에 얽혀 살게 되면서 영화는 이들이 감추고 살아가던 상처들이 어떻게 드러나고 어떤 상황들을 통해 아픔이 건드려지고 치유되는지 보여준다. 한나는 자신이 잃은 아들 일라이 -하지만 실제는 폐인이 되어 집근처 산속에서 숨어사는- 와 만나려고 시도하지만 아들은 그녀에게 한걸음도 다가서지 못하게 한다. 그녀가 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오직 자루에다가 캔 음식을 담아 마당에다 내어놓는 일. 일라이는 밤이 되면 산에서 내려와 음식을 가지고 간다.
세상과 단절한 일라이에게 조금씩 다가가는 기회를 얻는 건 퍼시다. 다리를 다친 한나를 대신해 마당에다 자루를 내어놓는 일을 맡아하던 그녀는 그것이 누군가를 위한 음식이라는 것을 알고 조금씩 뒤를 쫓기 시작한다. 그리고 어느 날 퍼시는 음식을 가지러 왔다가 인기척을 느끼고 도망가는 그에게 “다른음식을 먹고 싶지 않냐”고, “다른 음식을 넣어주겠다”고 소리친다. 그리고 그녀는 누군지도 모르는 산속의 그에게 ‘자니 비’라는 이름을 지어준다.
벽을 허물고, 내 안으로 초대하기
강간, 살해 등 엄청난 과거와 상처를안고 있는 퍼시에 비해 사실 실질적으로 가장 큰 벽을 쌓고있는 것은 스핏파이어 그릴의 주인인 한나다. 퍼시는 자기를 버린 세상에 대해 다소 냉소적인 반응을 갖고 있지만 과거를 숨기지않고 자의로든 타의로든 이야기해야하는 상황에는 말문을 닫지 않는다. 마음문이 굳게 닫혀있는 한나에게 자신처럼 아이를 잃은 아픔이 있냐고 되묻는가하면, 자신을 여자로 바라보기 시작한 마을의 한 남자에게 자기는 감옥에서 복역했다고 이야기한다. 그가 나중에 결혼하자고 고백하자 이제 아이를 갖지못한다고 솔직히 이야기하기도 한다.그녀의 방식은 깨끗한 영혼을 닮아 솔직하고 그래서 담대하다.
하지만 한나는 다르다. 의자에서 떨어져 다리를 다친 그녀에게 퍼시가 다가오려고 하자 가까이 오지 말라고 소리지른다. 그것은 세상에 대한 그녀의 벽을 상징하는 말이었다. 한나의 벽은 높았다. 마당에 캔 음식을 자루에 담아내어주는 일을 퍼시에게 시킬 때도 불안과 염려의 눈초리를 가득 안고 초조해 한다. 무언가 들키고 싶지 않은 비밀이 있는 사람처럼. 사람들이 숲속의 부랑자가 퍼시와 공범이 되어 함께 돈을 훔쳐갔다고 믿고 그를 쫓는 순간에도 그녀는 비밀을 털어놓지 못한다. 그산속 인물이 자기 아들이라고 죽이지말라고 고백하면 모든 일이 순조롭게 끝났을 지도 모르는데 말이다.
길리아드, 일라이, 치유의 숲
이 영화의 감독인 리 데이비드 즐로토프는 유태인이고 미국 남부 로마 카톨릭 재단이 영화 제작비를 일부 제공했다고 알려져 있다. 그 사실을 제외하고서라도 길리아드(Gilead)라는 마을의지명은 성경 속에 나온 길르앗(Gilead)를 뜻하는 것으로 보여지는 연관성이 영화 곳곳에 존재하며 기독교적인 색채를 띤다. 또한 한나의 아들 일라이는 영어로‘Eli’인데 이는 히브리어로 신을 뜻하는‘엘리’를 의미하는 것으로 봐서 영화에는 다분히 기독교적인 메시지가 숨어있다.
길르앗에는 유향이 있지 아니한가 그곳에는 의사가 있지 아니한가 딸 내 백성이 치료를 받지 못함은 어찌 됨인고 렘8:2
성경에서 길리아드는 요단강 동쪽에 있는 지역으로 치유나무로 불리는 합향나무가 자라는 곳으로 알려져 있다. 그리고 이 영화에서도 길리아드는 피난의 장소이자 치유가 일어나는 장소로 사용된다(숲에서 잘라낸 나무에서 자라나는어떤 물질로 약을 만들겠다며, 후에 이곳에 제약회사가 지어지기도 한다). 길리아드는 퍼시가 새로운 삶을 시작하기위해 피해온 곳이자 전쟁의 상흔을 안고 있는 한나의 아들 일라이가 숨어있는 곳이다. 또한 어떻게 보면 순박하기만 한 마을 주민들이 세상에 크게 영향받지 않고 살아가는 피난의 장소이기도하다.
또한 이 마을에 있는 신비하고 아름다운 숲에서는 영화의 주인공인 퍼시가 강한 치유를 경험하게 된다. 퍼시가 치유되는 과정은 순식간이라기 보다는 순차적이다. 자니 비와 형용할 수 없는 교감을 나누기 시작한 퍼시는 그가 은둔해 사는 곳으로 조금씩 가까이 인도되고 마침내 그가 사는 곳을 발견하게된다. 자니 비(일라이)가 그녀에게 자신의 영역을 공개하며 마음을 열기도 하지만, 그것은 퍼시에게도 완전한 치유로 한 발짝 나아가는데 중요한 역할을한다. 즉, 이 둘에게 숲은 각각의 치유가 행해지는 공간인 것이다. 영화의 명장면이자 강한 치유가 일어나는 아름다운 장면은 바로 이때 펼쳐진다. 자니비를 찾아 숲 속을 뒤지던 퍼시는 숲과나무들이 보이는 높은 언덕 쪽으로 올라가 언덕에 앉는다. 그리고 노래를 부르기 시작한다. 마치 자기의 아픔을 토로하는 것처럼.
“길리아드에는 묘약이 있어 상처를 낫게 해주죠. 길리아드에는 묘약이 있어마음을 치유해주죠.”
그 순간 퍼시는 누군가 그에게 다가오는 것을 느낀다. 직감적으로 그가 자니비라는 것을 느낀 그녀는 잠깐 멈칫하지만 뒤를 돌아보지 않고 계속해서 노래를 부른다. 그리고 영화의 가장 아름다운 장면이 펼쳐진다. 퍼시의 곁으로 다가온 자니 비가 퍼시의 머리에 조심스레 손을 얹는 것이다.
그것은 마치 예수님이 요단강에서 세례를 받으셨을 때“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라”고 하시며 머리 위에 성령이 비둘기 같이 임하셨던 광경을 연상하게 하는 장면이다. 구구절절한 이야기는 없지만 마음 속 아픔을 덤덤히 노래하는 그녀, 그리고 엘리(Eli:신)로 해석될 수 있는 일라이(자니비)가 마치 세례를 주듯 그녀의 머리에손을 얹는 장면. 일라이의 입장에서는 마음을 열고 세상으로 다가간 것이고, 퍼시의 입장에서는 그녀의 정체성이 회복되고 치유되었음을 보여주는 장면이다. 이 둘은 이렇게 아름다운 방식으로 치유가 된다.
영화에서 치유에 관한 메시지는 사실전반부에 한나와 퍼시의 이야기를 통해이끌어 내어진다. 다리를 다친 한나가 혼자 낑낑대며 연고를 바르다가 퍼시가 발라주겠다고 하자 겨우 다리를 내어주는 장면이 있다. 한나의 마음이 조금열린 것을 안 것일까? 이 때 퍼시는 “상처가 깊으면 치유될 때도 그만큼 많이 아프지 않을까요?”라고 말하며 영화의 복선이자 핵심을 이야기한다. 상처받은 모든 이들에게 치유는 그 상처를 입을 때만큼의 아픔을 동반한다는 사실을. 그리고 그것은 퍼시 자신의 죽음을 암시하는 것이기도 했다.
우리가 누군가를‘안다’는 것, 누군가 나를‘안다’는 것
누군가를 안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것일까. 안다는 것의 기준은 어느 정도일까. 이름을 아는 정도? 몇 번 밥을먹고 이야기를 나눈 이력이 있어 상대방의 성격과 지내온 삶의 이야기를 조금맛본정도? 몇십년을같이시간을보내 무슨 생각을 하는지 속속들이 알정도로 가까운 정도? 크리스천들에게 ‘안다’는 단어는 꽤 중요한 의미를 차지한다. ‘안다’, 즉 히브리어로 ‘야다’라는 것이 크리스천의 삶의 과정에서 강조되기 때문이다. 친밀함과 신뢰가 바탕이 되어 알지 않고는 결코 무언가를, 누구를 안다고 말할 수 없는 우리의 삶. 하나님과의 관계에서도 적용되는 이‘앎’에 대해 영화는 치열하게 파고든다.
퍼시와 함께 돈이 사라지자 나훔을 비롯한 동네 사람들은 퍼시를 범인으로 몰아간다. 순수하고 앳된 영혼의 진실을 알아주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셀비가‘퍼시는 절대 그럴 리 없다’고이야기 하지만 그것도 허공에 외치는 메아리에 불과할 뿐이다. 이쯤에서 영화를 보는 사람들도 과연 퍼시가 돈을 훔쳐갔을까 아닐까 하는 질문을 스스로에게 던지게 된다. 지금껏 보아온, ‘알아온’ 그녀를 계산하고 잣대로 재며 가능성을 타진해보는 것이다. 우리는 과연 그녀를 ‘알고’있었을까?
어떻게 보면 누구도 퍼시를 잘 아는 사람은 없었다. 그녀를 있는 그대로 받아주는 사람이 없었기 때문이다. 이미 ‘살인자’라는 죄명이 주홍글씨처럼 그녀에게 낙인찍혀 있었고 그래서 그녀의 행동은 동기를 의심받았다. 이런 의심은 어떻게 보면 사람들의 입장에서 보면 정당할 수도, 이해될 수도 있는 의심이다. 하지만 그녀를 정말 잘 ‘알았다면’, 그녀가 왜 살인자가 되었는지 그녀에게 어떤 이야기가 있는지를 ‘알았다면’마을에서의 퍼시의 삶은 달라졌을 수도 있다.
하지만 결국 도둑으로 몰린 퍼시는 죽음에 이르게 되고 후에 이 모든 내용을, 그녀에 대해 ‘알게’된 동네 사람들은 비통함에 빠진다. 그리고 장례식장에서 나훔은 퍼시를 추모하는 이야기를하는 자리에 나아가 이렇게 고백한다.그는 그녀를 안다고 생각했지만, 그녀를 몰랐다고. 그녀를 잘 안다고 생각했지만 그녀를 전혀 몰랐던 것이라고.
마을에 들어오는 날부터 의심의 눈초리를 받으며 살았던 퍼시는 새로운 삶이있을 것이라고 생각하고 고군분투하고 열심히 노력했지만 인생은 녹록하지가 않았다. 하지만 그녀는 자기의 자리에서 열심히 일하고 최선을 다했다. 그녀는 진짜 그녀를 알리고 싶었지만 세상은 그녀를 알아주지 않았다. 그녀를 알아가기엔 다른 사람들에게 상처와 두려움이 존재했기 때문이다. 그 두려움들은 알게 모르게 퍼시를 밀어내었고 그래서 그녀는 그 마을에서 살면서 큰 위로를 받지 못했다.
결국 마치 예수님이 가셨던 길을 재현하듯, 자니 비를 위해 그녀의 삶을 아낌없이 버린 퍼시. 그녀의 희생으로 자니 비(일라이)는 세상과 화해하고 은둔하던 숲에서 나와 사랑하는 사람들이있는 마을로, 가족에게로 돌아간다. 한사람의 희생으로 구원이 이루어지는 장면이다.
이 영화의 마지막 즈음 마음이 숙연해지는 건, 한 사람의 죽음을 통한 구원과 화해, 그리고 세상을 향한 하나님의 사랑을 고스란히 담고 있는 예수님의 이야기를 보는 듯해서 만은 아닌 것 같다. 그건 어쩌면 내가 다른 사람들에게 갖고 있는 편견이나 혹은 다른 사람들이 내게 갖고 있는 편견들로부터 자유롭지 못한 채 살고 있는, 어쩌면 마음한 구석에 퍼시처럼 상처받은 채 이해되지 못한 채 살아가고 있는 우리들의 삶에 대해 자꾸만 돌아보게 되기 때문은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