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ome 킹덤라이프 킹덤라이프 Birthing & Building 두려움과 고통을 넘어 은혜와 감사로 I
두려움과 고통을 넘어 은혜와 감사로 I

두려움과 고통을 넘어 은혜와 감사로 I

332
0

Birthing & Building
두려움과 고통을 넘어 은혜와 감사로 Ⅱ

 

산부인과 전문의 메디플라워 산부인과·자연출산센터 원장 정환욱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것은 두려워하는 마음이 아니요 오직 능력과 사랑과 절제하는 마음이니 딤후1:7

 

 

캐나다 여인 아만다는 캐나다의 평범한 가정에서 태어났다. 자라면서 아시아를 동경하게 되었고, 한국에 도착한 그녀는 된장찌개와 막걸리 파전을 무척 즐겼다. 마침내 한국서만 자란 영화감독 전만배씨와 만나 사랑하고 결혼하여 서울 평창동에 정착하였다. 아기를 낳을 때가 된 아만다는 자란 고향캐나다를 그리며 어디서 아기를 낳을지 고민하게 되었다. 아기와 산모는 건강했고, 출산하기로 한 산부인과 병원도 남편의 친구 병원이라 진료에는 불편함이 없었다.

그러나 막상 출산이 임박하면서 진통실, 분만실과 신생아실을 둘러보고는 병원에서는 아기를 낳고싶지 않다는 생각이 들었다. 편리하게 만든 환경인 듯 보이지만 아기를 낳는 따뜻하고 편안한 환경이아니라고 느꼈기 때문이다. 아기와 떨어져야 한다는 것도 싫었다. 어려서 넉넉하지 못한 환경에서 자란 만배씨는 오늘날 한국의 병원과 의사의 수준이 캐나다에 비해서 낮지 않다고 자부하고 있었다. 더구나 자신이 알고 있는 모든 여성이 아무 문제없이 병원서 아기를 낳았기 때문에 아만다가 무엇을 문제 삼는지 알 수 없었다.

아만다는 자신이 너무 유별난 것은 아닌지 동료들에게는 물어보았다. 아기를 낳는 환경이 나라마다 조금씩 달랐지만 대부분의 여성들은 어떤 출산을하고 싶은지는 모두 같은 마음이었다. 유럽이나호주, 뉴질랜드에서 온 친구들은 집에서 낳고 싶으면 병원에서 조산사를 파견해준다고 했다. 그래서 안심하고 집에서 아기를 낳는 사람들이 많다. 한국에는 그런 곳이 없어서 선택의 여지가 없어서 불편하다고 했다.

그러나 한국에서 자라고 공부한 한국 여성들에게물어보면 병원 이외의 장소에서 아기를 낳는 것을 이해하지 못했다. 경제적으로 어려운 사람이거나 병원이 정말 싫은 사람들이 조산원을 찾는유일한 사람들이라고 얘기했다. 엄마가 아닌 여성으로 살기에 많은 것이 편리하고 발달한 서울이었지만, 막상 임신을 하고 나니 캐나다와 비교되는 것이 너무 많았다. 무엇보다도 다른 선택이없다는 것이 자신의 자유를 침해 받는 기분이었다.

아만다는 한 미국 친구가 가져온 병원 분만의 현실을 보여주는 이라는 다큐멘터리 영화를 보게 되었다. 그녀는 비로소 미국과 한국의 병원분만 시스템이 비슷하며,오늘날 왜 이런 형태를 갖게 되었는지 이해 할 수있었다. 가정출산과 조산사 출산을 균형 있게 발전 시켜온 유럽의 나라들이나 캐나다, 호주, 뉴질랜드와는 달리, 미국은 병원을 중심으로 아기를 낳는 문화를 발전시켜 왔다. 그 결과 오늘날미국의 출산과 관련된 건강 지표는 언급된 다른나라에 비해서 매우 낮은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경제적 발전과 출산 문화는 반드시 비례하지 않는다는 점을 시사하고 있다. 미국식 병원출산 문화를 여과 없이 받아들인 한국은 오늘날 거의 모든 출산(99.8%)이 병원에서 이루어짐에도 불구하고 모성 사망률이 높아서 생식건강 순위는OECD 국가 중에서 최하위를 기록하고 있다.

아만다는 자신의 출산 뿐 아니라 한국의 다른 여성들도 더 나은 환경에서 더 건강하게 아기를 낳기를 바랬다. 아만다는 더 많은 자료를 찾아보고남편부터 이해시키려는 노력을 하였다. 영어로된 자료는 다양하고 많았다. 그런데 자연스러운임신과 출산 그리고 모유 수유와 육아를 스스로남편과 함께 할 수 있도록 돕는 내용의 좋은 지침서가 한국에는 너무 부족하였다. 마침내 여러 고민과 상의 끝에 아만다는, 자신의 출산이 자유롭고 평화로운 것이 아이와 남편에게도 좋다고 결론을 내렸다.

아만다는 자신의 출산 환경에 네 가지 조건이 꼭필요하다는 원칙을 세웠다. 첫째는 진통하는 동안 자유롭게 먹고 쉴 수 있는 자유, 둘째는 진통하는 동안 원하는 곳에서 원하는 자세로 자유롭게 움직일 수 있는 자유, 셋째는 아기가 준비가되었을 때 원하는 시간에 출산을 할 자유, 넷째는 출산 후 아기가 건강하다면 아기와 떨어져 있지않을 자유. 이 네 가지 자유를 만족하는 환경은찾기 쉽지 않았다. 그것이 병원분만의 한계임을깨달은 남편 만배씨는 아만다가 집에서 진통하고출산할 수 있는 환경을 만들어 주기로 결심했다.

남편의 친구인 산부인과 의사에게 자신들이 공부하며 깨달은 내용들을 알려주고 자신들이 원하는출산을 할 수 있게 도와달라고 했다. 그런데 돌아온 대답은‘병원에서 관리하는 방식을 따르지 않으면 아기와 산모에게 위험하다’는 것이었다. ‘아기를 낳는 일은 건강한 아기와 산모에게는 생리적인 현상’이라고 믿으며, 산모 스스로 출산할 수 있는 편안한 환경을 제공하고 만일의 상황에 대비하는 시스템이 훨씬 더 안전하고 효율적이라는 것을 공부해서 알고 있는 아만다와 남편은 산부인과 의사의 반응을 이해는 하지만 서운했다. 아만다와 남편은 자신의 출산을 도와 줄 사람들을 찾기 시작했다. 자연 출산을 도울 히프노버딩 프랙티셔너(HypnoBirthing practitioner , 히프노버딩을 통해 자연 출산을 돕는 자격을 지닌 비의료 또는 의료 전문가)를 찾았다. 그리고동료인 나탈리로부터 들었던, 자신의 가정출산을지켜줄 산부인과 의사를 찾아가기로 했다. 그 때나를 만났다.

당시 나는 일 년 전 뉴질랜드 여성 나탈리의 가정출산은 잊은 채 다시 평범한 산부인과 의사로 돌아가 있었다. 아만다가 찾아왔을 때는 또 다시 자연스러운 출산을 경험하게 되어 기쁘기도 했지만한편으로는 역시 두려웠다. 한 번은 호기심 반 걱정 반으로 했었지만, 이번에는 비용을 받고 하는일이라 만일에 하나의 상황이라는 책임 문제를무시할 수 없었다. 아만다는 의료기구나 촉진제,진통제 등의 의료적인 도움 없이도 평화롭고 행복한 출산을 할 수 있다는 확신을 갖고 있었다.아만다는 이런 나의 불안감을 알고 있는 듯 히프노버딩이라는 방법으로 자신과 남편이 호흡하고이완하면 출산을 잘 할 수 있으니 진통제나 의학적인 처치가 거의 필요 없을 것이라고 오히려 나를 안심시켰다.

하지만 내 머릿속에는 아름다운 출산에 대한 긍정적인 면보다는 과거에 병원분만을 하던 시절에겪었던 문제들의 기억이 큰 두려움으로 자리 잡고 있었다. 생명이 탄생하는 순간의 기쁨은 너무크지만 적은 수이기는 하나 간절히 원하는 부모의 품에 안길 수 없는 아기들이 생길 때는, 그리고 그 일에 대한 책임감과 의사가 온전히 생명을지키지 못했다는 원망을 받을 때는, 내가 왜 이런직업을 택했을까 후회막급이었다. 좋은 대우를받고 다니던 종합병원 전문의 자리를 마다하고부인과(婦人科) 환자만 보는 개업을 한 가장 큰이유가 거기에 있었다.

중압감이 너무 컸다. 내 직업에 대한 만족감이나마음의 평화는 적었다. 내가 산부인과 의사가 되기로 결심을 한 것은 매형의 말 한 마디 때문이다. 이비인후과 전문의인 매형은 선배처럼, 때론형처럼 너무 든든하고 의지가 되었다. 자신은 한때 산부인과 의사가 꿈이었다고 했다. 그 이유가궁금했던 나에게 산부인과 전문의의 역할을 이렇게 알려 주었다. “대부분의 전문의가 병 때문에아픈 사람들을 만나야 하는데, 산부인과 전문의는 마치 금세라도 잘못될 것처럼 소리 지르고 피나오고 겁나는 상황으로 만나지만, 집에 돌아갈때는 모두 웃으면서 행복하게 간다.”인턴을 마치고 전문 과목을 선택해야 할 나에게 결국 선택의 중심이 되었던 의사상은‘질병의 고통보다는행복한 가정을 돕는 의사’였던 것이다.

그러나 내가 택한 산부인과 부인종양학 전문의의길은 행복한 퇴원과는 길이 멀었다. 암환자를 보는 의사는 삶이 우울하다. 때론 술로 하루를 마감하지 않으면 안 될 만큼 육체적, 정신적 스트레스가 크다. 내가 암 전문의 과정을 택한 이유를 돌이켜 보면, 산부인과 전문의 수련 시절의 힘든 삶을 시작하면서 매번 부딪히는 인생의 선택 과정에서 내면의 소리인‘행복과 사랑, 가정이라는긍정적인 목표’보다는‘당장의 눈앞에서 보이는두려움’을 벗어나고 싶은 내면의 마음 때문인 듯하다. 당시 국내 최고의 산부인과 환자 수를 자랑하던 수련 병원은 다행히(?) 암 전문의인 나에게도 산모를 배정할 수밖에 없었다. 결국 나는 암환자들을 보면서 죽음을 준비하는 안타까운 사람들의 절망과 후회와 함께, 새 생명의 탄생을 위한기쁨과 희망을 함께 경험하는 특이한(?) 산부인과 전문의 일을 16년간 하게 되었다.

지금 돌이켜 보면, 삶과 죽음을 모두 보게 하시며나를 특별한 곳에 쓰려고 하시는 하나님의 섭리가 나를 인도한 것이다. 결국 여성의 출산의 본능을 통하여 생명의 본질과 그 시작, 그리고 인간관계를 보게 하신 것이다. 나탈리와 아만다의 출산이후 7년이 지난 지금, 1,800명이 넘는 여성들의자연주의 출산에 대한 열망과 고통과 두려움을넘는 그들의 본능의 의지를 보면서 나는 하나님의 생명 주심의 섭리를 본다. 그리고 하나님께서바라시는 인간관계가 어떤 것인지를 조금은 이해할 수 있게 되었다. 여인의 몸을 빌어서 주신 생명은 우리가‘스스로, 더불어, 은혜로’감사히 받을 때, 하나님의 자녀와 가족이 탄생한다고 믿고있다. 그러나 당시에 나는 가정출산을 편하게 받아들일 마음의 준비가 되어있지 않았다.

아만다의 남편도 나를 설득하기 시작했다. 자신도 처음에는 안전에 대한 문제 때문에 고민을 많이 했는데, 아만다와 얘기하면서, 그리고 책과다큐 영상들을 보면서 가정 출산이 오히려 더 안전하다는 결론을 내렸다는 것이다. 더구나 아만다는 진통과 출산과정에 진통제나 약물을 사용하기를 원치 않기 때문에 히프노버딩 수업을 같이받았는데 그 수업을 듣고 나서 자신도 확신이 생겼다는 것이다. 무엇보다도 자신도 어머니가 집에서 출산을 잘 하셨다는 것을 기억하고 있다는것이다. 특히 아만다는 자신의 아내지만 대단하다고 칭찬했다. 임신 기간 내내 아이와 자신의 영양과 체력 증진을 위하여 규칙적인 생활과 운동,그리고 좋은 음식들을 골고루 섭취하여 아기도 건강하며 산모의 체력은 오히려 임신 전보다 더좋다고 자랑을 했다.

산모와 아기가 건강해서 서양 여자들이 아기를더 쉽게 낳는다는 것은 익히 알고 있었지만, 히프노버딩은 당시에 처음 들어보는 출산법이었다.이 방법이 어떻게 산모의 두려움을 없애주고 스스로 자연출산을 할 수 있게 할지 궁금해지기 시작했다. 만일 그것이 사실이라면 지금까지 경험한, 놀랍고 행복했던 자연 출산을 더 많은 산모들이 할 수 있겠다는 희망을 갖게 되었다. 그 근원이 어떻든지 두려움보다는 할 수 있다는 믿음으로 약물에 대한 의존도를 줄이고 스스로 진통을겪겠다는 그 의지가 기대되었다. 나의 걱정과 두려움 또한 기쁨과 설렘으로 바뀌었다. 스스로 출산하는 여성의 진통 이후 출산의 환희와 기쁨을다시 느껴보고 싶었다. 한 번 밖에 경험하지 않았지만, 나의 마음은 가정출산의 경이로움을 더 경험하고 싶었다. 너무나 강렬했던 생명의 힘이 그대로 마음에 채워졌다. 너무나도 생생하다. 이제는 두려움보다는 궁금증이 더 컸다. 호기심으로 기웃거리는 차원이 아니다.

한 번뿐이었지만 나탈리의 출산은 나의 모든 것의 방향을 바꾸기에 충분한 힘이 있었다. 한 생명의 탄생은 삶에 찌든 영혼을 치유하는 힘이 있다. 18년 동안 전통적인 훈련을 받아, 소위 말하는 전문가의 틀에 갇힌 나를 지배했던 그 거대한 의료시스템의 껍질이 갈라지고 있던 것이다. 이 땅에서 오늘날까지 의사로 살아오면서 놓쳐버린 생명의 진리에 대한 갈망이었다. 더 이상 집단최면의 힘이 나를 지배하도록 놔두고 싶지 않았다. 내눈은 빛났고 얼굴에는 미소가 떠올랐다. 내 표정을 본 아만다는 자신의 출산이 완벽한 축제가 될것을 예감하였다.

아만다가 말한 히프노버딩 프랙티셔너는 오스트리아 출신의 트리시라는 여성으로 그녀를 가르친선생님은 호주에서 400명 이상의 프랙티셔너를배출하고 한 지역을 히프노버딩 마을로 바꾼 마릴린 콜빈 분(Maryline Colvin Boon)이라는 히프노테라피스트였다. 히프노버딩이 새로운 시도가 아니라 이미 자연 출산을 하는 나라에서는 나름대로 정착한 자연출산법이라는 것을 알고 나니이 방법에 대한 신뢰가 생기기 시작하였다. 아만다의 출산 전에 트리시가 진행하는 히프노버딩수업을 참관할 수 있는 기회를 갖게 되었다. 각각예정일이 다른 두 외국인 부부가 더 있었다. 이들은 후에 아만다의 출산을 보고 가정출산을 선택하고 나는 이들의 출산에 참여하고 도우며, 점차산모 스스로 남편과 더불어 아기를 중심으로 최소한의 의료 개입으로 아기를 낳는 자연주의출산의 개념을 잡아가기 시작하였다.

아만다는 이 수업 도중 진통이 와서 집으로 갔다.나탈리의 출산 경험을 바탕으로 꼭 필요하다고생각되는 기구들만 챙겨서 작은 가방을 준비하였다. 나탈리의 출산 때는 사실 뭘 준비해야 할지몰랐다. 그 때는 정말 아무 생각 없이 갔었다. 병원을 통째로 옮길 수는 없지 않은가? 분만대를옮길 수도 없고, 손 빠르고 눈치 빠른 간호사는어차피 없고, 태동검사기도 없고, 회음절개, 관장, 제모 등은 안 한다 했으니 이와 관련된 기구는 아무 것도 필요 없었고, 가지고 갈 것은 손상된 피부를 봉합하기 위한 소독된 비닐 장갑 몇벌, 아기가 나온 뒤 기도를 확보하기 위한 석션벌브, 청진기, 혈압계, 체온계 외에는 딱히 필요한 것이 없었다. 그런데 이번에도 막상 준비하다보니 휴대용 작은 심박측정기 외에는 필요할 것 이 없을 듯 했다. 미리 주문해 놓은 것을 챙기니작은 가방 하나로 가뿐하다.

아만다는 평창동에 위치한 공기 맑은 집에서 편안한 상태로 초기 진통을 보내고 있었다. 남편은수중 진통과 출산을 할 수 있도록 미리 준비한풀장을 설치하느라 분주했다. 자연스럽게 출산을하는 이들에게 아이를 낳는 것은, 두려운 의학적인 일이 아니라 즐겁고 행복한 아기 맞이 집안행사인 것이다. 남편을 돕기도 하고, 촛불을 켜고, 음악을 듣고 간식을 같이 먹으며 우리는 즐거운 시간을 보냈다. 아만다는 진통이 올 때만잠시 밀려오는 파도를 잘 넘기는 모습으로 눈을감고 호흡을 천천히 가다듬었다. 평소에 아주 잘 연습한 모습이다. 약 50초간의 진통이 지나가면그 뒤 5-7분간의 휴식 시간이 온다. 작은 파도,큰 파도, 긴 파도, 짧은 파도. 아만다의 자궁 수축은 참 다양하다.

나는 나탈리와 아만다의 스스로 조절되는 자연진통을 보고나서 비로소 깨달았다. 분만실에서촉진제를 맞은 후에 3-4분마다 오는 강한 똑같은 자궁 수축은 정말 견디기 힘든 수축이다. 왜미국이나 우리나라 산부인과 의사나 산모가 한결같이 진통은 견디기 힘든 고통이라고 얘기하는지그 이치를 이제야 알게 되었다. 대부분의 여성들은 그런 약물에 의해 강하게 조절된 자궁수축(본인의 의사에 관계없이 의료진에 의해서 부드럽게강요된 만들어진 수축)을 경험한 여성들의 얘기만 서로 전해주기 때문에, 나탈리와 아만다가 겪은‘견딜만한 자연 진통, 자연적 자궁수축’은아예 모르고 있는 것이다. 자연 진통을 경험한 여성들, 즉 약물에 의존하지 않는 여성들을 서로본 적이 없기 때문이다.

무통분만을 시행하는 산부인과와 마취과 의사들은 여성의 출산 진통은‘마약이나 척추 마취 아니면 해결이 안 되는 고통’, ‘칼에 찔리는 것 다음으로 강한 통증’이라고 배우고 또 가르치고 있다. 그리고 그들에게 출산을 맡기는 여성들은 당연히 그 잘못된 믿음을 따라 믿고, 그 믿음대로경험한 후 세대를 건너 자신들의 경험을 그대로전하고 있다. 현대 의학에 대한 신앙에 가까운믿음으로 인하여‘여성의 아기 낳는 고통은 당연한것’, ‘아담과 이브의 원죄로 인하여 받은 것’ 이라는 잘못된 신앙적 기준을 회자하며, 스스로를 약하고 죄지은 여성으로 믿고 있는 것이 우리의 현실이다. 이는 믿음이 강하다는 크리스천이나 하나님의 자녀인 우리들도 예외가 아닐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