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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기도문-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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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기도문-Ⅰ

2016년 11월 8일 화요말씀치유집회 메시지


2016년 10월호 이후의 <HTM 메시지>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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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앙생활에 있어 가장 중요한 “주기도”의 능력이 회복하기를 간절히 소망합니다. 너무나 안타까운 사실은 하나님나라에서 하나님 자녀가 이 땅에 주의 뜻을 어떻게 이루며 살아갈 수 있는지를 가르쳐 주신 “주기도문”이 중간에 ‘기도’를 빼 버리고 “주문”이 됐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가장 많이 하는 기도가 주기도문이지만 주기도문을 암송 하면서 그 뜻을 깊이 생각하기 보다는 그냥 외운 대로 그냥 암송하고 끝내 버립니다. 이 세상을 변화시키기 위해서는 주기도문이 회복되어야 합니다. 왜냐하면 이 주기도문 안에는 모든 복음의 핵심이 들어있기 때문입니다

 

오늘날 우리 삶을 보면 기도가 점점 줄어들고 있습니다. 80년, 90년대 이르기까지는 정말 기도가 살아있고 기도의 삶이라고 말할 만큼 기도에 불이 붙었지만, 지금은 기도하기보다는 성경 공부하기를 더 좋아합니다. 기도하기보다는 서로 문제해결하기 위해서 토론하기를 좋아합니다. 기도하기보다는 힘써 일하기를 좋아합니다. 정말 기도가 회복되어야 함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기도 외에 다른 일들을 더 중요하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마귀의 전략은 우리의 믿음을 무너뜨리기가 힘들면 제일 먼저 기도하지 못하게 합니다. 최선을 다해서 열심히 살아가도록 만듭니다. 결국 그렇게 되면 바쁘게 되지요. 바쁘게 되면 기도할 겨를이 없어집니다. 바빠서 기도를 못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바쁘기 때문에 더 기도해야 함에도 불구하고, 마귀는 교묘하게 우리를 속여서 기도하기 보다는 최선을 다해서 힘써 열심히 살아가가게 합니다. 그 결과로 우리는 바쁘게 되고, 결국 기도를 하지 못하게 되지요. 사실은 그것을 뒤집어서 주기도문으로 해석하자면 “나라와 권세와 영광이 마귀에게 영원히 있습니다.”라고 말하며 살아가는 것과 똑같은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그것을 깨닫지 못합니다. 바쁘기 때문에, 해야 될 일이 많기 때문에 나는 기도할 시간이 없다고 생각합니다. 우리는 할 수만 있다면 가능한 모든 일을 최선을 다해서 할 때에 성공하고 축복받고 형통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정말 중요한 것은 우리가 할 수 있는 모든 일을 다 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때에 하나님이 허락하신 일을 행하는 것을 배우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이 바로 새 생명의 풍성함을 누리는 열쇠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기도하면 하나님의 때에 하나님이 시키시는 일을 행할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그럴 때 우리의 삶은 풍성해지고 주의 뜻을 이루는 삶을 살게 됩니다. 사실 우리가 살아가면서 열심히 하는 대부분의 일들 중에는 정말 쓸데없는 일들이 참으로 많습니다. 그러다 보니 다른 사람에 대한 여유도 없습니다. 삶의 안식도 없습니다. 늘 바쁘고 열심히 사는 것 같지만 늘 부족하고 결핍함을 느낍니다. 마귀는 이 악순환을 계속적으로 돌게 만듭니다. 그럴수록 우리는 점점 기도할 수 없게 되는 것이지요. 그러나 우리가 다시금 기도를 회복할 때에는 모든 일을 다 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때에 하나님이 시키는 일만 하는 아름답고 거룩한 삶을 살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기도는 하나님과의 인격적 교제임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오래 전부터 기도의 목적을 변질시켜 버렸습니다. 자신의 필요를 채우기 위한 수단으로 전락시켜 버렸다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을 나타내기 위해서 기도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결핍과 자신의 필요가 있을 때만 나와서 “주여! 믿습니다. 이걸 해 주셔야 합니다. 구체적으로 이건 몇 시까지 해 주시고 이건 이렇게 이루시고 저건 저렇게 이루십시오.”라고 기도하기 일쑤입니다. 그 필요를 채우기 위해서 기도를 열심히 했지만 아무것도 채워지지 않기 때문에 더 이상 기도할 필요가 없다고 생각하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이런 마음의 태도에 있어서는 두 가지의 패턴이 있습니다. 첫 번째로는 “신앙공식적인 기도 패턴”입니다. 하나님이 약속하시지 않았습니까? 하나님이 약속하셨고 내가 믿으면 하나님이 이루신다고 하시지 않았습니까? 그러니까 그것을 붙들고 열심히 기도합니다. 그런데 아무 일도 안 일어납니다. 결국은 차마 하나님을 부정하기 힘들기 때문에 자신의 믿음 없음을 자책하고 맙니다. 하나님은 이렇게 약속하셨고, 믿으면 그렇게 해 주신다 했는데 내가 믿고 이렇게 기도했는데 아무것도 응답을 받지 못했으니까 결국 나는 믿음이 없다고 스스로 자책하고 만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기복신앙일 뿐입니다. 삶의 주체가 하나님이 아니라 자기가 주체가 되어서 자기의 필요, 자기의 결핍을 채우기 위한 수단으로 기도를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반대로 또 다른 극단은 “신앙결정론적 기도 패턴”입니다. 이런 분들은 기도할 때 “하나님의 뜻이라면…, 혹은 하나님 뜻대로 하시옵소서!” 이렇게 기도합니다. 그 마음속에는 “하나님이 해 주시기로 결정하셨으면 내가 기도하든 안 하든 하나님이 해 주실 것이고, 하나님이 안 해주시기로 결정하셨으면 내가 기도하든 안 하든 하나님은 안 해 주실 거니까 결국 그럴 바에는 제일 좋은 기도는 주의 뜻이라면, 주의 뜻대로 하시옵소서!” 이렇게 기도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예수님께서 마지막에 십자가를 지시기 전에 아버지께 기도했던 것을 떠올립니다. “이 잔을 거두지 못하신다면 주의 뜻대로 하시옵소서!” 그런데 잘 생각해 보십시오. 예수님은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를 알고 계셨습니다. 그리고 하나님 뜻대로 하시라고 기도하신 것입니다. 예수님은 당신이 어떤 일을 해야 될지, 하나님이 뭘 원하시는지를 너무나 분명히 알고 계셨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하나님의 뜻도 모르면서 “하나님의 뜻대로 하시옵소서!”라고 기도하는 것은 자기에게는 책임을 돌리고 싶지 않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정상적인 하나님과의 인격적인 교제가 뭔지를 모르기 때문에 이런 “신앙공식적인 기도 패턴”, “신앙결정론적 기도 패턴” 이 양쪽을 왔다 갔다 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진정한 기도는 무엇일까요? 하나님과 인격적인 교제를 나눈다는 것은 무엇일까요? 하나님의 자녀가 하나님 아버지와 기도한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요? 기도를 나눈다면 첫 번째로는 내 마음을 내려놓는 것이 기도입니다. 우리가 찬양하고 경배하는 것이 무엇입니까? 바로 내 마음을 내려놓는 것입니다. 내 마음을 내려놓지 않고는 하나님과 영적으로 교제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두 번째로는 내 마음을 내려놓을 때 찾아오신 성령님을 통해서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아버지와 교제하는 것입니다. 세 번째는 아버지의 뜻을 우리가 감동받고 그 아버지의 뜻을 앎으로 인해서 뜻이 하늘에서 이룬 것같이 땅에서 이루어지도록 하나님께서 나에게 의도한 목적대로 이 땅의 삶을 사는 것입니다.

 

우리가 찬양을 드리고 묵상하고 하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세상에 묶여 있는 내 마음을 내려놓고 하나님 아버지께 내 마음을 드리기 위해서입니다. 그렇지 않고는 하나님과 만날 수 없고 교제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우리의 마음을 내려놓는 것, 그 다음에 하나님 보좌 앞에서 하나님과 교제하는 것, 그리고 그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하나님의 뜻을 알고 이제 이 땅에서 하나님이 나에게 의도하신 그 목적대로 살아가는 것을 위해서 우리가 하나님과 교제하는 것입니다. 아멘! 여러분이 기도의 정의를 새롭게 내리시기를 축원합니다. 할렐루야!

 

우리가 기도할 때에는 먼저, 내 마음을 내려놓고 찬양하고 경배하는 이유가 무엇인지를 이해해야 합니다. 그리고 잠잠히 그분 앞에 있을 때에 성령님이 우리를 사로잡게 되고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성령님을 통해서 하나님 아버지와 교제를 나눌 수 있는 것입니다. 그분은 영이시기 때문에 내 마음이 세상에 묶여 있지 않고 내 마음을 주님께 드렸을 때에 그 영에서 우리의 마음에 하나님의 마음을 부어주시고 감동을 주신다는 사실입니다. 그럴 때 우리는 하나님의 마음에 합해지게 되고, 하나님의 뜻을 알게 되고, 이 땅에 주의 뜻을 이루는 삶을 살게 되는 것입니다. 그것이 우리가 기도하는 이유입니다.

 

우리가 기도를 정확하고 제대로 알기 위해서는 그동안 중요시했던, 어쩌면 주기도문보다 더 중요하게 생각했던 구약의 “야베스의 기도”와, 기도는 아니지만 구약의 모든 사람들이 늘 암송했던 “십계명”과 오늘부터 우리가 함께 나누게 될 새 언약 가운데 하나님 나라에서 하나님 자녀가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삶을 살기 위해서 가르쳐 주신 “주기도문”을 비교해 봄으로써, 우리가 가지고 있는 기도의 개념이 얼마나 잘못된 것인가를 확인해야 합니다. 그리고 예수님이 “너희는 이렇게 기도하라!”하셨을 때에 이렇게 기도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알기를 원합니다. 아멘!

 

꽤 오래 되었습니다만 구약의 “야베스의 기도”가 온 나라를 떠들썩하게 했던 적이 있습니다. 구약의 야베스라는 사람이 하나님께 복을 구했더니 하나님께서 복을 주셨다는 것입니다. 사실 “야베스의 기도”가 유행되고 난 다음부터 목사님들도 이 기도에 대해서 설교도 하시고, 모든 집에 가면 “야베스의 기도”를 벽에 걸어놓기도 했습니다. 그리고 그 조그만 책이 불티나듯 팔렸습니다. 그렇지만 야베스의 구약의 기도 그 자체가 아니라 “야베스의 기도”라는 얇은 책자, 즉 야베스의 기도를 해석한 것이 얼마나 우스꽝스러운 해석인지를 여러분들이 깨달아야 합니다. 다시 한번 말씀드리지만, 야베스 기도 자체가 잘못된 것이 아니라, 우리의 해석이 얼마나 잘못 된 것인가를 알아야 합니다.

 

야베스는 그의 형제보다 귀중한 자라 그의 어머니가 이름하여 이르되 야베스라 하였으니 이는

내가 수고로이 낳았다 함이었더라 야베스가 이스라엘 하나님께 아뢰어 이르되 주께서 내게 복을 주시려거든

나의 지역을 넓히시고 주의 손으로 나를 도우사 나로 환난을 벗어나 내게 근심이 없게 하옵소서 하였더니

하나님이 그가 구하는 것을 허락하셨더라 대상4:9-10

 

역대상 4장의 짧은 두 구절입니다. 그런데 이 두 구절이 온 세상을 사로잡았습니다. 그리고 복 받기 위해서 너나 나나 야베스의 기도를 하기 시작했습니다. 열심히 끈질기게 하나님께 구하면 하나님이 은혜를 베푸신다는 이 관점입니다. 야베스가 그렇게 자신의 부족함과 필요를 위해서 하나님께 간절히 끈질기게 기도했더니 은혜의 하나님께서 복에 복을 내려주셨다는 뜻입니다. 그러나 구약을 잘 한 번 생각해 보십시오. 하나님은 말씀 밖의 일을 행하시지 않습니다. “야베스가 이스라엘 하나님께 아뢰어 이르되 주께서 내게 복을 주시려거든 나의 지역을 넓히시고 주의 손으로 나를 도우사 나로 환난에서 벗어나 근심이 없게 하옵소서 하였더니 하나님이 그가 구하는 것을 허락하셨더라” 구약에 있어서 중요한 것이 무엇입니까? 율법을 지키고 행하면 축복이고 생명이고, 율법을 지키지 않으면 사망이고 저주라는 것입니다. 이 말 속에서 야베스가 기도했더니 하나님이 구하는 것을 허락하셨더라는 것의 기초는 야베스가 모든 율법을 항상 지켰다는 것을 전제로 하고 있습니다. 그렇지만 해석에는 그 문제는 싹 빠져 있습니다. 구약임에도 불구하고 신약의 하나님, 은혜의 하나님을 대입해서 끈질기게 간절히 기도했더니 하나님이 은혜를 주셨더라고 해석하는 것입니다. 아니오. 그렇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법 밖에서 일하시지 않습니다. 항상 모든 율법을 지켜야만 우리가 복을 누리고 생명을 누릴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렇지만 한 번 생각해 보세요. 구약에 어느 누가 항상 모든 율법을 지킬 수 있습니까? 그 이야기는 하지 않는 것입니다.

 

무릇 율법 행위에 속한 자들은 저주 아래 있나니 기록된바 누구든지 율법 책에 기록된 대로

모든 일을 항상 행하지 아니하는 자는 저주 아래에 있는 자라 하였음이라 또 하나님 앞에서 아무도 율법으로

말미암아 의롭게 되지 못할 것이 분명하니 이는 의인은 믿음으로 살리라 하였음이니라 갈3:10-11

 

이 구약의 말씀이 성립되기 위해서는 성경의 말씀에 나와 있지는 않지만 야베스는 모든 율법을 항상 지켰다는 것을 전제로 하고 있는 것입니다. “사람이 의롭게 되는 것은 율법의 행위로 말미암는 것이 아니요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는 줄 앎으로 우리도 그리스도 예수를 믿나니 이는 우리가 율법의 행위로써가 아니라 그리스도를 믿음으로써 의롭다 함을 얻으려 함이라 율법의 행위로써는 의롭다 함을 얻을 육체가 없느니라” 아멘!

 

만약에 이것을 신약으로 해석을 한다면 야베스가 기도했을 때 하나님께서 은혜를 베푸시기 위한 핵심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구원 받은 자가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구원 받은 하나님의 자녀만이 아버지에게 기도할 때에 무엇이든지 얻을 수 있다고 말씀하셨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 된, 살아계신 하나님 아버지에 대한 개념 없이 끈질기게 간절히 기도했더니 하나님이 은혜를 주셨더라고 해석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도 야베스처럼 기도하면 하나님께서 축복을 주신다, 은혜를 주신다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은 구약과 신약을 인간의 방법으로 얼버무려서 해괴망측한 신학으로 우리에게 하나님은 축복 주신다고 믿게 만든 것입니다. 만약에 이 기도가 정말로 사실이라면 이 기도를 했던 모든 사람들은 복의 복을 누렸고, 지금도 야베스의 기도는 책이 없어서 못 팔정도이고, 이 집회는 필요 없습니다. 왜냐하면 야베스만 쫓아다니면 되기 때문입니다. 그렇지만 그것은 한줄기의 바람처럼 지나쳐 버린 것입니다. 왜냐하면 올바른 가르침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은혜를 누리기 위해서, 하나님의 도우심을 받기 위해서, 우리 가운데 평강을 누리기 위해서, 하나님이 우리가 구하는 것을 허락하시기 위해서는 전제로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의 자녀가 되어야 하고, 아버지께 구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아멘!

 

그런데 그 부분은 빠져 있습니다. 그 부분에 대해서는 이야기하지 않습니다. 모든 율법을 항상 지켜야 된다는 그 이야기도 빠져 있습니다. 단지 성공지상주의, 물질만능주의, 자기중심주의, 끈질기게 기도하면 은혜의 하나님이시니까 우리에게 복 주신다는 그야말로 너무나 맛있는 요리처럼 우리에게 솔깃한 그런 내용입니다. 야베스의 기도는 사실이지만 그 야베스의 기도에 대한 해석은 완전히 잘못된 것입니다. 하나님의 자녀가 되지도 않고 자신의 뜻대로 필요한 것을 구하기만 하면 하나님이 주신다? 여러분! 하나님의 자녀는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자입니다. 아멘!

 

그런데 여기에 “나는”, “내가” 몇 번 나오는지 아십니까? 여기는 하나님에 대한 이야기가 하나도 없습니다. 여기 보시면 “주께서 내게 복을 주시려거든 나의 지역을 넓히시고 주의 손으로 나를 도우사 나로 환난을 벗어나고 내게 근심이 없게 하옵소서” 그랬더니 하나님이 그가 구하는 것을 허락하셨더라.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라면 날 위해서 사는 것입니까? 기도라는 것이 나의 욕심을 나의 결핍을 나의 필요를 채우기 위한 것이 기도입니까? 아닙니다. 그런데 이 기도는 무엇입니까? 하나님 뜻은 없습니다. 하나님의 자녀도 아닙니다. 자기 필요한 것, 내가, 내가, 내가, 내가, 내가 다섯 번 나옵니다. 자신을 위한 기도입니다. 이것은 하나님이 원하시는 기도가 아닙니다. 우리가 새 언약 가운데 하나님의 자녀로서 드려야 될 기도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가르쳐 주신 기도는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이십니다. 그런데 여기는 “나의 아버지”입니다. 오직 나의 필요성, 자기중심적인 기도입니다. “나”, “내가”, “나는”, 그런데 이 기도를 가지고 수많은 사람들이 설교하고, 수많은 사람이 복 받으라고 말했습니다. 이것은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가르쳐 주신 기도가 아닙니다. 그렇기 때문에 예수님께서는 “너희는 이렇게 기도하라” 말씀하신 겁니다

 

한편으로 우리가 기도를 생각할 때에 십계명은 분명히 기도는 아니지만, 모든 이스라엘 백성들이 항상 암송하고 지키고 행하는 것이 바로 이 십계명입니다. 이 십계명은 600여 개의 모든 계명을 열 개로 압축한 것입니다. 우리가 십계명을 한 번 생각해 보면 좋을 것 같습니다. 이 십계명은 출애굽기 20장 3절에서 17절의 말씀에 나오지만, 이 열 가지를 핵심적으로 말하자면 다음과 같습니다. 한 번 같이 읽어보겠습니다. 제1계명; 야훼 이외에 다른 신을 섬기지 말라. 제2계명; 우상을 섬기지 마라. 제3계명; 하나님의 이름을 망령되이 부르지 말라. 제4계명; 안식일을 거룩히 지키라. 제5계명; 너희 부모를 공경하라. 제6계명; 살인하지 말라. 제7계명; 간음하지 말라. 제8계명; 도둑질하지 말라. 제9계명; 이웃에 대하여 거짓 증거 하지 말라. 제10계명; 네 이웃의 집을 탐내지 말라.

 

여러분! 십계명을 주신 이유가 뭔지를 한 번 생각해 보십시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율법을 주신 이유가 무엇입니까?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로 회복되어야 함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생명이 없는 이스라엘 백성들은 계속적으로 범법, 법에 벗어난 일을 했습니다. 다른 말로 죄를 지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의 영광, 하나님의 법이 무엇이며 죄가 무엇인지를 알려주기 위해서 우리에게 율법을 주시고 지켜야 하는 십계명을 주셨습니다. 따라서 하나님의 생명이 없는 자들이 여호와 하나님이 누구이시며, 하나님의 영광이 무엇이며, 하나님의 법이 무엇인지 알기를 원하셨고 우리가 지금 그 법 밖에서 죄 가운데 있다는 것을 깨닫기 원하셨습니다.

 

따라서 이 십계명을 보면 대부분이 “Don’t do that!” “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여기에 제4계명; 안식일을 거룩히 지키라. 제5계명, 너희 부모를 공경하라 외에는 다 “하지 말라!”입니다. 왜? 우리가 법 밖에 있기 때문에, 죄악 가운데 있기 때문에, 그 일 하지 말고 하나님의 법 안으로 하나님의 영광 안으로 들어오라는 것입니다. 대부분이 “Don’t do that!” “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알고 있는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가르쳐 주신 주기도문은 “Don’t do that!”이 아닙니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의 자녀가 된 자가 하나님 아버지와 관계하며 하나님의 뜻을 이루도록 하기 위해서 가르쳐 주신 기도가 주기도문이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너희는 이 땅에 주의 뜻을 이루기 위해서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하는가에 대해서 가르쳐 주신 것이 주기도라는 것입니다.

 

주기도문은 참으로 이상한 기도입니다. 주기도문을 암송하며 기도할 때마다 여러분은 의심을 가져야 합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알고 있는 복음에 관련된 핵심적인 단어는 하나도 없기 때문입니다. 이 안에는 예수 그리스도가 없습니다. 십자가도 없습니다. 구원도 없습니다. 성령님도 없습니다. 기독교의 복음에서 십자가, 성령, 예수 그리스도, 구원이 없다면 이단이지요. 그런데 우리가 그렇게 전 세계 모든 기독교인들이 행하는 이 기도 안에는 그 단어가 하나도 없다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 모두는 이 주기도문을 가장 중요시하며 기도하고 있습니다. 이 부분에 대해서 여러분들은 심각하게 의문을 가져야 합니다.

 

그리고 우리가 알고 있기로는 모든 기도는 예수 그리스도 이름으로 해야 되는데, 그래서 우리가 기도할 때 예수 그리스도 이름으로 기도하는데, 여기에는 예수 그리스도 이름으로 기도하라는 것도 없습니다. 한 번 생각해 보십시오. 주기도문이 무엇일까요? 무얼 의미하는 것일까요? 바로 이 주기도문은 구약과는 달리 율법으로 의롭다 함을 얻을 자가 없기 때문에 구원을 얻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하나님의 자녀가 하나님의 뜻대로 살기 위해서 행해야 되는 기도라는 것입니다. 주기도문을 행하는 것은 하나님의 자녀들만이 행할 수 있는 기도라는 것입니다

 

주기도문을 드리기 위한 전제는 하나님 나라가 도래해야 하고 죄인이었던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자녀가 되어야 합니다. 그리고 그 하나님의 뜻을 이루기 위해서 행하는 기도가 주기도문이라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신 근원적인 이유는 두 가지입니다. 첫째는 나와 아버지는 하나이니라,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 아바, 아빠, 아버지라고 불렀기 때문입니다. 둘째는 안식일에 일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니까 그 당시에 아바 아버지라고 부르는 것은 신성 모독에 해당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예수님께서 지금 너희는 이렇게 기도하라고 말씀하시면서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라고 기도하라는 겁니다. 이 말은 이미 그 전제가 예수 그리스도로 인하여 하나님의 자녀가 된 자가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기 위해서, 하나님의 뜻을 이루게하기 위해서 행하는 기도가 주기도문이라는 것입니다. 아멘!

 

이 안에는 기독교의 핵심적인 용어가 하나도 들어있지 않지만 이 기도의 내용은 예수님이 가르치신 신약의 모든 것을 압축해 놓은 것입니다. 이것은 구약의 모든 계명을 합쳐 놓은 것입니다. 구약의 모든 말씀은 다 진리이고, 일점일획도 틀림이 없는 진리입니다. 그렇지만 예수 그리스도의 참 빛에 비추어 보지 않는다면, 진리이지만 그 진리를 우리는 온전하게 받아들일 수 없습니다. 만약에 구약의 말씀을 그대로 우리가 받아들인다면 아직도 메시야가 오지 않았다고 믿고 있는 유대인들이 믿는 유대교와 다른 것이 뭐가 있습니까? 유대교의 유대인들도 우리의 구약과 동일한 구약을 갖고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잘 알고 있는 것처럼 마태복음 5장 17-18절 말씀에 보면 예수님은 선지자와 율법을 폐하러 오신 것이 아니라 완성하러 오신 것입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그 구약을 완성시키셨느냐? 예를 들어서 한 번 생각해 보십시오. 마음과 목숨과 뜻과 힘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고 네 이웃을 내 몸같이 사랑하라! 바리새인들이 예수님께 구약의 핵심이 무엇입니까? 십계명은 줄여서 뭡니까? 물었을 때 그 두 계명이 모든 선지자와 모든 율법의 강령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렇지만 예수님께서 새 언약에서 그 말씀을 그리스도의 참 빛에 비추어서 해석하실 때는 신약에서는 어떻게 해석되었습니까? 하나님이 너희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 말씀하셨습니다. 누가 마음과 목숨과 뜻과 힘을 다하여 주 너희 하나님을 사랑할 수 있겠습니까? 그렇게 사랑할 수만 있다면 왜 새 언약이 필요합니까? 왜 예수님이 이 땅에 오셔야 합니까? 오실 필요가 없는 것이지요. 그러나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하나님께서 그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우리 죄를 사하기 위해서 십자가에 못 박고 부활하게 하셨습니다. 따라서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 있을 때에 그 구약의 법이 완성된 것입니다. 그리스도를 통해서 완성된 것입니다.

 

그분이 먼저 사랑하셨기 때문에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할 수 있고,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한 것처럼 우리도 다른 사람을 사랑할 수 있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아멘! 예수님은 구약을, 율법을 폐하러 오신 것이 아니라 완전케 하셨습니다. 따라서 하나님의 자녀인 우리는 구약을 지키고 행하는 존재가 아니라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의 약속의 말씀을 이루는 자인 것입니다. 아멘! 이건 너무나 중요한 것입니다. 우리가 구약에 있는 하나님의 생명이 없는 자들이 구약의 말씀을, 계명을 지키고 행함으로 축복받는 그 삶을 사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 안에서 이 율법의 저주가 되시고 그 율법을 완성시키신 그리스도가 우리 안에 있기 때문에 그리스도 안에서 약속의 말씀을 이루는 자가 되는 것입니다. 그 일을 이루는 기도가 주기도문이라는 것입니다. 아멘!

 

십계명을 보시면 제1계명에서 제4계명까지는 하나님에 대한 계명입니다. 그 다음에 제5계명부터 제10계명은 우리 삶에 대한 계명입니다. 다음에 더 배우겠지만 주기도문을 보십시오. 주기도문의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여”는 서문입니다.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 나라가 임하옵시며 뜻이 하늘에서 이루어진 것 같이 땅에서 이루어지리이다” 이것이 하늘에 대한 것, 하나님에 대한 것입니다. 나머지 세 기도, “오늘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시옵고 우리가 우리에게 죄 지은 자를 사하여 준 것같이 우리 죄를 사하여 주옵시고 우리를 시험에 들지 말게 하옵시고 다만 악에서 구하옵소서” 이 세 구절이 구약의 제5계명부터 제10계명에 해당되는 것입니다. 바로 예수 그리스도께서 그 구약을 완성시키신 것입니다.

 

그분이 우리 안에 들어오신 것입니다. 우리가 그리스도를 통해서 이제 그 계명을 이루어가는 것입니다. 내가 지키고 행해서 축복받는 게 아니라 율법의 완성자 되신 그리스도 안에서 그 약속의 말씀을 오늘 하나님의 자녀로서 이루어가기 위해서 주신 것이 주기도문이라는 것입니다. 할렐루야! 아멘! 따라서 이 주기도문을 여러분이 제대로 이해한다면 구약의 모든 계명을 완성케 하는 것이 바로 주기도문입니다. 여러분이 이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그리고 우리가 앞으로 더 배우겠지만 이 주기도문 안에는 신약의 모든 가르침이 들어 있습니다. 따라서 이 주기도문을 알고 주기도문대로 우리가 기도할 때에 놀라운 하나님의 기사와 표적과 하나님의 능력이 나타난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지금까지 주기도문을 윤리, 도덕, 사회적인 관점에서만 보았습니다. 그렇지만 하나님이 우리를 통해서 실제적으로 나타나시는 부분에 대해서는 제대로 알지도 못했고 그렇게 기대하지도 않았고 그렇게 기도하지도 않았습니다. 우리가 주기도문 하면 간구, 청원, 두 가지가 생각납니다. 이것은 간구 기도고 청원 기도고 지금은 아니고 언젠가 미래이고. 또 우리가 죽고 난 다음이나 예수님이 재림한 다음에 이루어지는 것으로 우리는 그렇게 기도하고 있습니다. 바로 그것이 이 하나님 나라 복음을 모르는 관점에서 주기도문을 해석했기 때문입니다.

 

이 주기도문은 이미 도래한 현재적 하나님 나라에서 주의 자녀들이 실현시켜야 될 기도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이 기도를 보면 대부분이 간구 형식으로 나와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그것을 제대로 이해 못하는 것입니다. 주기도문을 제자들에게 가르쳐 준 것은 예수님이 십자가를 지시기 전입니까? 십자가를 지신 후입니까? 그렇지요. 십자가를 지시기 전입니다. 하나님 나라가 도래한 때입니까? 아직 하나님 나라가 도래하기 이전입니까? 이전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지금 간구로 기도하는 것이지만 실제로 이 기도의 내용은 하나님 나라가 도래하기 전의 내용입니까? 하나님 나라가 도래한 후의 내용입니까? 후의 내용이지요. 이 내용은 하나님 나라가 도래한 후의 내용입니다. 그렇지 않다면 우리가 어떻게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라고 부를 수 있겠습니까? 아멘!

 

여러분이 이 사실을 이해하기 시작할 때부터 이 주기도문에 대한 새로운 눈이 떠지기 시작하는 겁니다. 예수님이 왜 이 기도를 마치 간구, 청원처럼 가르치셨을까. 그러나 이 내용을 보면 분명히 하나님의 자녀만이 드릴 수 있는 기도라는 것을 우리는 알게 된다는 것입니다. 할렐루야! 하나님 나라가 도래하기 전에는 이 기도를 드릴 수가 없는 겁니다. 바로 예수님께서는 곧 당신께서 이루실 십자가, 부활, 승천, 보혜사 성령님, 하나님 나라의 도래를 바라보면서 너희는 지금 이들과 같이 기도하지 말고 앞으로 내 안에서 하나님의 자녀로서 이렇게 기도하라고 가르쳐 주신 것입니다.

 

이 주기도문 안에는 좀 전에 봤던 이 모든 것, 야훼 이외에 다른 신을 섬기지 말라, 우상을 섬기지 말라, 하나님의 이름을 망령되이 부르지 말라 이것이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가 지키고 행해야 될 율법이지만 그리스도 안에서 이미 이루어진 것입니다. 아멘! 그래서 그리스도 안에서 이 땅에서 어떻게 살아야 되는지를 가르쳐 준 것입니다. 여기에는 다른 신을 섬기지 말라, 우상을 섬기지 말라, 하나님의 이름을 망령되이 부르지 말라 했지만 여기에는 어떻게 불러요?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라고 부른다는 것입니다.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

 

저는 여러분들이 주기도문을 새롭게 보는 순간에 마음속으로 “이거야!” 이런 마음을 갖기를 축원합니다. “여기에 놀라운 비밀이 있겠구나!” 그 흥분된 마음을 갖기를 원합니다. “야! 이 주기도문 안에 이 모든 구약과 신약에 비밀이 이 안에서 풀어지는구나!” 이것을 여러분이 알기를 축원합니다. 이 기도가 살아나야 합니다. 지금까지 우리는 주기도문의 내용은 암기했지만 그 뜻을 제대로 이해하지도 못하고, 예수 그리스도를 처음 믿을 때 교회에서 제일 먼저 가르쳐 주니까 뜻도 모르는 채 그냥 암송했습니다. 그리고 “주기도문으로 마치겠습니다.” 이러면 주문처럼 주기도문에서 “기도”는 빼버리고 그냥 암기한 대로 고백하는 기도가 되었다는 것입니다.

 

아니오. 오늘날 세상을 변화시키기 위해서는 “하나님의 나라는 말에 있지 않고 능력에 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바로 우리의 능력을 회복시킬 수 있는 기도, “내가 하는 일 너희도 할 것이요 이보다 더한 일도 하리니 이는 내가 하늘로 올리움이라” 그 하나님 나라가 도래했을 때에 이 세상을 바꿀 수 있는 기도가 바로 주기도문이라는 사실입니다. 여러분이 오늘 이 시간을 통해서 기도에 대한 정의를 바꾸고 여러분 마음속에 기도의 불이 붙기를 축원합니다.

 

기도는 바빠서 못하는 게 아닙니다. 바쁘기 때문에 기도해야 합니다. 그래야만이 정해진 24시간, 365일을 내 뜻대로 사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대로 살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또 한 편으로 하나님은 우리에게 일만 하라고 말씀하신 적이 없습니다. 안식하라, 누리라, 풍성함을 누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할 수만 있다면 가능한 모든 일에 최선을 다해야만 안심이 되고 염려가 없어지기 때문에, 사실 없어지는 게 아니라 하면 할수록 더 수고했지만, 무거운 짐을 지고 더 염려, 걱정하는 삶에 붙들려가면서도 그렇게 살 수밖에 없는 이유는 기도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기도할 때만이 내가 하는 모든 일이 아니라 하나님이 나에게 의도하신 일을 행하고 나머지는 다른 사람을 섬기고 풍성한 삶을 누릴 수 있게 된다는 것입니다.

 

바쁘신 분, 기도가 회복되어야 합니다. 할렐루야! 바쁜 것은 거룩한 삶이 아닙니다. 바쁜 것은 마귀의 종노릇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원하시는 것은 바쁜 삶이 아니라 풍성한 삶을 원하셨습니다. 풍성한 삶을 살기 위해서 해야 되는 것이 기도입니다. 아멘! 그렇지만 야베스와 같은 기도는 하지 않기를 축원합니다. 하나님은 은혜의 하나님이고 하나님은 복 주시는 하나님이고 따라서 내가 끈질기게 기도하면 하나님이 복 주신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있을 수가 없는 이야기입니다. 우리는 이 주기도문을 통해서 야베스의 기도의 해석이 얼마나 편협 되고 잘못된 것인지 깨달아야 합니다. 더 이상 야베스의 기도에 대한 해석처럼 그렇게 우리의 욕구를 채우기 위해서 기도하지 않기를 축원합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뜻을 이루기 위해서 기도하는 것이지 내 결핍과 내 부족을 채우기 위해서 기도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나 주의 뜻을 이루는 삶을 살 때 따라오는 모든 것이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풍성함입니다. 기도는 결코 야베스처럼 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우리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것입니다. 우리 모두는 그리스도 안에서 한 생명을 갖고 있는 형제, 자매입니다.

 

십계명 중요합니다. 그렇지만 이 주기도문 안에 십계명 모두가 들어있다는 사실을 여러분이 알기를 원합니다. 아까 말씀드린 것처럼 예수님은 율법과 선지자를 폐하러 오신 것이 아니라 완전케 하시기 위해서 오셨습니다. 이제 2천 년 전에 새로운 법이 생겼고 하나님 나라가 왔고 하나님이 통치하시기 때문에 우리는 그 주기도문을 통해서 구약의 모든 계명을 완성케 해야 합니다. 우리 안에 계신 예수 그리스도로 인하여 이 구약의 계명은 잘못된 것이 없습니다. 일점일획도 틀림없는 진리입니다. 그러나 내가 하나님의 생명이 없는 구약의 사람처럼 구약의 말씀을 지키고 행하고 축복받으려고 애쓴다면 당신은 그야말로 어리석은 삶을 살고 있는 것입니다. 이제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 있습니다. 그분이 율법의 저주가 되셨고 우리를 위해서 그분이 율법을 완성시켰습니다. 그분이 지금 우리 안에 계십니다. 이제 우리는 그 율법을 완성시키는 자가 되는 것입니다. 할렐루야! 아멘!

 

기도란 무엇입니까? 첫째 하나님과 인격적인 교제입니다. 그 인격적인 교제를 나누어 보면 세 가지입니다. 첫 번째로는 내 마음을 내려놓는 것입니다. 내 마음의 생각, 감정이 나라고 믿고 있는 거짓 자아에 속아서 이게 나라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이 “나”는 지금 세상에 묶여 있고 마귀에게 묶여 있는 것입니다. 따라서 이 마음을 내려놓을 때라야만 하나님과 교제를 시작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할렐루야! 기도의 첫 번째는 내 마음을 내려놓는 것입니다. 내 마음을 내려놓을 때 성령님이 우리 마음에 임하십니다. 그때부터 하나님과 의의 관계를 이루며 하나님과 친밀함을 나눌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그때 그 누릴 수 있는 것이 의와 희락과 평강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우리가 누리게 되고, 그럴수록 내 자신을 더 하나님께 의탁하게 되고, 그럴 때 하나님의 영광이 우리를 사로잡게 되는 것입니다. 그 가운데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서 성령님이 이 말씀을 풀어주시게 되고 내 상황에 대해서 성령님이 말씀하시게 됩니다. 그럴 때 그 말씀을 받아서 우리가 믿는 대로 행동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선포하고 명령하고 꾸짖게 되는 것입니다. 그 일을 위해서 우리는 하나님 아버지와 교제하는 것이고 그것을 기도라고 말한다는 것입니다. 더 이상 당신의 결핍과 부족과 욕구를 채우기 위한 도구로 기도를 사용하지 않기를 축원합니다.

 

그러니까 이 기도는 예수님처럼 따로 시간을 떼어놓고 기도도 해야 하지만 동시에 사는 것이 기도입니다. 사실은 기도하지 않고 믿음 없는 사람은 없습니다. 우리는 흔히들 기독교 우리들만 기도하고 믿음 생활한다고 생각하지만 천만의 말씀입니다. 모든 종교, 무신론자들도 다 기도하고 믿음생활 합니다. 우리는 늘 우리의 오감을 통해서 보고 듣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그 마음속에는 뭔가를 믿고 그려보고 소망하게 돼 있습니다. 여러분 우리 마음속에서 어떤 것을 보고 듣고 생각하면서 우리 마음에 자연스럽게 믿게 되고 소망하고 기대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게 바로 믿음이고 기도입니다.

 

문제는 그 대상이 누구인가 하는 차이뿐이지요. 그리스도인들은 마땅히 그의 나라와 의를 구하는 것이지만 모든 다른 종교, 믿지 않는 자들은 자기 나라와 자기 의를 구하는 그 차이 밖에 없는 것입니다. 모든 사람들은 기도하고 믿음생활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자녀인 우리는 똑같이 기도하고 믿음생활 하지만 우리는 그의 나라와 의를 구한다는 것입니다. 그 차이 밖에 없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사는 것 자체가 기도입니다. 시간을 떼어놓고 한적한 곳에 이른 새벽 미명에 밤늦도록 산에 올라가셔서 그렇게도 기도하셨지만 24시간 다니시면서 계속 하나님과 교제하신 것입니다. 할렐루야! 우리의 삶도 그렇게 돼야 합니다.

 

주기도문은 새벽 미명에 밤늦게 하는 기도가 아닙니다. 살아가면서 하는 기도입니다. 늘 살아가면서 숨 쉬면서 이 땅에 살아가면서 하는 기도가 바로 이 주기도문이란 사실입니다. 할렐루야! 예수님은 주기도문대로 사셨고 당신이 사신 방식대로 우리에게 가르쳐 주신 것입니다. 할렐루야! 밤늦도록 한 기도는 저 첫 파트입니다.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여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 바로 이것이 하나님과의 친밀함입니다. 밤에 한적한 곳에서 예수님께서 드렸던 기도가 바로 저 기도입니다. 그러나 그렇게 기도하고 아침에 태양이 뜰 때에 세상에 나가서 행하셨던 일은 나라이 임하옵시고 뜻이 하늘에서 이룸같이 땅에서 이루어지도록 하셨습니다. 이 더러운 질병아 떠나갈지어다! 이 귀신아 떠나갈지어다! 바람아 잠잠할 지어다! 나사로야 나오너라! 바로 뜻이 하늘에서 이룸 같이 땅에서 이루어지도록 하는 기도를 행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죄가 없으신 분이십니다. 인자로 이 땅에 오셨지만 죄가 없으신 분입니다. 우리는 구원을 얻었고 하나님 자녀이지만 우리의 육신은 우리의 마음은 여전히 죄 가운데 살고 있습니다. 그래서 이 후반부를 우리에게 가르쳐 주신 것입니다. 늘 회개하고 용서하고 마귀에게 시험받지 않고 하나님과 교제하며 주의 뜻을 이루도록 우리에게 기도를 가르쳐 주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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