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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기도문Ⅱ
2016년 11월 15일 화요말씀치유집회 메시지
2016년 10월호 이후의 <HTM 메시지>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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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시간에는 주기도문을 “야베스의 기도”, “십계명”과 비교하여 주기도문이 차지하고 있는 중요성에 대해서 함께 나누었습니다. 오늘은 제자들이 예수님께 “세례 요한이 제자들에게 기도를 가르쳐 준 것처럼 우리에게도 기도를 가르쳐 주옵소서”라고 요청했을 때 예수님께서 “너희는 이렇게기도하라”라고 말씀하시며 가르쳐주신 “주기도문”에 대한 구체적인 설명을 조금 더 하도록 하겠습니다.
사실 예수님 당시에도 구약에서 전승된 주기도문과 비슷한 기도들이 많이 있었습니다. 예를 들면 이스라엘 백성은 누구나 신명기 6장 4절에서 9절의 말씀을 쉐마라고 부르며 쉐마로 늘 기도했고, 또 공식적인 모임에서는 테필라, 카디쉬 같은 주기도문과 비슷한 기도들을 늘 하고 있었습니다.
이스라엘아 들으라 우리 하나님 여호와는 오직 유일한 여호와이시니 너는 마음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라 오늘 내가 네게 명하는 이 말씀을 너는 마음에 새기고
네 자녀에게 부지런히 가르치며 집에 앉았을 때에든지 길을 갈 때에든지 누워있을 때에든지 일어날 때에든지
이 말씀을 강론할 것이며 너는 또 그것을 네 손목에 매어 기호를 삼으며
네 미간에 붙여 표로 삼고 또 네 집 문설주와 바깥 문에 기록할지니라 신6:4-9
예수님 당시에도 주기도문과 비슷한 기도들을 이미 계속해 오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왜 예수님의 제자들은 예수님께 “기도를 가르쳐 주십시오”라고 요청을 했을까요? 한 마디로 말하자면 예수님의 삶과 살아가는 방법, 또 예수님께서 하나님 아버지와 교제하는 모습이 그 당시의 사람들, 즉 종교 지도자들, 바리새인, 서기관, 율법사, 장로들과는 완연히 달랐기 때문이었습니다.
누가복음 4장 16절을 보면 가장 극적인 사건이 아주 명료하게 나와 있습니다.
예수께서 그 자라나신 곳 나사렛에 이르사 안식일에 늘 하시던대로 회당에 들어가사 성경을 읽으려고 서시매 눅4:16
사실은 예수님께서 어린 시절에도 쉐마, 테필라, 카디쉬 같은 기도를 똑같이 하시며 지내 오셨다는 것입니다. 나사렛에서 공생애 사역을 시작하기 위해서 “안식일에 늘 하시던 대로 회당에 들어가사 성경을 읽으려고 서시매”, 그런데 이번에는 늘 하시던 대로 회당에 들어가기는 하셨지만, 과거와는 완전히 다른 일을 행하셨습니다.
누가복음 4장 6절에서 그렇게 말씀하시고 난 다음 17절을 보면
선지자 이사야의 글을 드리거늘 책을 펴서 이렇게 기록된 데를 찾으시니 곧 주의 성령이 내게 임하셨으니
이는 가난한 자에게 복음을 전하게 하시려고 내게 기름을 부으시고 나를 보내사 포로 된 자에게 자유를,
눈 먼 자에게 다시 보게 함을 전파하며 눌린 자를 자유롭게 하고
주의 은혜의 해를 전파하게 하려 하심이니라 하였더라 눅4:17-19
말씀하셨고 그러고는 책을 덮으셨습니다. 그 다음에 사람들이 다 주목하여 볼 때에 완전히 충격적인 말씀하셨습니다. 바로 21절의 말씀입니다.
이에 예수께서 그들에게 말씀하시되 이 글이 오늘 너희 귀에 응하였느니라 하시니 눅4:21
요셉의 아들 예수가 어디를 갔었는지 모르지만 고향에 돌아와서는 회당에서 옛날 하던 방식으로 하지 않고, 책을 읽고 난 다음에 “그들에게 말씀하시되 이 글이 오늘 너희 귀에 응하였느니라”라는 정말 충격적인 말씀을 하신 것입니다. 그리고는 고향 사람들로부터 배척을 받으시고 공생애 사역을 시작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공생애 사역 동안에 하신 일은 마태복음 4장 23절에 잘 나와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율법과 선지자에 대해서 가르치시고, 하나님나라 복음을 선포하시고, 병든 자를 치유하시고, 귀신을 쫓아내시는 일들을 행하셨습니다.
제자들은 예수님께서 행하시는 일들과 사역을 보고, 선포하시는 말씀을 듣고, 기도하시는 모습을 보면서 당시에 그들이 하던 기도와는 완전히 다르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의 메시지가 세상 사람과 당시의 종교지도자들의 메시지와는 완전히 다르다는 것을 알았기에 예수님께 “우리에게 기도를 가르쳐 주십시오”라고 한 것입니다.
예를 들어 마태복음 7장 마지막 부분에 보면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예수께서 이 말씀을 마치시매 무리들이 그의 가르치심에 놀라니 이는
그 가르치시는 것이 권위 있는 자와 같고 그들의 서기관들과 같지 아니함일러라 마7:28-29
구약적인 사고방식으로 말씀하신 것이 아니라 하나님나라의 사고방식으로, 하나님의 아들로서 이 땅을 구원하시기 위해서 믿지 않는 우리들을 자녀 삼으시고, 영생을 주시기 위해서 우리에게 선포하신 말씀을 듣고 제자들은 충격을 받은 것입니다.
제자들은, 그렇다면 아버지와의 관계는 지금까지 배웠던 그런 관계가 아니라 완전히 다른 관계라는 사실을 깨달았고 “우리에게 기도를 가르쳐 주시옵소서” 이렇게 요청을 한 것입니다.
누가복음 11장 1절의 “요한이 자기 제자들에게 기도를 가르친 것과 같이 우리에게도 가르쳐 주옵소서”라는 제자들의 요구에 마태복음 6장 9절에서 “그러므로 너희는 이렇게 기도하라”라고 말씀하시고 주기도문을 가르쳐 주셨습니다. 마태복음 6장 9절에 앞서 5절부터 8절까지의 말씀을 보면 예수님께서는 그 당시에 기도했던 종교지도자들과 백성들의 기도를 비판하셨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그러므로 너희는 이렇게 기도하라”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그 당시에 이렇게 기도하는 것을 보시면서 “너희는 이렇게 기도하지 말고 내가 가르쳐 준 대로 기도하라”라고 말씀하셨기 때문에 주기도문을 제대로 이해하기 위해서는 “너희는 이렇게 기도하면 안 된다”라고 하신 것부터 우리는 먼저 알아야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마태복음 6장 5절부터 8절까지 이렇게 기도하면 안 된다는 것을 세 가지로 말씀해주셨습니다.
너희는 기도할 때에 외식하는 자와 같이 하지 말라 그들은 사람에게 보이려고 회당과
큰 거리 어귀에 서서 기도하기를 좋아하느니라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그들은 자기 상을 이미 받았느니라 마6:5
하나님께서 율법을 주신 것은 우리를 구원하기 위함이셨습니다. 율법을 통해서 하나님의 법이 무엇인지 우리에게 알려주심으로써, 우리가 얼마나 하나님 법 밖에서 죄 된 삶을 살고 있는지를 알려 주신 것입니다. 그리고 때가 이르기 전까지는 제사를 통해서 동물의 피로 우리의 죄를 덮어주시는 은혜의 은혜를 우리에게 베풀어 주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정말 우리에게 원하셨던 것은 단지 행위법이 아니라 심령법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사마리아 수가 성 여인을 만나셨을 때 다시금 하나님나라가 오면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될 때가 있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바로 그것을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입니다. 그런데 유대인들은 하나님의 율법을 변질시켜서 유대교로 만들고 자신의 행위만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지키고 행하면 하나님께서 축복해 주신다는 식으로 신앙생활을 해 왔던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 당시의 종교지도자들은 외식하는 자들이었습니다. 외식한다는 것은 연극배우와 같다는 의미입니다. 헬라어로는 “히포크리테스”라고 하며 연극배우를 칭합니다. 연극배우는 자기의 소견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맡은 역할에 따른 행동을 하고 말을 합니다.
그런데 그 당시에는 심령법으로 정말 하나님과 교제하기 보다는 행위법만으로 하나님과 교제함으로 인해서 진정으로 하나님께 기도를 드리기 보다는 다른 사람에게 보이려고 기도하던 사람들이 너무나 많았다는 것입니다. 그것을 예수님께서는 외식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니까 좋은 옷을 입고 그럴 듯한 모습으로 소리를 내어서 다른 사람이 듣도록 기도했고, 백성들은 그 사람을 보고 존경받을만한 사람이라고 여기도록 자기 자신을 꾸미고 기도했다는 것입니다.
우리도 그런 기도를 하는 경우가 많이 있습니다. 말을 잘 못한다 할지라도 전심으로 하나님께 기도하기 보다는 외운 성경구절과 미사여구를 넣어서 유창하게 기도하지만, 하나님에 대한 자신의 본심이 없는 기도를 드리는 사람들이 너무 많다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바로 그런 기도를 하지 말라고 하신 것입니다. 다른 사람에게 보이려는 기도가 아니라 내 마음 전부를 하나님께 드리는 기도를 해야 되는데, 어떤 면으로 보면 우리도 우리의 마음을 잘 모를 때가 많은 것 같습니다.
이 말씀에서는 외식한다는 것을 다른 사람에게 보이려는 것만으로 이야기하지만, 좀 더 구체적으로 이야기 하면 하나님 앞에 기도하면서도 자신의 본심을 드러내지 않고, 자신 안에 있는 두려움이나 죄의식이나 부족함들은 다 감추어 놓고 자기의 경험에 기초해서 자기의 생각과 감정을 하나님께 그럴듯하게 기도를 하는 사람들도 너무 많다는 의미입니다. 그것도 마찬가지로 외식하는 자입니다.
우리가 진정으로 외식하지 않을 때는 사실은 내가 무슨 기도를 해야 되는지도 모를 경우가 많이 있습니다. 너무나 힘이 들어서 이 상황에서는 뭐라고 기도해야 될지 모를 때도 많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로마서에서는 이렇게 말씀하고 계십니다.
이와 같이 성령도 우리의 연약함을 도우시나니 우리는 마땅히 기도할 바를 알지 못하나
오직 성령이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우리를 위하여 친히 간구하시느니라 마음을 살피시는 이가
성령의 생각을 아시나니 이는 성령이 하나님의 뜻대로 성도를 위하여 간구하심이니라 롬8:26-27
통곡하면서 내가 이 상황이 너무 힘들고 어려워서 뭐라고 기도할지도 모르는 그런 상황이라 할지라도, 자신의 본심 있는 그대로를 하나님 앞에 나타낼 때에 성령님께서 그 기도를 받으시고 하나님께 올려드림으로 하나님의 뜻에 맞는 기도를 행하게 하신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외식하는 기도를 하지 말아야 합니다. 아멘!
그런데 우리는 자기 자신을 표현하고 하나님께 드리지만 사실 그것도 보면 본심이 아니라 연극배우처럼 드리는 경우가 너무 많다는 것입니다. 두 번째로는 다음처럼 말씀하십니다.
너는 기도할 때에 네 골방에 들어가 문을 닫고 은밀한 중에 계신 네 아버지께 기도하라
은밀한 중에 보시는 네 아버지께서 갚으시리라 마6:6
앞서 말한 것처럼 회당, 성전에서 기도하는 것이 아니라 “골방에 들어가서 문을 닫고 은밀한 중에 계신 네 아버지께 기도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구약시대에는 성전 중심적인 삶을 살았습니다. 그 영향으로 오늘날도 교회 중심적인 삶을 살라는 이야기를 오래 전부터 들어왔습니다. 교회 중심적인 삶을 사는 것이 잘못되었다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나 교회만 거룩한 곳이고 교회에만 하나님이 계신다고 생각한다면, 여러분이 지금도 여전히 구약적인 사고방식에 사로잡혀 있다는 것입니다.
고린도전서 6장 19-20절을 보면 바로 우리의 심령이 하나님의 제단이 있는 곳입니다. 과거에는 성막에 하나님이 계셨지만 지금은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이 바로 우리 심령 안에 찾아오셨습니다. 아멘!
너희 몸은 너희가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바 너희 가운데 계신 성령의 전인 줄을 알지 못하느냐
너희는 너희 자신의 것이 아니라 값으로 산 것이 되었으니 그런즉 너희 몸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라 고전6:19-20
이 말씀은 구약시대 백성들의 삶, 즉 율법적인 사고방식이 아니라 하나님나라의 사고방식으로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직접 가르쳐 주시는 것이라는 것을 금방 알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구약적인 사고방식으로 한다면 성전 중심적이고 심지어는 밖에 나가도 성전을 향해서 절을 하고 기도하는 것이 구약의 사람들의 기도 패턴이기 때문입니다.
내가 여호와께 바라는 한 가지 일 그것을 구하리니 곧 내가 내 평생에 여호와의 집에 살면서
여호와의 아름다움을 바라보며 그의 성전에서 사모하는 그것이라 시27:4
오직 한 가지 일, 바로 성전 안에 있는 것을 가장 아름답고 귀한 일로 여겼습니다.
내가 주의 지성소를 향하여 나의 손을 들고 주께 부르짖을 때에 나의 간구하는 소리를 들으소서 시28:2
어디를 가든지 지성소가 있는 쪽을 향해서 기도하는 것이 구약적인 사고방식이었기 때문에,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은 굉장히 충격적인 말씀이었습다. 회당이나 성전에서 기도하는 것이 아니라 “골방에 들어가서 문을 닫고 은밀한 중에 계신 네 아버지께 기도하라 은밀한 중에 보시는 네 아버지께서 갚으시리라”, 이 말씀은 더 이상 하나님은 회당에 계시는 분이 아니라 바로 우리 안에 계신다는 의미입니다. 그래서 우리의 마음이 더 이상 세상에 묶이는 것이 아니라 아무도 없는 골방에 가서 내 심령 안에 찾아오신 하나님과 은밀하게 교제하라는 것입니다.
“너희는 이렇게 기도하지 말라”라고 말씀하시는 이 말씀에도 예수님께서는 이미 하나님나라의 관점으로 말씀하고 계십니다. 다른 말로 이야기하면 아직 오지 않은 하나님나라를 바라보며 우리에게 가르쳐 주신다는 것입니다. 아직 예수님께서 죽으시고 부활하시고 승천하시고 보혜사 성령님이 오시지 않았지만, 예수님은 앞으로 우리 모두가 하나님나라로 침노해서 자녀의 삶을 살 것을 바라보시면서 “너희는 이렇게 기도하라”라고 말씀하고 계신다는 것입니다. 할렐루야! 아멘!
“은밀한 중에 계신 네 아버지께 기도하라 은밀한 중에 보시는 네 아버지께서 갚으시리라”라고 말씀하십니다. 이것은 다른 말로 이야기하면 우리는 기도할 때 조용한 장소를 찾지만, 장소가 아니라 사실은 우리 마음의 모든 생각과 감정을 다 내려놓은 그곳, 그곳이 바로 은밀한 곳이고 지성소며 속죄소 앞이라는 사실입니다. 할렐루야! 아멘.
바로 그곳이 골방에 들어가 문을 닫고 은밀한 중에 계신 아버지 앞에 서 있는 곳이라는 말씀입니다. 그때 하나님은 말씀하시고, 그 때 하나님은 우리를 치유하십니다. 출애굽기에서도 바로 그 속죄소 앞에서 세라핌 즉, 천사들이 있는 그곳 안에서 하나님이 말씀하신다고 했습니다.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지금 우리 심령이 하나님의 성전이라는 것을 알아야 하고, 우리 심령 안에 하나님의 제단이 있기 때문에 우리의 모든 생각, 감정들을 다 내려놓는 그곳이 바로 은밀한 곳이 되어야 합니다.
이것은 단지 교회 안에서만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어디에서라도 하나님과 교제할 수 있다는 뜻입니다. 할렐루야! 내가 서 있는 곳이 하나님께서 서 계신 곳이며, 내가 가는 곳이 하나님께서 가시는곳입니다. 우리는 지금 우리 안에 계신 하나님을 나타내는 삶을 사는 것입니다. 아멘! 그러므로 여러분들이 하나님의 영광의 임재의식 가운데 살기를 축원합니다. 우리의 찬양과 경배를 드리며 우리의 마음을 내려놓고 마음을 비우고, 하나님께서 우리 심령과 우리 마음에 임하시도록 기다리는 그 은밀한 곳, 그 곳에서 주님은 우리를 만지시고 찾아오시고 말씀하시는 것을 우리는 경험할 수 있습니다.
또 기도할 때 이방인과 같이 중언부언하지 말라 그들은 말을 많이 하여야 들으실 줄 생각하느니라.
그러므로 그들을 본받지 말라 구하기 전에 너희에게 있어야 할 것을 하나님 너희 아버지께서 아시느니라 마6:7-8
그분이 우리 안에 오셨기 때문에 우리보다 우리를 더 잘 아십니다. 할렐루야! 우리의 영이 우리를 압니다. 우리 영 안에 하나님의 영이 계십니다. 우리가 보기에는 우리가 원하고, 우리가 생각하고, 우리가 느끼는 것 같지만 사실 우리도 우리 본심이 무엇인지를 모릅니다. 우리 심령 안에 있는 본심은 알지 못합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우리의 심령 안에 와 계십니다. 할렐루야!
그런데 기도할 때 이방인 같이 중언부언한다는 것은 동일한 말을 반복적으로 장황하게 끈질기게 계속적으로 기도한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갈멜 산에서 바알 선지자들과 엘리야가 대적할 때 450명의 바알 선지자들이 행했던 일과 똑같은 것입니다. 그들은 제단 앞에서 바알 신을 외치며 하루 종일 춤을 추었습니다. 나중에는 칼로 자해하면서까지 춤을 추었지만 결국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중언부언! 똑같은 말을 반복적으로 계속적으로 장황하게 계속 기도한다, 이 말 속에는 어떠한 대가를 신에게 치르면 그 대가에 내가 드린 헌물에 대한 대가가 더해져서 무엇인가를 받아낼 수 있다는 생각이 포함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세상적인 관점입니다. 내가 아무것도 드리지 않았는데 어떻게 받을 수 있겠느냐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내가 신에게 뭔가 제물을 드리고 내 노력을 드리고 내 정성이나 치성을 드려야만 신이 감동하고 나에게 무엇인가를 해 주지 않겠느냐는 것입니다. 성황당에서 물을 떠놓고 똑같은 말로 계속 빌던, 그 옛날 우리나라의 샤머니즘을 생각해 보면 쉽게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우리에게 제물을 원하시는 것이 아니라 우리 자신을 원하십니다. 아멘! “이방인과 같이 중언부언하지 말라”, 말을 많이 하지 않아도 담대히 하나님의 뜻대로 기도할 때 하나님이 들으신다는 것을 우리는 알고 있습니다.
너희 하늘 아버지께서 이 모든 것이 너희에게 있어야 할 줄을 아시느니라
그런즉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 마6:32-33
같은 말을 계속 해서 하나님을 감동시키려고 하지마십시오! 하나님이 내 기도를 잘 모르신다는 생각으로 계속해서 하나님이 들으시도록 그렇게 중언부언하지 마십시오! 천부께서는 이미 우리의 기도를 들으셨을 뿐만 아니라 우리의 심령까지도 알고 계시는 분이십니다! 아멘!
바로 이 세 가지를 말씀하신 것입니다. 이 세 가지를 가만히 생각해 보면 그 당시의 율법적인 사고방식으로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새로운 세상, 즉 하나님나라에서 해야 되는 기도에 대해서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가르쳐주신 것입니다. 그리고 결론적으로 “그러므로 너희는 이렇게 기도하라”라고 말씀하시고 주기도문을 우리에게 알려주신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여기서 또 한 가지 알아야 될 사실은 “이렇게 기도하라”라는 뜻은 주기도문을 문자적으로 토씨 하나 틀리지 않고 암송하라는 뜻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가장 적절한 번역을 보면 “Pray then in this way” 즉, 이런 방식으로 기도하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주기도문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기 때문에 주문을 외우듯이 외워서 문장의 뜻도 깊이 생각해 볼 겨를도 없이 기도하고는 끝내고 만다는 것입니다. 공적인 예배에서 암송할 때는 이 말씀 그대로 기도하지만,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가르쳐 주신 기도는 무조건 암송하라는 뜻이 아니라 이런 방식으로 기도하라는 뜻이라는 것을 아셔야 합니다.
따라서 앞으로는 주기도문을 토대로 예수님께서 뭐라고 가르쳐 주셨는지, 또 제자들은 어떻게 이 주기도문을 적용했는지를 아셔야 합니다. 그리고 주기도문에 기초해서 여러분의 상황에 맞게 기도할 줄도 알아야 할뿐만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해야 합니다. 아멘!
심지어 어떤 사람은 주기도문은 구약적인 기도라고 생각하기도 합니다. 왜냐하면 예수님께서는 내 이름으로 기도하라고 하셨는데 주기도문에는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이 없기 때문입니다. 사실 주기도문만큼 이상한 기도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복음의핵심적인 용어가 하나도 없기 때문입니다. 예수그리스도, 십자가, 구원, 성령 등의 단어가 한 번도 나오지 않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가장 오랫동안 그리고 가장 많이 드려진 기도가 바로 주기도문이라는 것입니다.
주기도문은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이 기도를 가르쳐주신 그 시점에서 기도하라고 가르치신 것이 아닙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하나님나라의 복음을 전파하시고 모든 사람들이 침노해 들어갈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 예수님은 보혜사 성령님을 보내주셨습니다. 그때부터 하나님나라가 시작되었고, 바로 그때부터 주기도문을 하라는 뜻으로 주신 것입니다. 아멘! 예를 들어서 어떻게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라고 기도할 수 있습니까? 우리 안에 예수님이 계시지 않는다면 어떻게 우리가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라고 기도할 수 있겠습니까? 그 것은 있을 수가 없는 이야기입니다. 할렐루야!
이 한마디만을 생각해도 주기도문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의 자녀가 된 자만이 드릴 수 있는 기도라는 것을 우리가 알 수 있습니다. 아멘! 그러니까 주기도문 전체가 예수 그리스도 없이는 이루어질 수가 없는 기도라는 것을 여러분들은 알아야 합니다. 아멘! 그렇기 때문에 기도는 주기도문과 같은 방식으로 하고, 반드시 예수 그리스도 이름으로 기도를 마쳐야 한다는 것을 아시기를 원합니다. 할렐루야!
그렇다면 주기도문이 왜 필요할까요? 복음적인 관점에서 한 번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예수님께서는 왜 우리에게 주기도문을 가르쳐 주셨을까요? 첫 번째는 하나님과 새로운 관계 회복을 위해서, 그리고 내가 누구이며 우리가 누구인지를 알도록하기 위해서입니다. 그래서 주기도문은 먼저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여”로 시작합니다. 거룩하신 여호와 하나님께서 우리 아버지가 되시고, 우리는 그분의 자녀가 되는 것입니다. 즉시로 하나님은 누구이시며, 하나님 안에서 우리가 누구인지를 알게 되는 것입니다. 할렐루야! 또한 그 관계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만 이루어질 수 있다는 것을 우리에게 알려주시는 것입니다. 할렐루야! 아멘!
두 번째는 삼위일체 하나님과 교제하기를 원하시기 때문입니다.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가 성립되기 위해서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어야 합니다. 나라가 임하옵시고 뜻이 하늘에서 이룸같이 땅에서 이루어지기 위해서는 성령님의 역사 없이는 이루어질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주기도문 안에는 삼위일체 하나님과 교제하는 것이 온전하게 들어있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어느 곳에 있든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성령님을 통하여 하나님 아버지와 교제하는 것입니다. 아멘! 그런데 어떤 사람은 성부 하나님으로, 어떤 사람은 성자 하나님으로, 어떤 사람은 성령 하나님을 통해서만 하나님과 교제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잘못된 것입니다. 우리는 언제 어디서라도 삼위일체 하나님과 함께 교제하는 것입니다. 할렐루야!
세 번째로는 세상적인 사고방식에서 벗어나서 하나님나라 사고방식을 배우기를 원하시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전하신 복음은 하나님나라의 복음입니다. 하나님의 통치에 관한 복음입니다. 그리고 우리는 하나님나라에서 자녀의 삶을 살고 있으며, 더 이상은 육의 생각이 아니라 영의 생각으로 살아야 합니다. 아멘! 땅의 것이 아니라 위의 것을 생각해야 합니다. 우리는 하나님나라의 실체를 볼 줄 알아야 하고, 체험할 줄도 알아야 합
니다.
세상적인 사고방식으로는 “뜻이 하늘에서 이루어진 것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이다” 이렇게 기도할 수가 없습니다. 우리는 이 땅에서 “주여!” 이렇게 외칠 수밖에 없었는데, 하나님의 통치가 임함으로 “뜻이 하늘에서 이루어진 것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이다”라고 기도할 수 있습니다. 우리의 시민권은 하늘에 있습니다. 할렐루야! 우리는 대사로서 지금 이 땅에 살고 있는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성경을 잘못 해석해서 우리는 나그네와 같다, 이
방인과 같다고 이야기를 합니다. 우리가 나그네고 이방인이면 이 세상은 누구의 것이라는 것입니까? 마귀의 것입니까?? 아닙니다. 이 땅의 원 주인은 우리입니다. 아멘!
그런데 우리가 죄를 지음으로 쫓겨난 것입니다. 그러나 이제 우리 안에 하나님이 오심으로 인해서 우리는 나그네이고 이방인이 아니라 원주민입니다. 이 땅의 원주민입니다. 우리는 주인의식을 가져야 됩니다. 왜냐하면 이 땅은 우리 아버지의 것이기 때문입니다. 아멘! 그렇기 때문에 천성을 향해서 나그네 길 가는 것처럼 그렇게 사는 사람들은 하나님나라의 복음이 뭔지를 모르는 것입니다. 진정으로 이 땅이 우리 아버지의 땅이고, 내가 원주민이라는 것을 알 때에는 이 땅의 것을 조금이라도 더 소유해서 내 것으로 만들려고 하는 마음들이 사라지게 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우리 아버지 것을 마음대로 쓸 수 있기 때문입니다.
마귀에게 빼앗기는 것이라면 내가 가져야 되고 소유해야 되고 내가 더 붙들어야 합니다. 그러나 이 땅의 모든 것이 우리 아버지의 소유임을 알고, 우리 아버지의 것은 내가 자녀로서 마음대로 쓸 수 있다는 것을 안다면 왜 소유해야합니까? 하나님은 우리가 필요할 때 필요한 것 이상으로,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능히 넘치게 채우시는 우리 아버지이십니다. 아멘!
마지막으로 주기도문이 필요한 이유를 한 가지 더 말씀드리자면, 하나님의 뜻을 이 땅에 이루기 위해서입니다. 하나님께서 본래 우리에게 의도한 목적은 하나님의 대리인으로서 이 땅을 통치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죄를 지음으로 그 통치권이 마귀에게 넘어간 것입니다. 이제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모든 통치권이 자녀인 우리에게 돌아왔고, 우리는 상속자로서 유업을 이어가야합니다. 아멘! 그 말은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시며 다 이루신 약속의 말씀의 실체를 우리가 이 땅에 나타내야 합니다. 그것이 자녀의 삶이라는 것입니다. 다른 말로 이야기하자면 주님의 약속의 말씀을 이 땅에 실체로 이루어가는 것이 우리의 삶이라는 것입니다. 그 일을 하도록 우리에게 이 땅의 삶을 주신 것입니다. 할렐루야! 아멘!
세상적 사고방식으로는 주기도문을 제대로 이해할 수가 없습니다. 성령님 안에서 하나님의 자녀만이 주기도문을 제대로 이해할 수 있고, 체험할 수 있게 된다는 것입니다. 할렐루야! 아멘!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가르쳐 주신 주기도문은 서언과 본론이 있고 송영이 있습니다. 그런데 본론은 세 가지 기도로 나뉘어져 있습니다.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 이 부분은 서언입니다. 본론은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 나라가 임하시오며 뜻이 하늘에서 이루어진 것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이다”이 부분입니다.
우리가 지난 시간에 살펴본 대로 십계명 중 1계명에서 4계명까지가 본론이며 하나님에 대한 기도입니다. 그리고 십계명의 나머지 5계명부터 10계명까지는 우리에 대한 기도입니다. 그 부분이 바로 본론의 두 번째로 “오늘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시옵고 우리가 우리에게 죄 지은 자를 사하여준 것같이 우리 죄를 사하여 주시옵고 우리를 시험에 들게하지 마시옵고 다만 악에서 구하시옵소서”입니다. 그 다음이 “대개 나라와 권세와 영광이 아버지께 영원히 있사옵나이다”인데, 이 부분은 송영이고 본래 원본에는 송영이 없다는 것이 정설입니다. 그렇지만 이 송영을 붙이는 것이 결코 잘못된 것이 아니라 이 송영을 붙임으로써 이 주기도문을 온전하게 합니다.
그런데 많은 사람들이 본론 중에서 앞의 세 가지는 하나님에 대한 기도이고, 뒤의 세 가지는 우리에 대한 기도라고 분류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분명히 알아야 될 것은 주기도문의 본론은 나눌 수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주기도문의 핵심은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 나라가 임하시오며 뜻이 하늘에서 이루어진 것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이다”이 부분입니다.
이 핵심을 우리가 이루기 위해서 나라가 임했기때문에 뜻이 하늘에서 이룸같이 땅에서 이루어지도록 하기 위해서 우리 삶은 어떻게 되어야 하느냐는 것입니다. 우리는 “오늘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시옵고” 이 부분에서는 출애굽 한 다음 광야에서 하나님께서 공급하신 만나와 메추라기를 생각합니다. 아니오! 그렇지 않습니다. 예수님께서 “사람이 떡으로만 사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입으로 나오는 말씀으로 사는 것이니라” 하신 것처럼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을 이루는 존재입니다. 아멘! 이 양식을 육신의 일용할 양식으로만 생각하지 않기를 바랍니다. 다른 말로 하나님께서 주시는 말씀을 가지고 있지 않으면 하루를 살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우리의 삶은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것이고 그것이 우리의 삶의 목적이기 때문입니다. 아멘!
하나님께서 주시는 말씀이 양식입니다. 말씀의 양식을 먹어야만 일용할 양식까지도 하나님께서 채워주시는 것입니다. 구약적으로는 오늘 먹고 살아야 될 육적인 양식이라고 생각하지만, 만약 이것을 육적인 양식으로 생각한다면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가르쳐 주신 곳곳의 말씀과 상치되어 이해할수 없게 된다는 사실입니다. 저는 여러분들이 매일 아침에 말씀을 먹고 말씀을 가지고 하루를 시작하기를 축원합니다.
오늘 주시는 말씀! 오늘이라는 말은 지금부터 24시간을 의미합니다. 하루를 살아가기 위해서 필요한 것은 주님의 말씀입니다. 우리는 말씀을 이루는 존재입니다. 다른 말로 하나님의 뜻을 이 땅에 이루는 존재라는 것입니다. 그 말이 바로 “뜻이 하늘에서 이루어진 것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이다” 라는 것입니다. 그 다음은 “우리가 우리에게 죄지은 자를 사하여 준 것같이 우리 죄를 사하여 주시옵고”인데, 이 말씀은 회개와 용서입니다. 그 다음에 “우리를 시험에 들게 하지 마옵시고 다만 악에서 구하시옵소서” 이 부분은 우리를 세상으로부터 보호하는 것입니다. 그 전략은 자기 스스로부터 벗어나는 것이고. 세상으로부터 벗어나는 것입니다. 그럴 때 이름을 거룩히 여길 수 있고, 하나님의 영광이 임했을 때 주의 뜻을 이 땅에 이룰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것을 분리해서 앞쪽은 하나님께 드리는 기도이고 뒤쪽은 우리를 위해서 하는 기도라고 생각한다면 주기도문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 것입니다. 주기도문은 나누어진 것이 아니라 모두 하나로 유기적으로 합쳐져 있습니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의도하신 목적대로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로 회복된 다음에 하나님이 주시는 권세와 능력을 가지고 이 땅에 주의 뜻을 이루어가는 상속자, 유업을 이루어가는 자녀의 삶을 살도록 하기 위해서 우리에게 가르쳐 주신 기도가 주기도문이란 사실입니다. 아멘!
많은 사람들이 주기도문을 간구 또는 청원으로 생각하고 있습니다. 극단적인 경우에는 예수님이 재림하시는 종말 때에 이 기도가 이루어진다고 생각합니다. 그렇게까지 생각하지는 않더라도 주기도문의 대부분이 받으시오며,주시옵고, 이런 표현으로 되어 있기 때문에 간구하고 청원하는 기도로 착각하고 있습니다. 아니오! 그렇지 않습니다. 주기도문은 바로 현재적 하나님나라의 실제를 이루기 위한 기도입니다. 아멘! 이 기도는 지금 여기에서 이루는 기도입니다. 단지 간구하고 그렇게 되기를 원하고 청원하는 기도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이 기도를 배운 첫 제자 베드로가 한 일이 무엇입니까? “은과 금은 내게 없거니와 내게 있는 이것을 네게 주노니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 이름으로 일어나 걸으라” 선포한 것입니다. 이 기도는 “주여 도와주시옵소서!”, “주여 이렇게 해 주시옵소서”와 같은 청원이나 간구의 기도가 아닙니다. 우리는 주기도문을 하나님나라의 사고방식으로 다시금 새롭게 볼 줄 알아야 합니다. 그럴 때 주기도문은 이 땅에서 주의 자녀가 누릴 수 있는 가장 강력하고 놀라운 기도라는 것을 알게 됩니다. 오늘 날이 시대에 이 주기도문이 회복되어야만 세상이 변화될 수 있다는 것을 여러분이 아시기를 축원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