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이센테니얼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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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INGDOM LIFE &

힐링시네마
바이센테니얼맨(Bicentennial Man)

 

작가 이애경

 

인간 형태의 로봇들이 정의를 지키기 위해 싸우는 <터미네이터>, <로보캅>부터 터프하고 웅장한 파이터 로봇들의 이야기를 그린<리얼스틸>, <트랜스포머>, 그리고 인간과 로봇의 경계를 아슬하게 넘는 휴머니즘적인 영화 , <아이, 로봇>까지, 로봇에 관한이야기는 언제나 우리의 상상력 속의 한 부분을 차지해왔다. 테크놀로지가 발달하고 상상 속에만 있던 로봇들이 실제로 제작되고기능하기 시작하면서 로봇과 인간이 펼쳐내는 상상의 이야기는 더욱 넓고 깊어져가고 있다. 로봇과 인간은 서로 상호교류하고 마음을 나누고 심지어 결혼에 이르러 가족을 이루기도 한다. 물론 여기에 복제인간의 이야기까지 더하면 로봇, 복제인간, 인간을 이루는 트라이앵글에 얽히고설킨 이야기는 수도 없이 많아진다.
수많은 영화 소재들 가운데서도 우리는 왜 끊임없이 로봇, 혹은 복제인간 등에 많은 관심을 가지고 그것들에 관한 이야기를 만들어낼까. 분명한 이유 중 하나는 인간의 정체성, 즉 생각하고 존재하는‘나’는 누구인가에 대한 끊임없는 질문들을 풀어나가기 위해 인간과 가장 흡사하다고 여겨지는 생명체를 통해 인간의 존재감과 정체성을 찾으려는 시도가 있기 때문이다.

 


 

과학의 대중화에 크게 기여한 SF의 거장 아이작 아시모프의원작을 모티브로 만든 <바이센티니얼맨>은 인간이 되고자 하는로봇의 성장스토리를 그려낸 영화다. 2000년에 개봉했으니벌써 10여 년 전 영화이지만 지금 다시 봐도 손색없을 정도로뛰어난 퀄리티와 탄탄한 스토리를 갖추고 있다.
2005년 한가로워 보이는 미국 뉴저지의 한 주택. 가장인 리처드가 주문한 가전제품이 집으로 배달되자 아이들과 부인이 호기심과 충격으로 멍해진다. 그들 앞에 나타난 가전제품은 모델명 NDR-114. 설거지, 청소, 요리, 정원손질 등 모든 집안일을척척해내는 가정부 로봇이다. 리처드 가족은 로봇에게‘앤드류’라는 이름을 붙여주고 그는 여주인을 도와 음식을 만들고부엌을 정리하며 가족들과의 생활에 적응하기 시작한다. 그러나 가족들에게 그의 출현이 달갑지만은 않다. 인간처럼 모든것을 다 해내지만, 결코 인간이 아닌 로봇이 불편하기도 하고 어떤 감정과 태도로 대해야하는지 전혀 감을 잡을 수 없었기 때문이다.

그러던 중 리처드는‘앤드류’가 앞집 옆집에도 있는 로봇과 비슷하다고 하기에는 무언가가 다른 것이 존재한다는 것을 조금씩 느끼기 시작한다. 그 시작은 앤드류가 자신이 실수로 막내딸 아만다의 유리조각 말을 깨뜨린 뒤 미안한 마음에 나무로말을 조각해 막내 아만다에게 건네주는 사건이었다. 로봇에게창조의 힘이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일이었다. 이 일을 심상치않게 여긴 리처드는 로봇 제조회사를 찾아가고 앤드류를 조립하는 과정에서 엔지니어가 회로위에 마요네즈 한 방울을 실수로 떨어뜨려 로봇의 신경계에 이상이 생긴 것을 알게 된다. 즉,앤드류는 그 실수로 인해 입력되고 프로그래밍된 대로 일만 하는 로봇이 아니라 지능과 호기심, 게다가 창조력까지 갖춘 로봇이 된 것이다.
제조회사에서는 앤드류를 불량품으로 취급하고 분해해서 연구하겠다며 로봇을 반환하라고 강요한다. 하지만 이미 앤드류에게서 로봇 이상의 감정을 느낀 리처드는 앤드류의 재능을 살려목각디자인을 계속하게 용기를 북돋워주고 은행계좌를 열어주어 최초로 로봇이 돈을 벌어 경제활동을할 수 있게 만들어준다.
앤드류와 가족들이 함께 지내는 많은 시간이 흐르고 막내 아만다는 어엿한 숙녀가 된다. 재미있는 농담과 폭넓은 이해력으로 앤드류는 아만다의 사랑을 듬뿍받았지만 남자친구와 결혼을 해버리는그녀를 보며 무언가 알 수 없는 느낌이자기 머릿속에서 질문으로 떠오르는 것을 깨닫는다. 인간의 감정을 이해하지못하던 그가 감정이라는 것을 조금씩 깨닫기 시작한 것이다.
그러던 어느 날 앤드류는 주인인 리처드에게 자유를 찾고 싶다고 선언한다. 끝없는 공부를 통해 아는 것이 많아지고성장한 그는‘자유’라는 것을 누리는 것이 자신이 가장 하고 싶은 일이라는 것을 깨달은 것이다. 자기의 품을 떠나려는 앤드류를 보며 리처드는 처음엔 섭섭해 하지만 결국 그를 놓아준다. 앤드류는 이때부터 혼자의 삶을 시작한다. 십여 년이 흐른 후 자신과는 뭔가 다른듯한 여자로봇을 우연히 발견한 앤드류는 그녀를 따라 결국 루퍼트 번즈라는곳에서 로봇연구에 몰두하는 로봇전문가를 만나게 되고 그를 통해 조금씩 업그레이드되기 시작한다. 강철 같던 그의피부는 인간의 피부처럼 탄력과 부드러움을 갖게 되었고 얼굴에 다양한 표정을지을 수 있는 근육을 갖게 되었다. 겉모습으로 봤을 때는 영락없는 인간의 모습이었다.
인간의 형태를 갖춘 앤드류는 아만다를찾아가고 그는 그곳에서 아만다를 똑같이 닮은 그녀의 손녀 포샤를 발견한다.그리고 그녀에게 묘한 감정을 느낀다.그리고 결국 사랑에 빠지는 두 사람. 앤드류는 인간이 되기 위해 인공심장과 인공장기 등을 만들어 이식하고 혈관을 만들어 피를 몸속에 넣음으로 숨쉬고, 밥을 먹고, 잠을 자는 인간으로의 변화를결단하게 된다. 물론 그것은 영원히 사는 로봇에서 육체의 한계를 지니고 죽음을 향해 걸어가는 인간으로의 변화를 뜻하는 것이었다.

 

‘I’와‘one’, 종속됨과자유

배달되어온 로봇 앤드류의 스위치가 켜지고 작동되자 제일 처음 리처드 가족에게 한 말은 자기소개. 그리고“안녕!”이라는 인사다. 그리고 앤드류는 자기 시야에 리처드와 아이들이 눈에 들어오자그들에게“당신들이 이쪽의 가족인가요?(Are you one’s family?)”라는 독특한 질문을 한다. 그의 표현에서 두 가지재미있는 사실을 알 수 있다. 하나는 가전제품인 그가 배달되어 오면서 그의 머릿속에는 가족이라는 개념이 잡혀있었다는 것이다. 당신이 나의 주인이냐는질문을 애초에 하지 않았다. 피를 나눈가족도 아니고, 입양된 것도 아니고, 어떤 공동체로 묶여있는 것도 아닌데 그는 ‘가족’이라는 표현을 썼다. 물론 로봇제조 시 프로그래밍 된 것이겠지만 가족이라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 것인지에대해 우리들에게 화두를 던지는 대목이다.
두 번째 재미있는 것은 앤드류는 철저하게 자기와 가족들이 동반자로 살 수 없는 다른 틀에 분류되어있다는 것을 명확히 인식한다는 것이었다. 그것은 앤드류가 사용하는‘one’(이쪽)이라는 단어에서 읽을 수 있다. 인간이라면 당연히 ‘나의’를 뜻하는‘my’라고 사용했겠지
만, 로봇인 앤드류는 자신을 1인칭 대명
사로 부르지 않고 총체적 인칭대명사인 ‘one’으로 표현한다. 예를 들면 ‘저는 가야합니다’라고 말할 때‘I need to go’가 아니라‘이쪽은 가야합니다(One needs to go)’라고 말하는 셈이다. 아마도 로봇 스스로가 자기를 인간으로인식할 수 없도록, 인간과는 다른 태생임을 스스로에게 계속해서 세뇌시키기위해 프로그래밍 된 언어용법일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든다. 어쩌면 로봇회사에서로봇들에게 언어를 프로그래밍 시킬 때 ‘나’라는 단어를 넣어버리면 로봇들 스스로가‘나’란 무엇인가에 대한 질문들을 하게 되고 그것으로 인해 행여 생길수 있는 로봇과 인간의 경계선의 무너짐, 또 그것으로 인한 로봇들의 반란 같은 것을 애초에 봉쇄시키기 위한 전략이아니었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영화 중반까지 앤드류는 ‘I’대신‘one’을 사용하다가 리처드에게‘자유’를달라고 구하는 장면에서 그는 처음으로‘I’ 라는 단어를 내뱉는다. 리처드는 이상하게도 그 변화를 눈치 채지 못한다. 감독이 일부러 그렇게 만든 것인지는 모르겠다. 그 영적인 변화가 나에게는 큰 변화이자 돌파구일 수 있지만 다른 사람들은눈치재지 못한다는 것을 표현하고자 했을 수도 있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리처드가‘자유’가 무엇인지 깨닫고 그것을구하는 시점에 정확히‘나’라는 표현을쓴다는 것이다.
여기서 우리는 뛰어난 하나님의 창조성과 계획을 깨닫게 된다. ‘나’는 누구인가에 대한 질문을 하는 것은 쓸데없는일이 아니라 가장 근본적이고 근원적인진리를 찾아가려는 첫 시도가 된다는 것을. 그리고‘나’를 빼앗겨버린 우리의삶은 로봇의 삶과 별반 다를 게 없다는것을 말이다. 결국 앤드류가 원했던 자유는‘누군가’, ‘이쪽’이 아니라‘나’가 될 수 있는 변화의 시작이었으며 그것은또한 하나님이 인간을 창조하시고 당신의 명령에 따라서 움직이는 로봇이 아니라‘자유의지’를 갖고 살게 허락하신 에덴동산의 아담과 이브를 의미한다는 것이다.

 

개성과 창조력을 바라보는 두 시각

앤드류의 창조성에 신기함을 느낀 리처드가 로봇 제조회사를 찾아갔을 때 사장의 반응은“회로에 심각한 문제가 생겼다”는 것이었다. 사장은 앤드류가 불량품이므로 검사하고 수리해야한다고 표현한다. 정상이 아니니 환불을 해주겠다고 제안한다. 하지만 리처드는‘비정상’ 이 아니라‘개성’이라고 그에게 선언한다. 그리고 집으로 돌아온 리처드는 앤드류에게 그가 가진 개성은 값을 매길수 없는 소중하고 귀한 것이라고 인정해주며 앤드류를 격려한다. 결국 앤드류는이 사건을 통해 뛰어난 조각 아티스트가되어 엄청난 돈을 벌고 재산을 소유하게된다.
후에 앤드류가 자신을 업그레이드해줄로봇기술자 루퍼트 번즈에게 들은 말도동일한 선상에 있다. 그는“기술의 핵심은 제품의 불완전성에 있다. 주름살, 덧니, 희미한 흉터. 이런 것들이 나만의 개성을 갖게 한다. 불완전성이 우리를 특별하게 해준다.”고 앤드류에게 설명해준다.
여기 두 명의 창조자가 있다. 하나는 개성은 비정상이고 잘못됐다고 말하는 창조자고, 하나는 불완전함이야말로 창조품의 개성이고 그 개성이 우리를 특별하게 해준다고 말한다. 하나님은 어떤 쪽에 서 계신다고 생각되는가. 물론 후자일 것이다. 전 세계 70억 인구 중에 똑같이 생긴 사람은 아무도 없으니까. 비슷하다고 할지라도 판박이처럼 똑같지않으며 성격, DNA 등을 다 조합해놓으면 인류의 역사상 나와 동일한 인물은인류 역사가 끝날 때까지 존재하지 않을것이니 말이다.
우리들은 하나님의 형상을 닮은 인간이다. 하나님의 성품도 닮았다. 그렇다면창조품을 대하는 우리들의 시각 또한 하나님의 시각이어야 하고, 그것은 루퍼트번즈의 시각이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하지만 현대를 살아가는 우리의 현실은 어떤가.
우리들은 자신을 남과 비교하고, 또 비교당하고 살아간다. 남들이 다하는 것을해야 한다고 말한다. 개성이 존중되지않으며 불완전함을‘실수’, ‘문제’, ‘흠’, ‘고쳐야할 것’이라고 판단한다. 완전하신 하나님이 온전하게 만들어내신 인간에 대해 우리들은 스스로 불완전하다고 판정 짓고 문제를 삼는다.
“너는 왜 그 모양이니?”, “너는왜그렇게 생겼니?”, “남들만큼만 해!”말로 하지 않아도 우리는 의심의 눈초리를 주거
나 분위기를 만들어낸다. 그래서 주눅들게 만든다. 어린 아이들에게 개성이없다. 튀지 않으려고 쭈뼛거린다. 한국이성형공화국이라고 불리는 것도 다 그런이유다. 남들과 비교해보고 뭔가 모자라는 것 같으면 모든 것이 흠이 된다. 하나님은 그것을 개성으로 만드셨는데도말이다. 다른 사람들과 조금 다르게 생각하면‘괴짜’, ‘4차원’이라고 부른다. 불완전하다는 것은‘모자란다’는것이아니라‘완전’이라는 기준이 없다는 것이다. 우리는, 하나님이 완전함의 기준을세우지 않고 완벽하게 만드신, 그래서 ‘불완전한’사람들을 우리는 어떻게 바라보고 있을까. 나 자신을 어떻게 바라보고 있을까.

 

로봇 앤드류를 통해 보는 예수님

시간의 지배를 받는 인간과는 달리 앤드류에게 시간은 완전히 다른 차원이다.앤드류에게는 시간이 의미가 없다. 왜냐면 그에게는 생명의‘끝’이라는 것이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마치 무한한 하나님을 의미하는 것 같다. 시간과 공간을 초월해서 살고 계시는 하나님. 또한이 땅에 내려오신 하나님이자 아들 예수그리스도의 모습이 살며시 보인다. 앤드류가 로봇으로 살았다면 영원히 살수 있었겠지만 그는 영원히 살 수 있는것을 버리고 제한적인 육체를 갖는 것을선택했다. 마치 예수님이 인간의 형체를띠고 성육신하여 이 땅에 내려오신 것처럼 말이다. 로봇에서 인간이 되기 위해앤드류는 많은 것을 포기했다. 그는 영원을 포기했고, 노화되는 것을 받아들였고, 인간의 제한적인 조건들을 수용했다.그는 사랑하는 여인과 함께 살기 위해,그녀와 한 몸을 이루고 가족이 되기 위해 모든 것을 버렸다. 모든 것을 제한시켜버렸다. 인간으로 이 땅에 내려오시면서 스스로 모든 것을 제한시키신 예수님처럼 말이다.
포샤가 로봇인 앤드류에게 감정을 느끼고, 사람으로 받아들이는 과정도 어떻게보면 이 땅에 살고 있는 크리스천들과우리들을 그리스도의 신부로 부르시는주님과의 관계 발전과정과도 흡사한 형태를 띤다. 인간과 로봇이 적당한 간격을 유지하고 각각 인간과 로봇으로 어울려 살듯이 우리도 적당히 예수님을 믿으며 적당한 관계를 유지하며 살아갈 수있다. 이 시기에는 인간과 로봇이 어떻게 사랑을 할 수 있느냐는 것이‘차원’ 에 대한 질문으로 시작되는 것처럼 우리는 내 안에 성령님이 내주하신다는 것을쉽게 이해하지 못한다. 육체를 갖고 있는‘나’라는 존재와 영이신 하나님이 교제하고 친밀해질 수 있다는 것을 이해하지 못하는 것이다. 인간의 머리로 이해할 수 없는 부분이다. 로봇과 인간의 교감과 사랑을 이해할 수 없듯이 말이다. 그러나 이 모든 것을 이성으로 이해하려는 시도를 벗어버리고 마음에 감동이 오는 대로 놓아둘 때 기적이 일어난다. ‘그게 어떻게 가능해?’가 아니라‘가능할 수도 있겠구나…’라는 인식의 전환만 된다면 가능한 일이다. 굳어진 마음이아닌 할례를 한 부드러운 마음이 될 때(또 새영을너희속에두고새마음을너희에게 주되 너희 육신에서 굳은 마음을 제거하고 부드러운 마음을 줄 것이며겔36:26) 우리는 성령님을내안에받아들이고 나와 내주하시는 분임을, 그리스도를 입은 내가 이 세상을 살아가는 것임을 깨닫게 된다.

 

우리 인간을 인간답게 만들어주는 것은 무엇인가

하나, 참된 자유를 끊임없이 추구한다.앤드류는 이야기한다. “수백만의 사람들이 죽음을 불사하고 가지려고 했던 것은자유다. 목숨을 걸 만큼 소중한 것.”이라고. 앤드류는 자유를 선언했을 때‘나’ 로 정체성이 변화되었고 그 자유를 통해인간으로의 성장을 모색할 수 있었다.자유를 찾은 그는 변화되었고, 또 자라났다.
하나님은 에덴동산을 만드실 때 인간에게 자유를 주셨지만 아담과 이브의 죄로인해 우리들은, 심지어 그리스도인들도참된 자유를 깨닫지 못하고 살아가고 있다. 결국 수많은 사람들은 수치심, 절망,근심, 걱정 등 사단이 주는 생각들을 받아들이며 스스로 만든 감옥에 갇혀 살아가고 있다. 이사야 61장 1절에‘포로된자에게 자유를, 갇힌 자에게 놓임을 선포하며’의 말씀은 사단의 속임수에 갇혀버려 참된 자유를 누리지 못하는 그리스도인들과 스스로를 제한시키고 묶어버린 그리스도인들에게‘한계가 없으신 하나님’의 특성대로 제한 없는 삶을 누리라는 의미로 해석될 수 있다.
둘, 감정을 갖는다는 것은 축복이다.자신이 섬기던 리처드가 죽었을 때 앤드류는 눈물을 흘릴 수 없다는 사실이 잔인하다고 표현한다. 슬픔을 표현할 길이없다는 것이었다. 사람들은 눈물을 흘리는 것을 싫어한다. 마음이 아프고, 슬픈상황을 받아들이고 싶지 않아한다. 하지만 앤드류는 이렇게 말한다. 눈물을 흘릴 수 있다는 것은 축복이라고. 감정을느끼고, 표현할 수 있다는 것은 인간만이 가질 수 있는 축복이라고. 예수님도 나사로의 죽음 앞에서 눈물을 흘리시지않았는가.
셋, 잠시 머뭄의 축복 앤드류가 가장 슬퍼했던 것 중의 하나는자신이 사랑하는 사람들은 언젠가 다 떠날 것이고, 자기는 항상 홀로 남겨져 있어야 한다는 로봇의 한계였다. 영원히산다는 것이 그에게는 오히려 불행하다는 것을 의미하는 말이었다. 불로장생을갈구했던 진시황이 들었다면 크게 노할이야기지만 말이다. 인간의 한계는 나도언젠가 이 땅을 떠난다는 것이다. 우리는 이 땅에 영원히 사는 것이 아니라 잠시 머물다 본향으로 돌아간다는 것, 천국 시민권을 가진 자라는 사실이다.

하지만 잠시 머무는 동안 우리가 할 일은 돌아갈 천국만을 꿈꾸는 것이 아니라이땅에머무는동안천국이이땅에이루어지도록 사는 일이다. 예수님이 이땅에서 천국이 이루어지도록 사셨던 것처럼, 앤드류가 끝까지 포기하지 않고인간이 되기 위해 노력한 것처럼, 우리들도이땅에있는동안천국의 삶을 살아야하는 것이다. 그는 로봇이라는 제한속에서 살지만 결코 제한적으로 살지는않았다. 그에게 있어서 천국이란 자유를누리고 인간으로 사는 것이었고, 결국그는 그렇게 살았다. 우리들도 제한적인이 땅에 살면서 천국의 삶을 살아야 한다.

생명을 제한시켜버리고 위험을 무릅쓰고 인간이 되기 위한 모험을 단행한 앤드류의 도전들을 통해, 그가 가지려고노력했던 모든 것들이 우리에게는 이미주어져있음을 본다. 턱시도를 입어보는것, 옷을 입는 것, 얼굴에 표정을 갖는것, 심장의 두근거림을 느끼는 것,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 춤을 출 수 있는 것,사랑하는 사람의 죽음 앞에서 눈물을 흘리는 것. 인간이기 때문에 겪어야하는많은 일들, 고통과 아픔 등의 일들이 로봇 앤드류에게는 모든 것을 주고서라도갖고 싶은 것들이었다는 것. 인간인 우리에게 주어지는 모든 것들이 오히려 축복임을 다시 깨닫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