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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엇을 주목하는가?

무엇을 주목하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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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INGDOM LIFE &
상담
무엇을 주목하는가?

한국방송통신대학교 청소년교육과 교수 하혜숙


 

스키너의 실험에서 쥐의 행동은 행동 뒤에 따라오는 결과에 따라 해당 행동이 증가하거나 감소한다. 스키너에 따르면 우리가 어떤 행동을 했을 때 긍정적인 결과, 즉 강화가 뒤따르는 행동은 증가하고 부정적인 결과, 즉 처벌이 주어지는 행동은 감소한다. 이러한 원리를 조작적 조건형성이라고 한다. 조작적 조건형성이론에서는 새로운 행동을 학습하는 데 있어서 강화와 처벌의 역할이 매우 중요하다고 본다.

 

바라는 것이 있을 때, 그 바라는 바를 얻기 위해 우리는 최선을 다 하지만

오히려 반대의 결과를 얻게 될 때가 있다. 왜 그럴까?

 

교실 상황을 떠 올려 보자. 선생님은 수업을 하고 있고 학생들은 얌전히 책상에 앉아 있다. 그런데 철수라는 녀석이 옆에 있는 짝꿍에게 장난을 거는 모습이 선생님의 레이더에 포착되었다. 선생님은 철수에게 “철수, 그러지 마!”라고 가볍게 경고를 주었다. 철수가 잠시 말을 알아들은 것처럼 보였다. 그런데 머지않아 철수는 소음까지 내면서 주위 친구들을 괴롭혀서 수업을 진행하는 선생님을 거슬리게 만들었다. 다시 한 번 선생님은 “철수, 얌전히 있어야지!”라고 엄한 표정과 함께 강한 경고를 주었다. 철수는 멈칫하는 듯 했지만 잠시 후에는 온 교실을 헤집고 다니면서 수업을 방해했다. 선생님은 도무지 통제 불능인 철수 때문에 수업에 집중할 수가 없었다. 그 수업은 철수 이름을 부르며 철수를 제지하느라 시간을 다 보내버린 것 같았다.

 

지금 살펴본 상황은 교실에서 흔히 일어나는 일이다. 말썽꾸러기가 하나 있으면 그 녀석을 통제하느라 선생님들은 애쓰게 된다. 하지만 도무지 그 녀석들을 당할 재간이 없다. 도대체 어떻게 해야 교실의 평화를 되찾을 수 있을까? 철수의 잘못된 행동을 바로잡기 위해 최선을 다해서 노력했지만 선생님이 무력감을 경험할 수밖에 없는 이유는 무엇일까?

 

이 문제를 이해하기 위해서, 교실에서 선생님과 철수 사이에 일어난 일을 행동주의 입장에서 살펴보도록 하자. 행동주의에서는 인간의 행동을 자극과 반응의 연결고리로 설명한다. 예를 들면 행동(behavior) 뒤에 어떠한 후속 결과(consequence)가 이어지느냐에 따라 그 행동을 지속할지 말지를 결정하게 된다는 것이다. 유명한 행동주의 심리학자인 스키너(B.F. Skinner)는 실험상자 안에 배고픈 쥐를 넣고 쥐의 행동을 관찰하였다. 실험상자의 쥐는 지렛대를 누르면 먹이가 나오도록 만들어진 상자 안에서 이리저리 움직이다가 우연히 지렛대를 누르고 먹이를 먹는다. 처음에는 지렛대를 누르면 먹이가 나온다는 것을 알지 못하지만. 몇 차례 이러한 행동이 반복되면 쥐는 먹이를 얻기 위해 계속해서 지렛대를 누르는 행동을 하게 된다.

 

스키너의 실험에서 쥐의 행동은 행동 뒤에 따라오는 결과에 따라 해당 행동이 증가하거나 감소한다. 스키너에 따르면 우리가 어떤 행동을 했을 때 긍정적인 결과, 즉 강화가 뒤따르는 행동은 증가하고 부정적인 결과, 즉 처벌이 주어지는 행동은 감소한다. 이러한 원리를 조작적 조건형성이라고 한다. 조작적 조건형성이론에서는 새로운 행동을 학습하는 데 있어서 강화와 처벌의 역할이 매우 중요하다고 본다.

 

그렇다면 앞의 예로 돌아가서 다시 보도록 하자. 교실에서 선생님은 철수 이름을 크게 부르며 경고하는 것이 철수에게 처벌로 작용해서 바람직하지 않은 행동을 그만 두게 만들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렇지만 결과는 선생님의 예상과 전혀 다르게 나타났다. 동일한 상황을 철수의 입장에서 보도록 하자. 철수는 부모님이 맞벌이를 하셔서 늘 바쁘시다. 성적도 그리 좋은 편이 아니어서 집이나 학교에서 한 번도 관심과 주목을 받아보지 못했다. 그런데 우연히 수업시간에 옆 짝꿍에게 말을 걸었는데 선생님이 이름을 불러주는 게 아닌가? 선생님이 내 이름을 불러주시다니! 철수는 이번에 옆 짝꿍뿐만 아니라 앞뒤에 있는 친구들을 괴롭혀 보기로 한다. 그러자 선생님이 내 이름을 더 크게 부르시고 나를 정면으로 향해 바라보시는 게 아닌가! 이제 철수는 아예 이리저리 교실을 돌아다녀보기로 한다. 그러자 수업시간 내내 선생님을 나에게만 집중하도록 만들 수 있었다. 철수는 그동안 받아보지 못한 관심과 주목을 마음껏 받을 수 있었다.

 

이처럼 철수의 떠드는 행동을 제지하기 위한 선생님의 행동은 오히려 철수의 바람직하지 않은 행동을 유지하게 만드는 역효과를 가져왔다. 원하는 바를 얻기 위해 한 행동이 정반대의 결과를 낳게 만든 것이다. 우리는 원하는 바를 얻기 위해서 바람직하지 않은 것을 제거하려고 시도하는 경우가 많다. 그렇다면 앞의 예에서 선생님은 어떻게 해야 할까?

 

선생님의 원하는 바는 철수가 얌전히 앉아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선생님은 철수가 바람직하지 않은 떠드는 행동을 찾아서 주목할 것이 아니라, 철수가 얌전히 앉아 집중하는 모습을 찾아내야 한다. 제 아무리 장난꾸러기 녀석이라 할지라도 한 시간 내내 떠들고 있지는 않는다. 어느 순간 얌전하게 앉아 있는 행동을 보일 때가 있다. 그 때를 포착해서 선생님은 그 바람직한 행동을 강화해주어야 한다. 그래서 철수의 떠드는 행동은 일관되게 무시하고 바람직한 행동을 일관되게 강화할 때 철수의 문제행동은 저절로 소거되게 된다. 그 바람직한 행동이 강화되어 점점 비중이 많아지도록 해야 하는 것이다. 즉, 바람직하지 않은 행동을 없애기 위해 바람직하지 않은 행동에 주목하기 보다는 바람직한 행동을 강화함으로써 더 많이 확대되도록 하는 것이 중요하다.

 

이 방법은 매우 효과적이고 좋은 방법이다. 다만 이 방법을 활용하기 위해서는 선생님이 철수를 유심히 관찰해야 하고 긍정적인 시각으로 바라봐 주어야만 한다. 바람직한 모습은 쉽게 발견되지 않기 때문에 선생님은 철수에게 관심과 에너지를 쏟아야 한다. 사실 교사나 부모들이 야단을 치거나 벌을 주는 방법을 택하는 것이 그 방법이 최선의 방법이어서라기보다는 그것이 훨씬 쉽고 편리한 방법이기 때문이다. 드러나는 문제 행동을 지적하는 것은 별로 어렵지 않지만 보이지 않는 바람직한 행동을 기다리고 그 행동이 나타나는 순간을 포착해서 적절하게 칭찬해주기란 매우 많은 인내와 관심을 요구하기 때문이다.

 

이것은 빛과 어두움의 원리이다. 어두움을 없애려고 어두움을 분석하려 한다면 어두움 속으로 점점 더 깊이 들어가게 된다. 어두움을 없애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어두운 방에 들어갔을 때 우리가 가장 먼저 하는 행동은 무엇인가? 그렇다. 스위치를 올려서 불을 밝히는 것이다. 어두움을 없애는 가장 좋은 방법은 바로 빛을 비추는 것이다. 빛을 비추면 어두움은 저절로 사라지게 되어 있다.

 

베드로가 무서운 바람과 일렁이는 파도를 볼 때 바다에 빠졌지만, 예수님을 바라봤을 때는 물위를 걸을 수 있었던 것처럼 우리가 바다에 빠질 것인지 물위를 걸어갈 것인지는 우리가 무엇을 바라보느냐에 달려있다.

 

장대에 달린 놋뱀을 쳐다본 이들은 모두 살았던 것처럼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보아야 우리도 살 수 있다. 왜냐하면 나는 죽었고 예수님이 내 안에 사시기 때문이다. 나의 어떠함은 나에게 근거가 있는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어떠하심이 나의 어떠함이 되기 때문이다.

 

너희가 전에는 어둠이더니 이제는 주 안에서 빛이라 빛의 자녀들처럼 행하라   엡5:8

 

우리는 우리 스스로가 주목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살펴야 한다. 나는 무엇을 보고 있는가?

 

베드로가 무서운 바람과 일렁이는 파도를 볼 때 바다에 빠졌지만, 예수님을 바라봤을 때는 물위를 걸을 수 있었던 것처럼 우리가 바다에 빠질 것인지 물위를 걸어갈 것인지는 우리가 무엇을 바라보느냐에 달려있다.

 

베드로가 대답하여 이르되 주여 만일 주님이시거든 나를 명하사 물 위로 오라 하소서

하니 오라 하시니 베드로가 배에서 내려 물 위로 걸어서 예수께로 가되 바람을 보고

무서워 빠져 가는지라 소리 질러 이르되 주여 나를 구원하소서 하니 예수께서

즉시 손을 내밀어 그를 붙잡으시며 이르시되 믿음이 작은 자여 왜 의심하였느냐 하시고   마14:28-31

 

상담실에서 만나는 많은 내담자들은 수많은 문제로 괴로워하고 있다. 그런데 그 문제들을 가만히 들여다보면 그 이면에는 자기 자신에 대한 수치심과 정죄감이 내제해 있다. 뿐만 아니라 많은 크리스천들도 수치심과 정죄감으로 힘들어 하고 있다. 우리를 괴롭히는 이러한 부정적 감정은 왜 생기는 것일까? 그것은 자기 자신을 주목했기 때문이다. 자아몰두의 결과는 비참함이다. 나 자신을 주목할 때 우리는 수치심과 정죄감을 경험할 수밖에 없다. 우리가 바라보아야 할 대상은 나 자신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이시다. 정죄감과 수치심을 벗어나는 가장 좋은 방법은 나를 향해 있는 눈을 들어 예수님을 바라보는 것이다.

 

믿음의 주요 또 온전하게 하시는 이인 예수를 바라보자   히12:2

 

모세가 놋뱀을 만들어 장대 위에 다니 뱀에게 물린 자가 놋뱀을 쳐다본즉 모두 살더라   민21:9

 

장대에 달린 놋뱀을 쳐다본 이들은 모두 살았던 것처럼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보아야 우리도 살 수 있다. 왜냐하면 나는 죽었고 예수님이 내 안에 사시기 때문이다. 나의 어떠함은 나에게 근거가 있는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어떠하심이 나의 어떠함이 되기 때문이다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것이라   갈2:20

 

나 당신으로 가득하기 원합니다.
다른 것 보이지 않게 다른 것 들리지 않게
내 안에 당신이 가득하기 원합니다.
내 안에 빈 곳 없게 나를 보려할 때 당신이 보이게
내 안에 당신이 넘치기 원합니다.
당신으로 내가 적셔지기 원합니다.
당신으로 인해 모든 슬픔 사라지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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