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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를 지으신 이가 하나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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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INGDOM LIFE &
상담
나를 지으신 이가 하나님

한국방송통신대학교 청소년교육과 교수 하혜숙


하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우리를 만드셨다고 하셨습니다.

 

하나님이 자기 형상 곧 하나님의 형상대로 사람을 창조하시되 남자와 여자를 창조하시고 창1:27

 

 

우리는 삶 속에서 이 말을 진리로 믿고 있는지요? 이 말씀의 능력이 우리 삶 속에서 나타나고 있는지요?

상담을 하면서 저는 자기 자신을 미워하는 사람들을 많이 만나게 됩니다. 내담자(상담을 받으러 오는 사람)들이 상담실에 와서 호소문제(내담자가 상담실을 찾게 된 주된 이유라고 말하는 문제)를 내어 놓을 때 “나는 내가 너무 싫어요!”라고 직접적으로 말하지는 않습니다. 내담자들은 주로 강박증, 불안장애, 대인관계 및 학업문제, 또는 알콜, 성 또는 게임 중독 등의 문제들을 이야기합니다.

하지만 이처럼 내담자가 구체적인 말로 호소하거나 생활에서 증상으로 드러나는 것이 진짜 문제가아닐 수도 있습니다. 따라서 상담자들은 주요 호소문제를 청취하지만 이 내담자의 진짜 문제가 무엇일지에 대해서 끊임없이 가설을 설정하고 점검해 나갑니다. 대부분 그 증상이나 문제를 일으킨 원인은 더 깊은 곳에 숨겨져 있는 경우가 많습니다.

많은 학자들은 정체감이 대부분의 문제들의 시발점이라고 이야기합니다. ‘정체감’이라는 것이 무엇입니까? 정체감이란 결국, “내가 나를 어떻게 생각하느냐”의 문제입니다. 내가 나를 좋아하고 만족하느냐, 싫어하느냐의 문제입니다.

최근 인상 깊게 본 그림 이야기를 하나 하려 합니다. 「수태고지」라는 그림은 몇 백년간 레오나르도 다빈치(Leonardo da Vinci)의 최악의 실수작으로 알려져 있었습니다. 왜냐하면 그림 속의 건물과 배경이 원근법에 어긋나 있고 마리아에게 잉태를 알리는 가브리엘 천사가 정도 이상으로 비대해 보이고, 마리아의 오른팔이 비정상적으로 길고 탁자와 마리아의 위치가 너무 멀어서 어색해 보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동안 이 그림이 다빈치의 그림이 아니라는 주장과 다빈치가 그림을 정식으로 배우기 이전에 그린 그림이기 때문에 그럴 것이라는 주장 등이 난무했습니다.

밝혀진 바에 의하면, 원래 이 그림은 수도회의 요청에 의해 그려졌다고 합니다. 이 그림이 원래 걸려 있던 곳은 성발토르멜 수도원의 식당이었고, 1867년에 피렌체 우피치 미술관으로 옮겨져 소장되었다고 합니다. 일반적으로 미술관에서 사람들이 관람할 때는 그림을 정면에 두고 보게 됩니다.이처럼 우피치 미술관에 걸려 있는 수태고지 또한 정면에서 관람하게 되는데, 정면에서 볼 때는 위에서 언급한 여러 가지 불일치들이 보이게 됩니다. 그런데 이 그림이 원래 걸려 있던 수도원의 식당에서는, 식당이 좁아서 왼쪽 상단의 벽에 걸 수밖에 없었다고 합니다. 따라서 이 그림이 원래 걸려있던 것처럼 왼쪽 상단에 그림을 놓고 다시 보게 되면, 여러 가지 불일치들은 감쪽같이 사라지고 아름답고 신비로운 수태고지 장면이 드러나게 됩니다.

이처럼 다빈치가 자신의 입장이 아니라 그림이 걸려있어야 할 위치와 그림을 보게 될 관람자의 입장에서 그림을 그렸기에 오늘날에도 그를 천재라고 하는 게 아닐까 생각해 보았습니다.

저는 이 그림보기를 통해서 두 가지를 생각해 보았습니다. 첫째는, 원래 그림이 만들어진 모양대로 그 위치에 있지 않으면 아무리 걸작이라도 졸작으로 보일 수밖에 없다는 것. 즉, 원래 만들어진 모양대로, 원래 만든 의도대로 존재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점입니다. 둘째는, 관람객이 바른 관점에서 보는 것이 중요하다는 점입니다. 즉, 작품이 아무리 걸작이라 하더라도 그것을 바라보는 사람의 관점이 매우 중요하다는 점입니다.

하나님께서 완전하신 하나님의 형상으로 우리를 만드셨음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자기 자신이 아닌 다른 모양으로 존재하고 싶어하고 또 다른 사람을 삐딱한 시선으로 바라보기도 합니다.

 

선생님 율법 중에서 어느 계명이 크니이까 예수께서 이르시되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하셨으니
이것이 크고 첫째 되는 계명이요 둘째도 그와 같으니 네 이웃을 네 자신 같이 사랑하라 하셨으니 마22:36-39

 

 

어느 계명이 가장 큰지를 묻는 율법사의 질문에, 예수님께서는 위와 같이 말씀하셨습니다. 하지만 마음과 목숨과 뜻을 다해서 하나님을 사랑하라고 할 때는 마음이 뜨거워지다가도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는 두 번째 계명 앞에서는 슬그머니 꼬리를 내릴 수밖에 없는 것 같습니다. 하나님께서 바라시는 것은 관계의 회복이고, 사탄이 바라는 것은 관계의 파괴입니다. 또한 하나님은 관계 가운데 계십니다. 성부, 성자, 성령의 삼위가 한 분이시듯, 우리도 관계 속에서 조화를 이루며 하나가 되기를 바라시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 아닐까 생각해 봅니다.

우리에게 누군가와 불편한 관계 가운데 있거나 다른 사람과 잘 지내지 못하는 이유를 물으면 ‘성격’ 때문이라고 합니다. 흔히들 “성격이 맞지 않아서”라고 합니다. 그렇다면 과연 성격은 무엇일까요? 다시 말해서 성격은 타고나는 것일까요, 아니면 환경의 영향으로 만들어지는 것일까요? 사실 이 질문은 심리학의 오랜 논쟁거리이기도 합니다. 과연 인간의 삶에서 유전의 영향이 더 큰가, 아니면 환경의 영향이 더 큰가에 대한 질문입니다. 결론부터 말씀드리자면, 양측의 주장이 팽팽하게 오랫동안 대립해 오다가 대략 50:50으로 합의를 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이 결론에 대해 정리해보면, 우리에게는 생물학적으로 미리 주어진 일명 ‘종자’가 있습니다. 예를 들면, 어릴 적 친구를 어른이 되어 다시 만나도 그 친구는 여전히 그 친구입니다. 즉, 그 사람을 그 사람이게끔 만드는 무언가 실체가 있는 것입니다. 성격의 안정성, 일관성의 측면입니다. 어떤 면에서 보면, 성격은 나의 의식 여부와 상관이 없습니다. 태어나기 전, 자궁 속에서부터 이미 결정되어 있는 것입니다. 아이를 여럿 낳아서 기른 어머니들이 흔히들 말하기를 “뱃속에서부터 노는 게 달랐다”고 합니다. 이미 착상되는 순간부터, 신생아 때부터 정해진 유전적 성격, 기질이 있는 것입니다. 하지만 한편으로 부모, 물리적 환경, 친인척, 학교, 직업도 환경에 속합니다. 이러한 환경이 ‘나’ 라는 사람을 형성하는데 많은 기여를 합니다. 우리 어릴 적 보던 드라마에서 쌍둥이가 전혀 다른 환경의 부모에게 입양되어 상반되는 삶을 살다가 조우하게 되는 스토리가 종종 있었던 것을 기억하실 겁니다. 따라서 성격을 알기 위해서는 유전과 환경을 모두 포함시켜야 합니다. 개념상으로는 두 가지가 나뉘어져 있지만, 사실 한 사람 안에서 화학적으로 잘 결합되어 있는 것입니다. 이것이 성격인 것입니다.

상담에서 사용하는 심리검사 중에는, ‘나무’를 그리도록 해서 그 사람의 정체성과 적응 정도를 알아보는 투사 그림 검사가 있습니다. 상담에서는 종종 사람을 나무에 투사하거나 비유합니다. 이처럼 나무로 우리를 표현해 보자면, 우리가 한 가정에서 태어난 것은, 씨앗이 땅을 뚫고 나와서 싹이 움튼 것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이 때 기질은 나무의 뿌리 부분에 해당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 이 씨앗이 가지고 있는 원래의 기질이 있지만, 환경에 따라 자라는 모양이 달라질 수 있습니다. 바람이 한쪽으로만 계속 불어오는 땅에서 자란 나무는 바람의 방향대로 가지가 휘어질 것이고, 햇볕이 부족한 곳에서 자라는 나무는 햇볕을 더 많이 모으기 위해 나뭇잎을 넓혀 가며 자랄 것입니다. 따라서 기질과 환경이 상호작용하면서 모습을 서서히 갖추어 가는 것입니다.

하지만 자기의 모습을 충분히 갖추기 전에 외부의 영향을 너무 많이 받으면 심한 왜곡이 일어날 수도 있습니다. 원래 기질상으로는 활달하고 말이 많을 수밖에 없는데, 부모에게 타박 받고 학교에서 선생님에게 야단맞다 보면 자신의 기질과 반대로 하려고 애를 쓰게 됩니다. 제 내담자 중 한 사람은, 어릴 적 친구 집에 가서 쿠키를 하나 먹었는데 너무 맛있어서 또 하나 더 먹고 싶었지만 “남자는 의젓해야 한다”는 아버지의 훈계가 생각나서 꾹 참고 먹지 못했다고 합니다. 그 때 그 쿠키를 못 먹은 것을 그 내담자는 두고두고 이야기했습니다.

우리 성격은 뿌리 부분(기질)이 가려져 있기 때문에, 이 부분을 사회적으로 조정하게 되면 자신의 성격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기가 어렵게 됩니다. 부모님의 기준으로 자신을 타박을 하게 될 수 있습니다. 예를 들어 뿌리 부분을 보면 말이 많을 수밖에 없는데, 매번 타박을 받다 보니 그렇게 안 보이려고 애를 쓰게 됩니다. 사실 뿌리는(기질은) 대뇌 신경계와 상관이 많습니다. 즉, 이것을 인간의 의지로 변화시키기가 어렵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하지만 겉모양은 현실과 조화를 이루도록 변형을 시키는 경우가 많습니다. 이처럼 살아가는 과정에서 환경과의 완충장치로서 발달하게 되는 것을 융 심리학에서는 ‘페르조나(persona, 가면)’라고 부릅니다. 따라서 페르조나도 성격의 일부로 혼합되어 있는 것으로 이해해야 합니다.

사람들은 자신의 성격을 알고 싶어 합니다(한편으로 생각해 보면, 참으로 이상하기도 합니다. 자기 성격인데 그것을 알기 위해서 검사를 해봐야 한다니…). 그런데 성격 유형 검사를 하다보면, 혼란스러워하는 분들이 많습니다. 검사 결과가 뚜렷하게 어느 한 유형에 속하는 것으로 나오지 않아서, 자신이 어떤 성격 유형인지 구분하기 어렵다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자신이 외향형인지 내향형인지 헷갈린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경우에는 몇 가지를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만, 가장 먼저 추측해 볼 수 있는 것은 원래 기질을 알 수 없을 정도로 페르조나의 기능이 비대해진 경우입니다. 타고난 기질을 누르고 환경의 영향에 맞추어 살아오다 보니, 지금에 와서는 어떤 것이 진짜 자기 모습인지 자기 스스로도 알기 어려워진 것입니다. 환경의 영향이 적정 수준을 넘어서 압력을 가하게 되면 변형이 일어나는데, 이러한 변형이 심할 경우 긴장을 유발하게 됩니다.

 

이에 그들의 눈이 밝아져 자기들이 벗은 줄을 알고 무화과나무 잎을 엮어 치마로 삼았더라 창3:7

 

 

우리가 이 땅에서 살아남기 위해, 이 세상에 적응하기 위해 발달시킨 페르조나가, 마치 아담과 이브가 자신들의 수치를 가리기 위해 덮었던 무화과 나뭇잎과 같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있는 그대로의 내 모습으로는 너무나 부끄러워서, 남들에게는 보여줄 수 없어서, 보여주고 싶지 않아서, 내가 아닌 다른 모습으로 보이고 싶어서….

 

여호와 하나님이 아담과 그의 아내를 위하여 가죽옷을 지어 입히시니라 창3:21

 

 

불안과 두려움으로 무화과 나뭇잎으로 수치를 가린 우리에게 하나님은 가죽옷을 지어 입히셨습니다. 성경을 읽으면서 이 대목에서 하나님의 아버지 되심의 사랑이 느껴져서 한동안 이 구절에 머물렀던 기억이 납니다. ‘무화과 잎’이 우리의 죄로 말미암아 필연적으로 경험할 수밖에 없는 수치와 두려움을 가리기 위한 우리 자신의 애씀과 노력이라고 한다면, ‘가죽옷’은 하나님 아버지의 사랑으로 말미암아 우리에게 은혜로 주신 예수 그리스도의 의의 옷이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무화과 나뭇잎은 내가 자의적으로 만들어 덮을 수 있지만, 가죽옷을 만들기 위해서는 죄 없는 짐승이 죽어야만 했을 것입니다.

기억해 봅니다. 하나님을 만나기 전에는 제 자신이 정말 싫었습니다. 남들에 비해 못난 것, 못 가진 것이 싫었고, 그 못난 걸 다른 사람들이 눈치 채는 게 싫어서 이를 악물고 다른 것으로 보상하려 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을 만난 후, 하나님이 내 아버지라는 것이 바로 구원이었습니다! 내 아버지가 하나님이라니! 너무나 신나고 가슴이 쫘~악 펴졌습니다. 하나님이 나를 사랑하신다는 것, 나를 사랑하셔서 나의 죄를 대신해서 죽으셨다는 그것이 바로 복음이었습니다. 그래서 이제는 더 이상 나를 부끄러워할 필요도, 다른 모양으로 그럴듯해 보이기 위해 나를 가릴 필요도 없었습니다. 그것이 바로 자유였습니다.

 

그러므로 너희가 그리스도와 함께 다시 살리심을 받았으면 위의 것을 찾으라
거기는 그리스도께서 하나님 우편에 앉아 계시느니라 위의 것을 생각하고 땅의 것을 생각하지 말라 골3:1-2

 

 

이제는 너희가 이 모든 것을 벗어 버리라 곧 분함과 노여움과 악의와 비방과 너희 입의 부끄러운 말이라
너희가 서로 거짓말을 하지 말라 옛 사람과 그 행위를 벗어 버리고 새 사람을 입었으니
이는 자기를 창조하신 이의 형상을 따라 지식에까지 새롭게 하심을 입은 자니라 골3:8-10

 

 

그러므로 너희는 하나님이 택하사 거룩하고 사랑 받는 자처럼 긍휼과 자비와 겸손과 온유와 오래 참음을 옷 입고
누가 누구에게 불만이 있거든 서로 용납하여 피차 용서하되 주께서 너희를 용서하신 것같이 너희도 그리하고
이 모든 것 위에 사랑을 더하라 이는 온전하게 매는 띠니라 그리스도의 평강이 너희 마음을 주장하게 하라
너희는 평강을 위하여 한 몸으로 부르심을 받았나니 너희는 또한 감사하는 자가 되라 골3:12-15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나를 만드셨다고 하셨습니다. 그러하기에 내가 생각하는 내 모습이 아니라 아버지께서 만드신 모습 그대로 나를 보기 원합니다. 또한 내 입장이 아니라 하나님의 관점에서 이웃을 바라보기 원합니다. 나 자신을 그리고 이웃을 수용하고 이해하기 원합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아버지의 사랑을 받고 있는 나를 발견하고 또한 관계의 회복이 일어나기 원합니다.